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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25. 2024

유럽의 엘리트는 어떻게 교육받았을까? (4)

Bildung과 Ausbildung

1. 독일철학과 독일교육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인 독일의 교육체제에는,


"빌둥(Bildung) = 교양, culture"


 이란 것이 있습니다. 


 철학과 교육이 개인의 태도에 녹아들어 인격적,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갈고닦는 독일적 전통이자 독일의 핵심 교육철학, 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교육의 목적은 인간의 성숙이죠. 그러므로...독일의 교육철학, 거기에서 bildung이 규정하는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더 큰 사회속에서 정신(mind), 마음(heart)을 조화시켜 총체적인 자기다움(selfhood)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또 정의하는 점을 함께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


 일반적으로 "서양교육사"를 다룬다고 할 때 영국과 프랑스, 독일 세 나라를 중심으로 접근을 하는 모양입니다. 가장 유럽에서도 강대국이었고 인접하며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죠. 사회민주주의적인 특성을 띄는 북유럽의 교육의 경우 20세기 이전의 역사는 크게 주목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중부유럽의 세 나라 중, 독일은 영국과 결정적으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게르만 민족이 중심이 된 국가로 통일국가를 이루기 전까지 안정되지 못한 역사가 길고, 일찌감치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며 최초의 "국민학교"의 이념을 독일 지역 내에서 폈기 때문이지요. 그로 인하여 실존주의적인 철학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도, 교육에 있어서는 유럽에서는 가장 선구적으로 보편교육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일 교육의 특성인 실존주의 철학과 보편교육. 이게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죠. 왜냐면 보편교육은 "집단"을 중시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속에서 실존주의는 "개인"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사상이니까요. 독일의 가장 위대한 지성 중 하나로 불리는 헤겔은 "개인의 성장은 "당연한 것"으로부터의 처절한 소외로 자신을 재구성하여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bildung, 다시 말하여 독일정신은 중세시대의 집단적 인간관에서 개인을 규정, 사유와 단련을 통해 인간 성숙을 도모케 한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죠. 


 독일의 학생들은 방과 후에 일찍 과제를 끝내고 스포츠를 하며, 숲속에서 자연 속에서 즐기는 놀이 등을 통해서 공동체 감각을 익히고, 자연의 원리 등을 경험을 통한 배움을 중시합니다. 가정교육에 있어서도 자립심과 개인의 인성과 감성 중시하는 편이라고 하네요. 


 bildung만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냐.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독일의 교육체계에 대하여서는, "훈련을 통한 습득은 독일어 Erziehung(교육과정), Ausbildung(사회화/직업교육)에 드러나있는 것이며 Bildung은 개인이 삶 뿐만 아니라 영적, 정서적 감성을 고양시키는 과정이고 지속적인 확장과 성장을 위해 획득하는 개인적 사회적 기술"이라고, 독일의 교육가 훔볼트는 밝히고 있습니다. 

 

 즉, 교육과정과 사회화/직업교육은 개인의 인간적 실현을 위한 것이 아닌, 의식주를 영위하고 사회화하기 위한, 바깥으로부터의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한 인간의 참된 인간적 가치를 싹틔워내는 것이 bildung이라고 할 수 있죠. 


2. bildung과 훔볼트 교육개혁

"교양(bildung), 진리, 도덕은 인간 정신의 어디에나 있어야 한다. 그 정신은 개개인을 위대하고 존엄한 존재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들이 스스로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은 세상이 전하는 수많은 것과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것들을 흡수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개인은 자기 감성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내야 하며 가진 모든 에너지를 이용해 흡수한 것들을 다시 반죽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자기 본성과 자연 사이의 충돌과 화학반응을 만들어 내야 한다."


 훔볼트는 독일교육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므로 그에 대해서 조금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동상의 인물, 독일의 교육가 훔볼트입니다. 19세기 초 독일의 프로이센 왕국이 암흑기를 겪고 있던 와중에 교육제도의 책임자로 선임이 된 인물. 그는 프랑스 혁명의 원대한 이상이 유혈 사태로 점철된 과정을 목도하고 존엄한 삶의 보장과 사회적 진보는 혁명으로 불가능하며, 오로지 보편교육만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교육을 "보편적 인간 교육(혹은 전인교육)”과 “실무 직업교육”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각각  Bildung과 Ausbildung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죠. 


