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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27. 2024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1)

지식과 경험, 둘을 아우르는 것, 그리고 지식의 구조와 교과

예전에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K : 안 자는 것 같으니 질문. as if 직유일 때 주절의 시제가 과거라도 as if 뒤에는 현재시제 오면 되는 거임? 이건 시제일치를 시키나?


나 : 일치 같은데?


K : 근데 봐바. as if 뒤에 과거 시제가 오면 가정법 과거가 되어서 주절과 같은 시제의 반대 가정이잖아? 직설일 때는 그냥 시제일치라면 He talks as if he were rich는 "부자가 아닌데도 부자인 것처럼 말한다." 실제로 부자일 수도 있고 부자인 것처럼 말한다. 이 두가지가 해석이 가능하다는 거잖아. 이상하지 않아?


나 : 난 애초에 그래서 가정법에서는 시제일치가 아니라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따라 달린 거다. 어차피 이리 가정하나 저리 가정하나...말하는 사람 마음이니까. I will hug him if he appears. I would hug him if he appears. if절이 가정이 아닌 조건절인데도 주절 시제가 가정법 과거도 되고 일반시제 현재도 되고. 이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설명함. 그래서 나는 아직 진도 안나갔는데, 저 부분도 전하고자 하는 상황을 보라고 말할 거임.


K : 두번째 문장 틀린거 아니냐 너.


나 : 교과서에 있는 문장임. 2학년 진로영어


M : 엄밀히 말하면 가정법은 주절 시제보다 한단계 전 꺼 쓰는 거잖아. He talks as if he were rich는 이상한 것 같고,  He talks as if he was rich라는 직유,  He talks as if he had been rich는 가정 이렇지 않을까?


(2분 뒤)


M : ㅋㅋㅋㅋ grammarly에선 세 문장 다 오류 없는 거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ttps://forum.wordreference.com/threads/he-talks-as-if-he-is-was-were-had-been-rich.3692342




 영어 교사 셋이 모여서 한밤중에 떠들어댄, 병신스러운 상황으로 보실 수도 있겠지만 이 대화를 관찰하면 굉장히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할 때, 무엇을 "가르칠 것"으로 간주할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가정법은 중, 고등학생들에겐 상당히 난해한 문법 중에 하나입니다. 시제 처럼 고정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견해나 감정에 기반한 임의성을 띈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If 주어 과거시제(wer)/대과거시제(had p.p)...주어 would/should/could/might + 원형/have p.p 라는, 형태적으로도 굉장히 복잡할 뿐더러 현재가 과거로 표현되고, 과거가 대과거로 표현되고, 그런 "가정"과 "조건", "가정적 비유"와 "직유"를 가르는 것은, 그때 그때 상당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가정법을 가르침에 있어서 대화에서 드러난 K와 M의 입장은 전통적인 영어교사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정확한 문법적 지식에 기반한 교과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맞고, 저 문자은 틀리다 하는 확고한 기준을 학생에게 제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대화에 제시된 여러 문장의 "맞고 틀림"을 지속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저의 입장은 상대주의, 구성주의, 경험주의라는 교육사조에 입각한 영어교사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학습자들이 영어 표현을 접하고 그로부터 문법지식을 경험적으로 추론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그로 인해 다양한 문법의 예외적 현상까지 "맞을 수 있다"라는 기본 전제를 학생들과 공유합니다. 


 따라서 저의 경우 이 문장도 되고 저 문장도 된다고 스스로도 인식하고, 학생들에게도 가르칩니다. 실제로, 야밤의 세 교사의 대화는 "다 된다"는 결론으로 끝났습니다.


 어느쪽이 더 좋은 교사일까요? 당연히, 정답은 없습니다. 우리의 대화 자체가 교육의 오랜 논제의 하나거든요. 학생들에게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교육계의 일반적인 대세적 주장입니다. "스푸트니크 쇼크"라 불리는, 냉전기의 기술지식산업 경쟁에서 미국이 완패한 뒤 지식중심의 교육과정은 그 영향력과 효과를 끊임없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식 중심의 교육이 없이는 현대의 과학기술은 그 진보의 속도가 확연히 저하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중심교육과정은 끊임없이 "틀린 지식"을 추적해 평가하여 배제하려는 기본적인 관습을 갖고 있습니다. M과 K가 즉각 어떤 문장을 틀린 문장으로 인식하는 것은, 실제 영어에서 그것이 통용되든 통용되지 않든, 영어학이라는 학문체계에서 정립된 문법규정과 일치하는지 여부가 실제로 매우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사라는 증거지요. 잘못된 지식을 전달해선 안된다는 확고한 교육 철학을 내재화하고 있는 증거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교육철학은 학생들에게 지식산업에 종속된 사회질서를 내재화하는 경향을 강화합니다. 아이들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라는 교사들의 수업 방식에 녹아든 그 지식중심의 철학을 내면화하여 도덕적 가치관에 그를 반영합니다.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 그렇게 학습자들의 지식관과 사회관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한 틀에 갇히게 됩니다.


