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만을 믿고 살아온 분석가
최유상은 숫자 속에서 눈을 떴다.
새벽 3시, 모니터엔 아직 엑셀 창이 켜져 있었다.
잠든 것도 아니고, 깨어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셀 안에 머물렀다.
그는 데이터 분석실의 선임이었다.
직급보다 먼저 따라붙는 별명은 따로 있었다.
“넘버 크런처.”
숫자를 씹고, 삼키고, 결과를 토해내는 사람.
그는 이 표현을 은근히 마음에 들어했다.
‘사람을 위한’ 분석이 아니라,
‘사람을 수치로 만드는’ 분석에 자신이 있었다.
그날 아침, 본부장 호출이 들어왔다.
“유상 대리. 인력 최적화 분석 부탁해.
이번 M&A 조건 중 하나야.
정리 대상 추출 모델, 빨리 만들어줘.”
유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 분석을 시작했다.
성과지표, 근속연수, 회의 발화량, 복지 이용률,
휴가 패턴.
한 명의 직원이,
42개의 수치 열로 분해되었다.
이름은 사라지고, 사번만 남았다.
유상은 오히려 편안했다.
감정 없는 공간. 그가 가장 잘하는 영역.
며칠 후, 정리 우선순위 리스트가 도출됐다.
상위 5명. 그중 마지막 이름에,
그의 커서가 멈췄다.
김세진 / 기획2팀 과장
유상은 그 이름이 익숙했다.
그녀는 종종 분석요청서를 보낼 때마다, 셀 옆에 이런 코멘트를 남기곤 했다.
“데이터는 말해주지 않아요.
다만, 시작점이 되죠.”
그 말은 늘 불편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했다.
수치상 세진은 ‘잔존가치 낮음’이었다.
그러나 유상은, 어딘가 마음이 걸렸다.
오후, 그는 직접 기획2팀으로 내려갔다.
슬며시 열린 회의실 문틈 너머로
김세진이 신입 직원의 발표에 피드백을 주는 모습이 보였다.
말의 속도를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단어를 반복해주는 그녀의 말투는 놀랄 만큼 섬세했다.
엑셀에는 없는 값이었다.
모델은 설명하지 못하는 장면이었다.
그날 밤, 유상은 분석 모델을 수정했다.
가중치를 조정하고, 피드백 항목을 추가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김세진 : 여전히 정리 우선 대상.
그는 알았다. 모델이 틀린 게 아니라,
세진이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보고서를 저장하지 않았다.
대신 메모장에 문장 하나를 남겼다.
“숫자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 문장은 어디에도 제출되지 않았다.
셀은 문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며칠 뒤, 인사전략실 윤성재 차장이 파일 요청을 해왔다.
유상은 말없이 파일을 전송했고, 사무실을 나와 복도에서 담배를 피웠다.
수치는 정확했다.
결과는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그 밤, 그는 컴퓨터를 끄고 처음으로 셀을 열지 않았다.
몇 날이 지나, 유상은 자신도 모르게 메신저 창을 열었다.
김세진의 이름을 클릭했지만, 아무 말도 입력하지 못했다.
대신, 조용히 창을 닫았다.
그의 눈앞에서 숫자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안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