 유럽의 엘리트가 으레 그렇듯이 훔볼트의 교육사상은 그리스로부터 거슬로 올라갑니다. 자, 훔볼트에게 있어서 교육의 최우선 과제는 보편교육을 통한 bildung의 실현, 그런데 어떻게? 실존주의적 관점을 되살려, "개인이", "제각각", "고유하고", "개별적인", bildung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학교 교실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난해한 미션이죠. 얘들을 데리고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진이 빠지는데 심지어 모두 하나 하나 제각각 전인교육을 하라고? 


 그런데 훔볼트는 그것을 추구하고 실천하고자 한 사람입니다. 훔볼트가 보기에 인간을 인간 자체로, "개인"으로 이해한 최초의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었으며, 처음으로 인간을 미적·정치적·도덕적 가치의 중심에 놓고 사유한 것이 그리스 문화였습니다. 그 밖의 다른 문화? 신앙이나 종족이 그런 가치의 중심이었죠.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인간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태도를 자연스레 습득하였으며 파이데이아, 즉 ‘교양’을 갖춘 것을 이러한 ‘인간다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훔볼트는 이렇게 말하죠. 


"모든 학문은 정치적·사회적 강요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고독과 자유" 상태에서 펼쳐진다. 자유이야말로 교육의 첫 번째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사회 규범과 문화를 따르고 수행하게 하는 교육과정Erziehung과 사회화/직업교육Ausbildung은 ‘부자유스러운것’이다. 또한 비판능력은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교육 과정에서의 본질적인 목적이다. 교육의 본질이 자아형성Selbstbildung이라면 비판능력은 언제나 자기비판 능력, 비판적 자아인식과 함께 한다. 아울러 인간교육의 마지막 목적은 언제나 Humanität, 즉 올바른 인간성의 함양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야말로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고 연결하며 세상과 시대와의 논쟁을 통해 성찰하는 정신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잠깐. 교육과정과 사회화/직업교육이..."부자유스러운 것"이라구요?


3. Bildung과 Ausbildung


 교육과정Erziehung부터 이야기해봅시다. 다시, 독일교육은 개인의 개별적이고 고유한 인간적 실현을 추구하기 때문에, 경직된 기준이 전국민에게 강제되는 교육과정이 부자유스럽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죠? 그런데 사회화/직업교육Ausbildung이 부자유로울 이유는 무엇일까요? 


 궁금해서 번역기를 돌려보았습니다. 답은 의외로 쉽게 찾아집니다. ausbildung = out of bildung이라고 독일어:영어 번역 결과가 나오네요. ausbildung. 사회화 및 직업교육. 그것은 bildung을 벗어난 것.


 다시 훔볼트로 돌아갑시다. 훔볼트는 Bildung의 핵심적·실천적 의미를 자유와 휴머니즘에 기초한 인격 형성으로 보았고, 이를 제도권 교육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제도권 교육에서 이런 교육적 가치를 담보하는 것은 바로 국가지요. 


 그렇기에 교육이 “국가와 사회의 광범위한 혁신을 위한 토대”라면, 국가의 최고 목표는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위한 시민의 자유로움”이고...국가는 개인의 교육을 가로막거나 간섭해서도 안 되며, 자유를 가장 우선적이며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이, 훔볼트에겐 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훔볼트는 독일 프로이센 제국의 교육책임자였고, 그가 짧은 임기를 마친 뒤에 후임자들 역시 훔볼트의 교육개혁을 사수하기 위하여 피와 땀을 흘려 분투합니다. 덕분에 그의 교육사상이 19세기 이래로 독일에 뿌리내리게 됩니다. 19세기 초부터 Bildung은 개인의 자유, 소양과 재능의 계발, 공동체 번영의 지향, 창조성과 합리성, 미래에 대한 낙관, 소유에 대한 열정, 사적인 영역으로서의 가정, 문학, 음악, 조형예술의 자율성 등을 포괄하는 굉장히 폭넓은 개념으로 대중에게 인식되고, 독일 시민계급은 특별히 “교양 시민계급 Bildungsbürgertum”이라 일컬어집니다. 