 문법에 대한 저의 입장을 포함하고 있는 경험 중심의 교육관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학습자들이 우선 다양한 교육경험을 갖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문법을 정확히 한다고 해서, 그것을 실제로 활용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물리학 지식을 풍성히 습득했다고 하여, 그 아이가 물리학자가 될까요?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학습자가 실제로 무언가를 "하고"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풍성한 경험을 학습의 과정에서 가져야 합니다. 때론 물리학 지식을 배우는 것보다 직접 진자의 운동을 관측해보거나, 자동차에서 가속도와 관성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실제로 물리학자의 직무, 즉 "탐구"를 학습자에게 내재화할 수 있지요. 지식중심의 가치관 말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또 이런 경험중심의 교육관은 학력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합니다. 성실함과 겸손보다는 허용적 환경에서 싹튼 방종과 오만이 책으로부터는 멀리, 몸을 쓰는 일엔 가깝도록 만들죠. he was도 되고 he were도 되고 he had been도 돼.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끝낸다면, 그 학습자는 실제로 그 세 문장을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영어를 꾸준히 학습하고 사용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셋을 구분할 수 있게 될 때가 오겠지만, 그렇게 알아서 문법 지식의 부족을 메워나가도록 방임한다면 교육은 대체 뭘 한다는 걸까요? 그냥 많이 들려주고, 다~ 실제로 쓰이는 영어표현들이니까 알아서 써보고, 시험에서 어떤 문장이 오답인지를 채점을 통해서 알아낸 다음, 그 속에 담긴 표현의 차이를 이제 스스로 알아내볼까? 하는 것은, 전혀 교육적이지 못한 처사지요.


 그러니 우리는 지식과 경험 사이에서 아이를 교육하는 딜레마에 대하여, 제법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게 됩니다. 지식을 경험으로, 학습을 탐구로, 추론을 확증으로 전이하고 융합시키며,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부모와 학습자에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문법으로 돌아와, 영어에서 문법은 "지식의 구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식의 구조라는 것은 어떤 학문체계의 핵심 고갱이를 뜻하는데, 쉽게 말하면 교과서의 목차처럼 학습진도에 따라 차근차근 무엇을 배우게 될지를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지식중심 교육과 경험중심 교육의 중간다리로 "지식의 구조"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대화를 보시듯이, 각기 다른 유형의 두 교사집단이 저마다의 교육철학에 기반하여 교과내용에 대해 논의한 끝에, 지식의 구조인 영문법을 확인하고 있죠. 당연히 경험중심 교육관을 지닌 교사라 해도, 지식의 구조에 기반하여 수업을 구성합니다. 지식중심의 교사가 경험을 도외시하지도 않죠. 각기,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 정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나 여기까지는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의 입장이고…학습자 아동의 입장은 훨씬 복잡합니다.


 학습을 하든, 경험을 하든, 아이들이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시 물리학 수업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리학 수업을 들으며 아이들은 지식의 구조에 따라 많은 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물리학적 지식의 습득이 물리학의 근본 원리를 이해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질량과 밀도, 열의 전도와 비등 등, 실제로 발생하는 물리학적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크게 다르죠. 어느쪽이 더 중요한 배움이냐? 하면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답이 나옵니다. 다만, "어려운 문제다."라는 점에는 합의가 됩니다. 근데 또, 이게 끝도 아닙니다. 물리학을 배웠듯, 이해했든, 실제로 물리학자가 되려면은 "스스로" "탐구하는" 능력/역량/자질을 갖추어야 하니까요. 


 이 단계에서 학부모, 학생의 고민은 더욱 커집니다. 지식을 중심으로 하든, 경험을 중심으로 하든, 학습의 결과로 습득된 지식과 이해의 일면들을, 개인의 어떤 요소로 만들 것인가? 그것은 지식일까 역량일까. 스스로 탐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할까, 많은 지식을 토대로 다른 분야와 융합을 하고, 새로운 지식을 생성할까, 창의적인 역량을 발휘할까, 아니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온 힘을 다할까. 


 그리하여, 학부모게서 아셔야 할 부분은, 아이들의 배움은 실제로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그 속에는 지식과 경험이라는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 지식과 이해와 탐구라는 서로 다른 아주 다층적인 면모가 있다는 점입니다. 마침, 최근 대한민국의 교육적 조류는 이러한 지식중심의 교육 및 평가제도와, 경험 중심의 교실환경형성이라는 두 축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불편한 동거를 지속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열심히 저요 저요 손을 들다가, 지식 중심의 수업과 평가체제에 이내 자발성을 뚝 떨어트리고 말죠. 고등학생 때 쯤 되면 영포 수포 대포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그것을 막자고 학습자 중심의 교실수업을 아무리 한들, 아이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평가체제의 비민주성이 자신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러니, 이 어려운 질문을, 일단 한시라도 떼어놓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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