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존 Mar 26. 2024

유럽의 엘리트는 어떻게 교육받았을까? (5)

한국의 엘리트교육과 오늘

 지난 네편의 이야기를 통하여 유럽의 엘리트교육의 역사를 아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대학교육까지 폭넓게 대중에게 문이 열리며 엘리트교육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로 중고등학교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고등교육 예비과정으로서의 엘리트교육이 이야기의 주제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유럽의 엘리트교육의 특징을 몇가지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전인교육으로서 지, 덕, 체를 함께 함양하는 것을 추구함


 토마스 아놀드의 럭비교 개혁을 통하여 영국의 퍼블릭스쿨은 지식 위주 교육으로 발생한 방종과 일탈을 끝내고 진정한 "잉글리시 젠틀맨"의 산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강한 훈육과 체육은 특히 귀족 및 상류층의 자제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쥬와 스포츠맨십을 불어넣었습니다. 지덕체의 세가지 덕을 함께 다스리는 것은 인류 최초의 대학인 아카데미아의 설립자, 플라톤의 교육사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인간에게 세가지 영혼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욕망, 기개, 이성으로서 욕망에 의해 주도되는 인간유형, 기개에 의해 주도되는 유형, 이성에 의해 주도되는 각각의 유형의 인간이 어우러져 사는 "국가"에 대해 깊은 성찰과 실천을 했죠. 


 즉 유럽의 엘리트교육에 있어서 지덕체의 전인교육은 현실에서 돈을 벌어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각적 완성을 이룰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플라톤의 교육론에 따라, 이성이 욕망과 기개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 이성이 최상의 덕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인교육론에 따르면 이성의 덕을 실현한 철학자가 욕망과 기개에서 벗어난 초월적 세계로부터 다시 현실로 내려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의무입니다. 


 플라톤이 이성의 추구와 현실에서의 실현을 가장 고통스러운 의무라고 못을 박아놓았으니, 그 교육론을 실현하는 엘리트학교의 학생들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충성스러운 국가의 동량으로서 엘리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될 수 있었죠.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등 오로지 양피지 말고는 미디어라고는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고통스러운 학습의 과정을 견뎌냈습니다. 그 고행에 가까운 학습의 과정이, 지덕체의 전인교육을 실현하는, 동시에 이성을 체득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고, 그 통과의례를 거쳐 사회의 지도층으로 받아들여졌으니까요. 


2. 그렇다면 고전어와 고전교양 학습은 어떤 학생을 키웠는가?


 전인교육, 철인의 완성, 엘리트 사회지도자 양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 차원에서의 교육의 목표일 따름입니다. 실제로 고전어 교육은 학생들을 어떤 인간으로 키웠을까요? 먼저 학생들에겐 탁월한 롤모델들이 있었습니다. 엘리트학교의 교장은 각지의 영주들, 귀족들, 상류층을 아우르는 방대한 네트워크를 가진 그 자신이 뛰어난 명망가였으며 학교의 모든 행정사무를 결정하는 드높은 권위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교사들은 학교의 선배들이기도 하면서 뛰어난 학식을 갖추고 있었죠. 자신의 가정, 부모들 역시 엘리트교육을 마친 사회지도층에, 중앙 관리, 지역의 유력자들 다수가 엘리트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창하게 고전어를 구사하며 학술과 종교적 논담을 나누곤했죠. 아이들에겐 이러한 분위기에서 엘리트교육의 고행을 자신의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내려온 문헌들과 성경을 해독하기 위해 사용되던, 그러나 당대의 유럽 각국의 언어와는 완전히 달랐던 사어인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는 그러므로 "사회지도층이 되기 위한 필수교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만, 그것으로 끝일까요? 고전어와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고전교육의 내용은 심도있는 인문학이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국가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선과 악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작용하는가? 등등, 2000년 이상 수 없이 많은 지식인들이 쌓아올린 학문체계에, 고전어를 통해 직접적으로 접속하며 이 질문들에 도전하는 과정을 배웠죠. 


 그래서 가혹한 암기식 교육인 엘리트교육은 동시에 매우 크고 핵심적인 인간의 탐구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이기도 했습니다. 유전법칙을 밝힌 멘델이 사제였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본인의 출신배경과 특성이 있었겠지만, 19세기 유럽에서 신학교는 고전어 중심의 엘리트교육기관이었습니다. 지독한 암기식 교육인 고전어 교육이 멘델의 유전법칙을 탄생시킨 밑바탕이 된 것이죠. 


