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만든 수식의 대상이 되어가는 순간
윤성재는 정확한 사람이었다.
출근은 8시 55분, 점심은 12시 정각, 퇴근은 18시 02분.
회의는 시작 3분 전 도착, 결재는 오전 중 마감.
그의 하루는 숫자처럼 돌아갔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문장, 정해진 결론.
그는 인사전략실 차장이었지만,
동료들은 그를 ‘코스트 커터’라 불렀다.
정리하는 자.
사람의 이름 옆에 점수를 붙이고, 거기에 잔존가치를 매기고,
리스트의 순서를 바꾸는 자.
윤성재는 정리의 순간에 감정을 쓰지 않았다.
그건 ‘조직의 생존을 위한 의사결정’이었고,
그는 단지 가장 논리적인 수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날 오후, 본부장이 호출했다.
M&A 실사 최종 조건이 내려왔다.
“엘리온에서 인력 12% 감축 요청했네.
이 리스트는 넘버 크런처가 만든 거야. 성재 차장이 최종 확정만 해주면 돼.”
윤성재는 엑셀 파일을 열었다.
사번으로 익숙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성과지표, 협업도, 재교육 비용, 조직 기여도.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사유 코드를 입력하고,
퇴사 안내 문구를 붙였다.
그가 자른 건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선, 필드가 정리된 행이었다.
퇴사 안내 메일 1차 발송.
일시: 7월 27일 오전 9시 00분.
대상자 수: 27명.
그는 그중 누구도 호출하지 않았다.
감정은 비용이었고, 비용은 줄여야 할 항목이었다.
오후, 한 명이 찾아왔다.
기획2팀 과장, 김세진.
그녀는 메일을 출력해 들고 있었다.
“메일 잘 받았습니다.”
윤성재는 익숙한 문장으로 응답했다.
“과장님, 충분히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세진은 멈칫했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름이 아니라 순번으로 불리는 기분, 꽤 묘하더라고요.”
성재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정은 조직의 장기적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입니다.”
세진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장, 오늘 저 포함해서 네 명이 들었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 순간, 성재는 처음으로 회색 셀을 응시했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
회색 음영 안에 스며들어 있었다.
며칠 뒤,
그는 우연히 복도에서 세진과 마지막으로 마주쳤다.
그녀는 조용히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성재는 무의식중에 한 발짝 멈춰 섰다.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처음으로 시간을 놓쳤다.
18시 02분.
그의 하루는, 그날 7분 늦게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업무 포털에 익숙한 문구가 떠올랐다.
[인사팀 발신] 인사 전략실 재편 공지
그는 공지를 열었고,
셀 위의 사번 목록을 훑었다.
스크롤을 내리는 순간,
자신의 사번을 봤다.
그의 이름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정 권고: 타 부서 전환 / 대기 전환 대상 (예비)
그는 화면을 닫지 않았다.
대신, 메일함을 열었다.
자신이 만든 통보 문구를,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 적어보았다.
“조직의 장기적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입니다.”
그 문장은 갑자기 낯설었다.
너무 많이 봐서,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아야 할 문장이었다.
그런데도, 손끝이 떨렸다.
그날 밤, 그는 빈 셀 하나를 열었다.
사유 코드도, 기여 점수도 없는 셀.
그는 그 안에 짧은 문장을 남겼다.
“나는 누구도 자르지 않았다.
다만, 이름을 지웠다.”
그는 그 문장을 저장하지 않았다.
다만,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문득 커서가 깜빡였다.
셀 안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 어딘가에서.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