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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Oct 03. 2016

#68. 그때를 기억해

악연이었을까 귀인이었을까

오래 인연과의 조우

오랜 인연 A를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는 직급이 차장이었는데 지금은 임원이 됐다. 그는 내게 늘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관해서 묻곤 한다.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기자를 그만두려고 했던 때가 말이다. 

반갑습니다

오래전 어느 날이었다. 직속 선배와 난 점심 자리를 함께 참석했다. A차장은 임원과 함께 나왔다. 인사를 주고받았다. 


선배는 이들과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는 본인 특유의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확실한 존재감

출입처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없다. 존재감 하나는 확실했다. 다만 문제는 그게... 좋은 쪽이 아닌 안 좋은 쪽으로 자자했다.


굳이 그를 선배의 유형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멍게(멍청하고 게으른)에 속한다. '굳이' 따지면 말이다. 하지만 그냥 멍게라고 하면 일반적인 멍게 선배들이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는 멍게에서도 특별한 멍게에 해당해서다. 왜냐하면 이렇다. 


보통 멍게의 경우엔 후배에게 권한과 책임을 다 위임한다. 그래서 멍게와 팀을 이룬 후배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후배는 멍게가 체면치레만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을 해주면 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후배가 얻는 자유는 무한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멍게는 후배들로부터 후한 평가를 받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특별한 멍게다. 멍청하고 게으른데 욕심이 많았다. 능력은 안 되면서 욕심이 많으니 후배의 공을 가로채는 유형이었다. 

들려오는 하소연

내가 모시고(?) 있다 보니 그에 대한 불만은 늘 내게로 집중됐다. 불같은 성격임을 아는 탓에 대놓고 뭐라고 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내게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고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나 역시도 그로부터 걸쭉한 문장들을 듣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목격하고 전해 들은 것을 토대로 재구성하자면 이런 식이다.


"자료를 이딴 식으로 주면 어떡해. 일을 이따위로 할 거야? 자료 제대로 작성해서 다시 보내라고"


실제로 목격했던 일화다. 타사 기자들이 즐비한 기자실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톤, 그였다. 기자실에 타사 기자들이 있건 말건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기사 쓸 줄 모르냐

보도자료를 처리해서 올려놓으면 어김없이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걸쭉한 문장들이 쏟아졌고, 난 바짝 얼어붙었다. 짜증과 엄포가 뒤섞인 단어들의 조합이 내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그 덕에 난 바짝 긴장하게 됐고, 글쓰기 내공을 높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한 글쓰기였다. 핸드폰 화면에 그의 이름이 뜨는 것조차 공포였을 정도였다.


조금씩 글쓰기 실력이 향상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기사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기사 속 논리적 비약과 글의 잘못된 문맥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니 그가 고쳐놓은 내 기사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 단순히 글의 구성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사실과 다른 이야기로 재구성하며 자극적이기만 하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대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한 번은 고쳐진 기사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내용 자체가 복잡하긴 했는데, 기계적으로 고쳐놓은 탓에 제목과 내용이 달랐을 뿐 아니라, 내용 안에서도 단어들이 뒤죽박죽이었다. 취재한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이 돼 있었다.


이런 식의 기사를 내보내게 되면 결국 욕을 먹는 것은 나였다. 내 바이라인이 들어간 기사여서다. 난 고민을 거듭하다 꼼수를 썼다. 그가 고쳐놓은 기사를 다시 내가 처음에 올려놨던 기사로 교체했다. 그리고 부장한테 직접 보고했다. 기사를 봐달라고.

협업 모르냐?

그는 내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내가 단독 기사를 발굴해 보고한 날이면 어김없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 


"너 왜 이렇게 욕심이 많냐? 협업 몰라 협업!!!"


그는 소리쳤다. 나를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다음 날 송고된 기사에는 자신의 바이라인이 함께 들어가 있었다.


난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하이에나 같다'고 생각했다. 후배가 발굴해 낸 단독 기사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모습을 보며...


보통 공동 바이라인은 기사를 기획하거나 취재하면서 협업했을 때 넣는다. 그리고 기사를 기획했거나 주도한 이의 바이라인이 앞에 들어간다. 보조한 기자의 이름은 뒤에 들어간다. 


그런데... 송고된 기사의 바이라인 속 이름에는... 

늘 그의 이름이 앞에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한 것도 없었음에도 말이다...

측은한 마음...

사실 그와 함께 일하는 동안, 난 그의 '단독' 기사를 본 적이 없다. 


기자의 유형은 두 가지가 있다. 취재 잘하고 기사 잘 쓰는 기자, 기사는 못 쓰지만 광고 수주를 잘해오는 기자. 그는 후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후배들로부터 기자로 인정받지 못한 그... 


'어쩌면 후배의 단독 기사 바이라인을 뺏어서라도 자신이 기자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을 아닐까'라고...

악연일까? 귀인일까?

늘 그때를 생각하면 혼란스럽다. 그는 내게 참 악독했다. 


그런데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그를 만난 덕택에 내 인생이 180도로 확 바뀌었다.


그를 보며 '저런 기자는 되지 말아야지'라고 늘 다짐했다. 마음속에 새겼다. 


또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10년 후에 내 모습이 저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현실과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 큰 꿈을 꾸고자 했다.


그로부터 기사 못 쓴다고 걸쭉한 말들을 들었을 때는 정말 죽고 싶을 정도였다. '난 도저히 안 되는 인간인가'라고 수없이 자책하기도 했다.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러다 오기가 생겼고, 난 그 오기를 발판삼아 짓밟힐수록 더 강해지는 법을 터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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