 엘리트교육은 끝없는 질문을 탐구하는 습관을 내재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중등 고전어학교를 거쳐 케임브릿지에 입학한 뉴턴을 필두로, 이러한 탐구정신을 가진 지식인들이 당대 가장 체계적인 엘리트교육 제도를 갖춘 영국에서 속속 키워지면서,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한 축이 되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겠죠. 사회지도층은 동시에 엘리트교육을 이수한 학문과 탐구의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권력과 혈통 뿐만 아니라 철학과 인문학적 교양,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이 바로 사회지도층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3. 그리고 지식체계는 Bildung과 Ausbildung으로 대별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문학 교양인 bildung이 인간의 오성을 함양하기 위한 길이었다면, 주되게 기술지식과 관련된 ausbildung은 순수지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두가지 지식체계의 차이점을 안다면 고집스럽게 엘리트학교가 고전교양을 학생들에게 강제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기존에 형성된 지식체계에 접근하는 것은 학습자의 자율성을 잠식하게 됩니다. 학생들은 답이 없는 문제에 끝없이 도전하는 태도보다는, 이미 누군가가 확정한,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따로 검증을 해보지 않으면 정말로 알 수는 없는 해답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이른바 "지식의 최전선"에서 끝없이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것이 지식엘리트의 본령이었던 것이고, 고전어교육을 받는 고행은 완전히 스스로 하나의 자율적인 학습자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학습자들은 고전어를 암기하는 한편, 고전어를 통해 축적된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직접 접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차근차근 탐구해나갔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숙제가 플라톤에게, 플라톤의 숙제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계승되는 것을 보며 하나의 질문이 몇세대를 지나며 어떻게 다른 해답으로 도출되어가는지도 바라보았죠. 


 즉, bildung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불변의 지식에 접근하는 것이었고, ausbildung은 한정적이고 단편적인, 동시에 학습자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지식으로 엘리트들에겐 인식되었습니다. 이 점이 특별하게 한국 교육에 시사점이 크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한국 교육은 절대로 학습자 스스로 답을 탐구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이미 답이 정해진 지식을 암기하는 것으로 12년을 지속하죠. 자율성과 창의성을 박탈하고 타율성만을 주입하는 ausbildung이 한국 교육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육에 엘리트 학교는 존재하는가?

 

 단호히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교육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나 독일의 아비투어와 같은 논술형의 깊이 있는 평가제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등교육기관이라는 것이 말그대로 지식을 전문적으로 탐구하여 새로운 학문지식을 창출하는 것인데, 그 대학이 사실상 지위상승의 매개체로 전유되는 가운데 평가는 획일적인 선택형 평가로 일관되고 있죠. 안타깝게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부세력이 교육철학 없이 대학별로 유지되던 입학시험을 일제고사로 바꾸어놓은 탓이 큽니다. 19년 간 집권하는 내내 박정희 정권은 교육을 통제의 용이함 관점에서 접근했죠. 그 시기에 실현되어야 했던 교육의 보편성과 수월성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 숙제를 2000년대에 몰아서 해결하는 중입니다.


 교육이 국가제도에 의해 왜곡되는 현상은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에서 가장 경계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평가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역할을 자본주의 산업체계로부터 위임받아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산업체는 교육을 통해 물신주의적 가치를 내재화한 노동자를 채용할 권리를 행사하며,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합니다. 해방 후 교육제도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교육전통이 확립될 수 있었던 시기에 군부독재와 자본주의에 의해 교육이 한 없이 침탈되어 왔으니, 엘리트교육이란 것이 가능할 수 없었죠. 민사고나 하나고처럼 탁월한 수준의 명문학교는 있으나 과연 이들 학교의 교육이 엘리트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미국 유학을 위한 SAT와 수능에 종속된 교육과정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들 학교의 교육이 지덕체를 아우르는 높은 수준의 고등교육 선행과정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지식의 본질과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한국엔 엘리트교육의 전통이 생생히 살아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국회의원들입니다. 90년대 기록영상을 보면 국회의원들이 청산유수로 사자성어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교 교육의 전통이 한학의 형태로 해방 전 세대들로부터 해방 후 성장한 손주 세대에게 전달되었고, 그 사람들이 90년대까진 국가지도층을 형성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 세대가 후손들에게 한학을 전달하지는 못했고, 이제 사회지도층 중 동양의 엘리트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교 교양을 갖춘 인재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아야할듯합니다. 지금까지 서구의 엘리트교육이 해 온 역할을 살폈을 때, 우리 교육에서 전통적인 엘리트교육이 사라졌다는 점은 곧 사회지도층의 인간성 실현에 상당히 우려할만한 공백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겠습니다.


