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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Feb 25. 2017

지하철에서 만난 노인

"현장이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게 무너지는 거라고"

모처럼 따뜻한 날 오후

우리 가족은 지하철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난 지하철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들이 아빠를 쏙 빼닮았네"


내 옆자리에 앉으신 어르신이 내게 말을 건넸다. 전 역까지만 해도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계셨는데, 나랑 눈을 마주친 다음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셨다. 


짧은 흰 머리에 노란 겨울 점퍼를 입고 있었다. 내 아버지 정도 나잇대로 보였다.


"네 고맙습니다"

내가 건설 쪽에서 일을 했었는데...

나의 대답을 들으신 어르신은 내게 자신의 젊었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요즘 젊은이들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애석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말이다. 


"내가 중동 건설현장에서 ㄱ건설에 소속돼 일했었거든. 그런데 말이야. ㄴ건설와는 너무 비교됐었지."


어르신은 잠시 추억에 잠기시는 듯 나지막하게 추임새를 내뱉으셨다. "너무 달랐지. 그렇고말고"


다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속했던 ㄱ건설사는 한국에서 직원들이 왔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 먼 길을 왔으면 밥이라도 좀 제대로 챙겨줘야 하는데... 전혀 신경을 안 쓰더라고. 그러니 일을 제대로 하기나 하겠어?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망치를 들고만 있지 일을 하지 않는 거야. 사기가 바닥인 거지. 건물이 제대로 올라갈 수가 없지."


"사람들이 망치를 들고만 있는 다니까. 일을 안 해요". 어르신은 애석한 듯 이 문장을 몇 차례 되풀이하셨다.


"그런데 말이야. ㄴ건설은 너무 달랐어. 그때 ㄴ건설 사장이 와서 현장 직원들의 식사를 직접 챙겼다니까. ㄴ건설 직원들은 정말 잘 먹었지. 매일 고기를 먹었을 정도니까 말이야. 그러니 직원들이 어땠겠어. 현장 직원들이 정말 열심히 일했다니까"


어르신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래야 한다는 소신을 내게 강하게 피력하시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현장에서 고생하는 이들의 고충을 모르면 안 돼. 현장이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게 무너지는 거라고"


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순간... 지하철에서 이 어르신이 생판 처음 보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우연이 아닐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무언가 이 말씀 안에서 인생의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는 마음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난 눈을 지그시 감고, 어르신의 말씀에 집중했다. 어르신의 말씀 속에서 내가 되새겨야 할 교훈을 찾으려 애썼다.

이제 내려야지!

아내의 말에 눈을 떴다. 벌써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어르신의 말씀을 더 듣고 싶었다. 진심으로.


"어 나도 여기서 내려야 해. 벌써 다 왔구먼"


어르신도 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들을 안고 내릴 준비를 하고 나니 이미 어르신의 모습은 지하철 승강장 근처에서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홀린 것처럼 멍해졌다. 아들을 안고 환승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가슴 속에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현장이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게 무너지는 거야"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던 이야기였지만, 이날 내겐 굉장히 심오하게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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