 교양 시민계급. 훔볼트의 교육개혁으로 육성된 독일의 신시대 지성인들은 "개별성과 고유성"을 토대로 자신들이 이룬 성취와 독립적 교육을 토대로 영향력을 확장하여 취약한 경제적 토대와 정치권력을 교양이라는 자산으로 ‘보상’받으려고 했으며, 고전적 교양 이념을 체화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고전어,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물론이고 실제로 고도의 인문학적 지식과 지성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그 사례를 보여드리자면, 


⃝무엇이 로마인을 세계사적으로 의의있는 민족으로 만들었는가

⃝역사에서의 남구 세 반도의 의의

⃝유럽의 자연적 형상이 어느 정도 유럽 주민의 발전을 촉진했는가


 이것이 19세기 독일의 일반학교 졸업시험 논제들이었습니다. 꽤 고민되는 문제들이죠?


 이러한 훔볼트와 독일의 교육체제에서 ausbildung은 말 그대로 out of bildung한 것이었죠. 왜일까요? 물론 아동을 양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까마귀도 새끼가 제 힘으로 날개짓을 할 때까진 둥지에서 키우죠. 길거리의 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동의 개념이 불분명했던 19세기의 관점에서 양육은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루터의 종교개혁부터 해서 아동을 학교에 보내기는 했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bildung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유럽에서든 조선에서든 중학교가 없었던 시기에 초등교육을 마친 아동은 무엇을 하나요? 귀족들만 빼고는 노동에 나섭니다. 바로 그때부터 비로소 한 개인의 ausbildung이 시작되는 것이죠. 청소년기에 아동은 세상으로 나가 공방에서 10년, 20년을 도제생활을 하며 세상을 배우고 직업인으로서 소양을 기릅니다. 


 직업교육, 구두를 만들고 사람을 치료하고 선박을 건조해서 식민지를 만들고 하는 일들에 전인적 실현의 가치가 있을까요? 물론 이것은 현대적 관점에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긴 합니다. 장인정신으로 한 평생 김밥을 만들거나 이불을 고쳐준다거나 하는 명공을 만나기도 하고, 구글과 같은 IT전문기업이 메가트렌드를 이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그런 일들은 왜 하나요? 의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사람을 살린다는 가치만을 위하여 공부할까요 의사가 되었을 때 누릴 수 있는 고수익과 사회적 신망을 위하여 공부를 할까요? 물론 선한 가치만을 위하여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수익과 사회적 신망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부정되진 않습니다. 과연 의사, 판검사, IT전문가가 되기 위해 하는 공부란, 자유로우면서도 고독한 것일까요?


 아니면, out of bildung. 전인적 실현을 벗어난 역량이고, 그를 위한 공부 과정일까요?


 으으음. 질문을 조금 더 바꿔볼까요? 아직은 기술혁신이 일어나지 않아 의사는 여전히 신망받는 직업이지만, 기술혁신이 배가되고 인구가 줄어들 50년, 100년 뒤에도 과연 의사, 판검사 기타 등등등 현재 촉망받는 직업이 미래에도 그 영향력이 유지될까요?


4. 엘리트와 교양Bildung


 독일의 bildung과 ausbildung의 대비는 현대인에게 "어떤 공부가 참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꽤나 설득력 있는 단서를 던져줍니다. 그리고 유럽의 엘리트들의 교육에 대한 관점도 실제로 이와 유사했습니다. 엘리트학교가 그 교육적 효과를 인정받고, 산업화로 인해 자본을 축적한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더더더 엘리트학교가 증가하며, 그러한 중산층의 소득은 상업이나 공업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에도 근대 엘리트학교가 오로지 고전어와 역사, 철학 등 인문학을 강조했던 현상들 이면엔, 엘리트를 위한 교과목으로 bildung이 적합하며 ausbildung은 단호하게 거부하는 공통된 인식이 자리합니다. 