 한국교육의 엘리트 부재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사라진 것을 사라진 것으로 둘까요?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엘리트 교육은 없지만 교육을 통해 선발된 엘리트는 존재하기 때문이죠. 각 영역의 최고 전문가가 지식정보 중심의 산업가치를 창출하고 있고 미디어와 시장 통합으로 미래엔 엘리트 교육의 부가가치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선진국일수록 더욱 그렇고, 당연히 미국이라고 엘리트 교육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영국에선 비록 고전교육의 지위가 대단히 하락해 있지만 엘리트교육의 형태는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하나 하나의 아이를 위해서도 우리 교육체제가 결여하고 있는 엘리트교육의 성격을 되살릴 부분은 되살려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는 몰라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그 자체가 서양의 역사에서는 대학을 위해 차차 정립된 교육기관이기도 합니다. 대학을 목표로 중등교육이 이뤄진다면, 중등교육이 원래 갖고 있는 엘리트교육의 성격을 우리나라에서도, 어느정도는 갖추어놔야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육 문제의 해답을 과거에서 구하는 데에 한계는 있지만, 인간의 본질이 과거와 달라진 것이 아닌 이상(진화 관점에서 한 2천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죠.) 엘리트교육이란, 그 2500년간 지속적으로 다듬어지고 개선되고 검증된 절차이기도 할 수 있겠죠. 꼭 고전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진 않더라도 말입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그러므로, 유럽의 엘리트교육의 역사를 일별하며 이러한 특성들을 학교와 가정에서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은 필요합니다. 아동의 자율성과 탐구의식, 스스로 질문하는 습관을 내재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말은 쉽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시겠죠. 


 간단한 요령이 있습니다. ausbildung을 경계하고 bildung을 추구하는 태도를 양육자가 내면화해야 합니다. 정해진 답을 찾는 문제풀이식 교육, 기존의 학습체계를 충실히 답습해서 고득점을 올리는 교육은 ausbildung입니다. 아동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타율성만을 기릅니다. 필요하죠. 그러나 경계해야 합니다.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적절히 그로부터 아동을 보호해야 합니다. 


 반대로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는 습관을 아이와 함께 공유하셔야 합니다. 아이는 성장단계에서 끝없이 "왜"라고 묻죠. 성인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식체계가 이미 굳어져있고,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충분히 그에 대해 검증해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뒤집어보죠.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이에 대한 확고한 자신의 철학이 세워져 있으실까요? 그렇지 못하다면, 추구해야 할 bildung의 과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50이 되고 70이 되어도 평생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으니 기쁜 일이죠. 자녀, 학생과 함께 평생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트교육의 방법을 따라 아이에게 학교교육과 다른 자신의 지식체계를 형성하도록 하는 것엔, 매우 중대한 이익이 있습니다. 바로 자존감이란 것이죠. 어린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정체성이 확고해지는 사춘기 때부터 아이는 폭넓은 인식과 확고한 주관을 갖게 됩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역사, 철학을 한자와 함께 공부해 온 아이들일 것이거든요. 그런 아이들이 잠시 학교교육에서 뒤쳐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이 갖지 못한 자신만의 철학은 학력경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존감의 토대가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단계까지 함께 아이와 bildung을 추구해왔을 학부모로서도, 아이를 자연스럽게 그런 관점에서 대하게 되겠지요. 


 그 아이가 더 먼 장래에 어떤 성인이 될지는 여러가지 복잡한 요소가 작용할 것입니다만 다행한 것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그 길을 헤쳐나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율성과 자주적 리더십이 바로 엘리트적 소양이기도 하고, 미래사회의 핵심 역량이기도 하니까요.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는 그렇게 완성에 다가서게 됩니다. 

이전 28화 유럽의 엘리트는 어떻게 교육받았을까? (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