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 익숙한 인간이, 인간을 숫자로 세기 시작하는 순간”
8월, 푹푹 찌는 습기에 모든 것이 무기력해지던 오후였다.
하지만 한기윤은 늘 그렇듯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구내식당 옆 복도 끝. 8시 45분.
출근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한 그는 스테인리스 찬장 위에 놓인 통조림들을 바라봤다.
칼로 자르듯 정확한 시선. 그건 식단이 아니라, ‘데이터’였다.
하루 평균 콩 소비량: 124인분 기준 약 7.2kg.
유통기한 3일 전, 산화 가능성 12%.
남은 통조림 수량: 17개. 예비치 2개 초과.
기윤은 아무 말 없이 계산기를 꺼냈다.
그리고 옆 포스트잇에 몇 자 적었다.
8월 11일 자 A식단: 콩 1.5캔 감축 가능.
그는 이마에 맺힌 땀도 닦지 않은 채 식당 담당 직원에게 말했다.
“오늘 중식 A, 콩 반 통 줄여도 괜찮습니다.”
직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기윤 대리님, 콩으로 구조조정이라도 하시게요?”
기윤은 웃지 않았다. 그는 그 말을 듣지 않는 사람처럼 고개만 끄덕이고 돌아섰다.
누군가 그를 ‘빈카운터’라 부르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처음엔 장난 같았다.
하지만 곧 조롱이 되었다.
“기획팀에도 저 사람 있으면 예산 절반 줄겠네.”
“진짜로 콩으로 사람 자르는 거 아니야?”
기윤은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오로지 수치와 셀, 그리고 보고서였다.
사람은 셀 안의 숫자였고, 감정은 편차였다.
무언가가 낭비된다면, 그것은 ‘줄여야 할 수치’였다.
오후, 그는 쓰레기통 앞에 섰다.
남겨진 콩, 남겨진 밥풀, 남겨진 시간.
그는 통조림 하나당 가격을 곱했고, 폐기율을 나눴다.
숫자는 증명했고, 셀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폐기율: 63.8% / 연간 손실 추정: 84만 2천 원
그가 만든 보고서의 제목은 이랬다.
〈콩을 줄이면 미래가 보인다〉
그 문장은 농담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보고서는 전사적 원가 구조조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기윤은, 그 숫자의 감각 덕분에 ‘백오피스 인재 추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날 오후.
하루에도 몇 번씩 통계 분석을 반복하던 그의 커서가 멈췄다.
“대리님.”
기획팀 조유진이 그를 찾아왔다.
“저… 점심시간 오래 쓴 거, 아셨죠?”
기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사번이 적힌 셀을 잠시 바라보았다.
점심시간 평균: 1시간 13분 / 개인 사적 대화 횟수: 주 5회 이상
“그날, 팀원 하나가 퇴사 고민 얘길 했어요.
그냥 같이 걷고 싶다 해서...
그건, 기록 안 되죠?”
기윤은 처음으로 아무 계산도 하지 못했다.
숫자는 있었지만, 말은 없었다.
셀은 정갈했지만, 감정은 흩어졌다.
이틀 뒤, 그녀는 퇴사했다.
퇴직 사유란엔 단 두 단어가 적혀 있었다.
“개인 사정.”
보고서에는 목표 달성률이 **+1.3%**로 기록되었다.
셀은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조건부 서식이었다.
그는 그 셀 위에 커서를 올렸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기윤은 처음으로 커서를 멈췄다.
마음속에서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콩을 세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을 콩처럼 세고 있었다.”
그 문장은 보고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셀은 그것을 담지 못했다.
기윤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계산기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식자재 창고로 걸어갔다.
스테인리스 찬장 위,
오늘은 콩 대신 다른 통조림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대로 멈춰 섰다.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았다.
숫자가 침묵하는 순간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