  2편에서 보았던 럭비교의 교과목입니다. 기술 따위 전혀 없죠. 나중에 귀족층까지 식민지 경영에 뛰어들 시대가 될 때 지도를 그리는 법이나 지도를 해석하는 법, 산술 등의 과목이 "쬐끔" 추가가 되긴 합니다만, 여전히 20세기에도 실용지식을 전하는 실과과목은 "전혀" 중시되지 않았습니다. 아주 고집스럽게 2500년 전 고대 문헌을 매끄럽게 읽는데 힘썼죠. 


 왜 교양 교과목은 중시하고 실과 과목은 천시하였는가? 이런 아이러니는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발견되죠. 사농공상. 실학을 억압하고 유학만 중시하던 조선의 모습은, 조선이 무능한 사대부의 나라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당대의 강대국, 선진국들은 당연히 엘리트교육을 중시했고 그에 따라 인문학을 강조했을 따름입니다. 다시,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영국에서부터 조선까지, 고대부터 현대까지, 변하지 않고, 해결되지도 않은 질문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국가공동체는 어떻게 구성되고 운용되는가?" 이런 질문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는 아니다라는 괴테의 말을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어 자유로우며, 속박 상태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라는 실러의 말과 대비하라 ⃝그리스의 여러 민족과 여러 도시에서는 그 분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내셔널한 통일의 의식을 생생하게 유지했는가, 이런 질문들. 이런 질문들을 던지도록 하는 것이 bildung을 추구하는 교육, 인문학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2016년 터진 알파고 쇼크 이후 우후죽순 늘어난 코딩수업, 프로그래밍 수업에 대해서 교사로서는 굉장히 갑갑한 심정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일찌감치 컴퓨터공학에 대해 이해를 얻어서 일찍 자격증도 따로 그에 맞춰 생기부도 꾸미고 그래서 학종으로 대학 가고, 짬짬히 앱도 개발하고. 다 좋지요. 그러나 지금도 코딩을 할 인력은 대한민국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코딩을 못해서 프로그래머가 실업자가 되는 것도 아니구요. 잡스는 아니더라도 네이버 만큼의 혁신이라도 이끌어낼 인재, 싸이월드 같은 메가트렌드를 이끌어낼 역량이 엘리트교육, 혹은 엘리트교육을 지향하는 커리큘럼엔 갖추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학생이 어느정도 성숙하고 나서 직업교육은 받아도 됩니다. 의대는 예과 끝내고 본과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의학을 배우는데 왜 프로그래밍을 초딩에게 가르치나요?


 근대의 엘리트교육은 끊임없이 인간의 본질과 삶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해결이 되었나? 안됐죠. 플라톤 선생님과 공자 선생님도 못하신 걸 미천한 후학이 어떻게 그 답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끝없이,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 엘리트교육의 목표였습니다. 딱딱한 고전어 수업도 모두 그것을 "스스로" "고독하게" "자유롭게" 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죠. 


 이런 질문들이 해결이 되었다면 기꺼이 유럽의 귀족들도 상업과 공업을 배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제 그러고 있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과거의 이성과 합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사회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게 되자 각지의 엘리트교육도 형태를 변화시켜가고 있습니다. 영국에선 귀족들이 TV와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편에선 아주 많은 전문가들이 여전히 같은 질문에 도전하고 그 해답을 찾으려합니다. 올바른 인간의 삶에 대하여. 운좋게 포스트모너니즘과 기술혁신 덕분에 이쪽 분야의 학문도 조금 신세가 나아진 편이긴 하죠. 지식정보산업으로 인문학의 쓰임새가 확장되었으니까요. 


 자 그럼 어떻게 해야할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죠. 5편에서 한국에 엘리트교육은 어떠하였는가와 현대의 엘리트교육의 전망에 대해 다루며 이번 꼭지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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