지워졌다고 믿었던 사람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
9월 12일 오전 9시 00분.
전산팀은 백오피스 보고서 서버를 점검하다가 알 수 없는 로그를 발견했다.
“퇴사 처리된 계정인데… 3일 연속 접속 흔적이 찍혔습니다.”
“게다가 구조조정 명단 파일, 암호화된 파일을 열람하려는 시도가 있었고요.”
보고는 곧장 상위 관리자에게 올라갔고,
관련 엑셀 파일 전부에 ‘보안 1등급 DRM’ 기능이 일시 적용됐다.
회의실 한쪽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이상합니다. 이미 계정은 삭제됐는데, 로그가 계속 찍힙니다.
보통은 흔적조차 사라져야 하거든요.”
그리고 다른 이가 낮게 되물었다.
“계정은 지웠는데 로그가 남는다… 버그인가요, 아니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산팀 대리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시스템이 사람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회사 바깥에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거죠.”
윤성재 차장이 보고서를 받았다.
“사번은?”
전산팀 직원이 머뭇거렸다.
“정확히는…
사번은 이미 퇴사 처리돼서 ERP랑 메인 서버에서는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로그상 흔적이 남아 있어요.
보통은 계정이 지워지면 접속 기록도 다 끊겨야 하는데,
이번 경우는 달랐습니다.
백업 서버에는 그 계정 이름이 여전히 찍혀 있었고,
공유폴더 접근 권한도 해제되지 않아 열람 흔적이 남았고,
심지어 결재 시스템 로그에도 ‘열람 시도’ 기록이 반복됐습니다. 삭제됐어야 할 사람이,
마치 엑셀에서 ‘행 삭제(Delete)’가 아니라 ‘숨기기(Hide)’만 된 것처럼,
겉으로는 안 보이는데 안쪽 데이터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같은 시각,
최유상도 백업 서버에서 구조조정 분석 데이터를 다시 열어보고 있었다.
정리 대상 리스트에서는 사라졌던 이름이, 다른 기록 속에서 다시 발견된 것이다.
“이상하네… 명단에서 지워졌는데
김세진? 이 사람, 왜 아직 남아 있지?”
분명 시스템에서는 김세진의 이름이 삭제됐어야 했다.
그런데 메신저 대화, 회의 피드백, 인사 기록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더 이상한 건, 그 흔적들이 전산상에서 자동으로 생성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시스템 바깥에서 그녀의 존재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그날 오후,
기획2팀으로 확인 요청이 들어갔다.
답변은 짧았다.
“김세진 과장님, 어젯밤 인사팀에 항의 공문 보냈습니다.
전자결재가 아니라, 자필로. 종이에요.”
유상은 그 순간 멈췄다.
손으로 쓴 기록.
시스템이 읽을 수 없는 문장.
그는 처음으로 셀 바깥의 감정이 기록되는 방식을 목격한 셈이었다.
그 무렵,
서종우는 복사기 앞에서 한 장의 문서를 발견했다.
익숙한 글꼴과 여백, 그러나 결재란에는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았다.
결재번호 215-A
문서명: 「직무존속 이의 신청서」
프린트본과 다른 점은, 마지막 줄에 번진 손글씨였다.
“발령은 내 자리에서 날 지웠지만,
나는 아직 이 자리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 문장은 종우의 가슴 언저리를 스쳤다.
그는 서랍에서 스탬프를 꺼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번만큼은 찍을 수가 없었다.
한편, 한기윤은
기획2팀 식대 보고서에서 미묘한 변화를 발견했다.
“…콩 소비가 다시 늘었네?”
보통이라면 줄어야 하는 수치였다.
정리 대상자가 빠졌다면 당연히 숫자도 줄었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기윤은 그 순간 직감했다.
회사 시스템에서 지워진 누군가가,
여전히 이곳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을.
그날 저녁,
네 사람은 각자 다른 이유로 같은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 줄짜리 행을 발견했다.
엑셀 화면에서는 감춰진 행,
숨겨진 시트 속의 셀.
그 안에는, 지워졌어야 할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김세진 / 사번 없음 / 정리 사유 없음 / 상태: “열람 중”
네 명 모두의 커서가 같은 셀 위에 머물렀다.
화면에는 ‘공유 충돌’이라는 메시지가 떴지만,
네 사람은 알았다.
이것은 단순한 파일 충돌이 아니라,
지워졌다고 믿었던 사람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