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을 찍는 순간의 무게
서종우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사람 대신 문서를 오래 봤고,
눈빛 대신 인감의 압력을 더 신뢰했다.
종우의 세계에서
‘서류는 말보다 오래 남는다’는 게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가 앉은 자리는 복도 가장 안쪽, 복사기 옆 회색 책상이었다.
총무과 과장. 8년째, 한결같은 자리.
직원들은 종종 그 자리를 ‘공기 같은 자리’라 불렀다.
존재하지만,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위치.
하지만 종우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고서 결재선 정리, 인감관리 대장 작성, 회람 경로 지정, 정리정돈된 문서 트레이…
그가 하는 일은 단 한 줄로 요약되곤 했다.
“펜슬푸셔. 말 없이 도장만 찍는 사람.”
3년 전 회식 자리에서,
경영기획실 부장이 농담처럼 말했다.
“서 과장은 도장은 찍지, 책임은 안 지잖아.”
술잔이 오가던 자리에서 모두가 웃었지만,
종우는 웃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몫을 정산했다.
그날 이후,
그는 도장을 더 조심스럽게 찍기 시작했다.
결재선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책임을 지기 위한 조심이 아니라,
책임이 자신에게 오지 않게 막기 위한 방어였다.
그의 곁에는 신입 직원 박도윤이 있었다.
묻기 전에 두 번 망설이고,
말끝마다 “죄송합니다”를 붙이는 후배.
그는 종우에게 업무를 하나씩 물으며 따라했다.
인감 보관함 열쇠 위치, 회람 번호 순서, 비품 발주 기준표.
도윤은 묵묵히 기록했고,
종우는 별다른 반응 없이 필요한 것만 알려줬다.
그러던 어느 날 도윤이 말했다.
“과장님, 이번에 회람도 안 된 보고서들 있던데요.
인사 명단 같은 거요. M&A 관련… 맞죠?”
종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잠시 무언가 흔들렸다.
곧 다시 정적에 묻혔다.
“…그건 권한이 없는 문서다. 보지 마.”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 뒤
종우의 책상에 도착한 A4용지 한 장.
제목은 간단했다.
"우선 조정 대상 부서명단 (1차)"
결재선 확인 후 도장 요망.
종우는 늘 그랬듯 문서를 펼쳤고,
줄 간격을 확인했고, 글씨 크기와 표 정렬을 검토했다.
그의 손은 익숙했고, 표정은 무표정했다.
그런데 그 명단에서, 그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박도윤'
종우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바로 그때
도윤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
“과장님, 오늘은 제가 하나 더 가져왔어요. 단 거 드시죠?”
종우는 말없이 한 잔을 받았다.
커피의 온도는 미지근했고,
잔열은 느리게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그는 다시 문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도장을 꺼냈다.
딸깍.
9월 7일, 박도윤은 퇴사 통보를 받았다.
공식 사유는 ‘조직 재편에 따른 인력 조정’이었다.
그의 이름은 회람되지 않았고,
퇴직 안내는 전사 메일로 공유되지 않았다.
그저, 비활성화된 사내 메신저 계정 하나.
새 명찰과 하드보드가 그의 자리에 놓였다.
퇴사 전날, 도윤은
종우의 책상에 커피 한 잔을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과장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그는 돌아섰고, 종우는 조용히 커피를 내려다봤다.
그 옆에는, 그가 가장 자주 썼던 인감 스탬프가 놓여 있었다.
너무 익숙한 도구. 너무 무거운 결정.
종우는 서랍을 열었다.
문서 사이에서 손끝에 걸린 종이 한 장.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하지만 나는 칼을 쥔 적도, 펜을 휘두른 적도 없다.
다만, 매번… 찍었다. 말없이.”
그 문장을 손으로 접어 넣고, 서랍을 닫았다.
복사기에서 출력되는 종이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누군가는 여전히 결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책상 위에서 펜을 치웠다.
그리고 스탬프를 서랍 깊숙이 넣었다.
결재선이 아닌, 침묵 속에서.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