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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24. 2024

유럽의 엘리트는 어떻게 교육받았을까? (3)

(3) 플라톤의 비극

 서구 문명의 뿌리는 그리스와 로마입니다. 그들의 앞선 지식과 문명이 강한 국력을 탄생시켜 주변국가를 복속시키고 언어와 정신까지 통합했습니다. 그리고 강대한 로마제국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들이 만들어낸 고도의 사회제도와 문화는 유럽 곳곳으로, 창칼이 아닌 문자와 성경의 형태로 확산되었습니다. 첨단문명의 위력 앞에 여러 민족의 습속과 전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죠.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엘리트에게 있어 두가지 고전어, 즉 고대그리스어와 라틴어를 학습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선 로마 시대 이후로 거의 모든 지식은 라틴어로 통합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중세에는 카톨릭이 이성과 철학까지 포괄하고 있었는데, 성경도, 그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신학 공부도 모두 라틴어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동양에서 한자로 지식과 문헌이 관리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요.


 단지 "고전어 능력"만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문제가 복잡하지는 않겠죠. 사회상이 단순하던 시기이고 창의력 따위보다는 암기력이 지식으로 인정받았던 때니까요. 당연히도 고전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언어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 이래로 고전어로 쓰여진 주요한 문헌들을 스스로 독해하고, 그 내용을 이해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그것을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엘리트 지식인의 요건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살핀다면 앞서 이야기한 근대 유럽 엘리트 학교에서 고전어 교육이 그리 강조되었던 이유도 쉽게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중세 이후 유럽에서의 고등학교란 대학의 예비과정으로서만 존재했고, 대학에서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은 모두 빠짐없이 라틴어로만 쓰여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이작 뉴턴이라는 과학사 최고의 천재의 연구를 집대성한 책, <프린키피아> 역시 당연히 라틴어로 쓰여있었죠. 17세기 이래로 수학과 과학을 배운다는 것은 곧 뉴턴을 배운다는 것인데, 당시 기준으로 그런 첨단과학을 배우기 위하여 2천년이나 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 하죠. 그러나 뉴턴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라틴어를 지식인의 언어로 사용한 것도,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지식을 탐구하기 위하여 고전어를 배우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역사적 과정도 혁명의 시대인 18세기를 지나면 여러가지 비판을 받게 되죠. 그 시초는 좀 더 일찍, 의외의 사건으로 발생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루터가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하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라틴어의 장벽에 가로막히지 않고 누구나가 종교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했고, 그러면 글을 알아야 하겠죠? 민중학교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문자교육을 합니다.


 자, 그럼, 당연히 대학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즉, 고전어인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할 필요 없이 그 문헌들을 현대어로 번역을 해서 대학에서나 고등학교에서나 가르치면 굉장한 학습부담 경감 효과가 있을 텐데- 굳이 수학도나 과학도가 동양의 사서삼경과 비슷한 고전서적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논쟁이 엘리트학교에서도 있었어야 당연합니다.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선 지난 이야기에서 조금 다루었죠. 반대로 엘리트 귀족층이 아닌 일반 농민들의 입장에서도 이런 고전어의 지식접근권 통제는 큰 문제였습니다. 성경도 라틴어를 교육받은 카톨릭 사제들만이 독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부패한 카톨릭 권력의 전횡을 오랫동안 알 수 없었죠. 까막눈인 평민들이 각 영지에 속박되어 영주가 발하는 포고문을 통해서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조금 알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문제가 실제 국운을 좌우하는 일까지 있었답니다. 독일 프로이센 제국의 프레드리히 대제, 우리에게는 감자대왕으로 조금 친숙한 인물입니다만 제국의 통일전쟁 와중에 병사들이 문맹이 많아 군사 지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고, 그래서 중요한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맛보는 일이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의무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전국민의 문자 해독(당연히 고전어가 아니라 독일어)을 위해 노력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면, 또 당연히 "맞네. 고전어가 중요하긴 하지만 어차피 고전어를 공부하는 게 고등교육을 위한 것이니, 고등교육 교재 및 내용을 이왕이면 현대어로 바꾸어 가르쳤어도 되겠네."라는 생각도 들기 마련이죠. 그런데 왜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플라톤의 두 비극

 최초의 대학이라고 여겨지는 아카데미아에 대한 위의 삽화에서 하늘을 가르키고 있는 인물, 이데아론의 플라톤으로 유명하죠. 그런데 그리스로마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그이지만 삶 자체는 상당히 비극적이었습니다. 그리스 폴리스들의 쇠락을 불러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태어나, 성장해서는 부정으로 얼룩진 아테네 민주정의 파탄을 목격했죠. 20대에 8년간 모신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중들과 민주정에 의해 사형을 당하는 비극을 맛보고 그는 정치철학을 더욱 발전시켜 지중해 각국을 돌아다니며 철인정치의 꿈을 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고 결국 모국으로 돌아와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쓰지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공자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공자와 사상적 생애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은데, 공자 사망 약 50년 뒤에 플라톤이 태어났으므로 동서양의 각 영역에서 비슷한 시기, 비슷한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죠.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의 철인정치와 이데아 사상은 그 배경을 모르면 오해받기 쉽고, 실제로 많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두번째 비극이죠. 살아서도 그의 정치적 이상을 펼치지 못했는데 사망 뒤에도 그의 사상을 오독한 후대인들에 의해 그의 교육론은 오랫동안 왜곡되어 실천됩니다. 영혼의 세 영역이 있어서 이성과 용기 욕망이 있고, 철학자는 이성, 용기는 군인, 욕망은 평민의 주도적 영혼이며, 이들 중 철인들이 가장 이성이 발달한 집단이니 철학자들이 정치를 담당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은 민주정에 반하는 귀족주의적 발상으로 이해되기 쉬우며, 평민에게는 욕구의 통제를 위한 규범의 강제와 복종의 미덕이 합리화되었죠.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근대 이래로 무수히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진리가 갖고 있는 획일적인 폭력에 굴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 중심의 새로운 철학을 폈습니다.


 그 덕분에, 플라톤의 철학 자체가 당대의 그리스 시대상에서 비판적인 사상운동이었다는 점은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생소한 문제가 되었죠.


 플라톤의 시대는 민주정의 쇠락과 동시에 물질주의가 팽배한 시대였다고 합니다. 신 중심의 가치 중심 사회에서 물질 중심 사회로 옮아갔다는 것은 돈을 주고 표를 사는 매표행위가 횡행하고, 소피스트와 같은 상대주의가 판을 치며 인간의 탐욕과 악덕을 가로막을 규범이 부재한 사회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플라톤은 그러한 시대에 맞서 공자의 정명사상과 유사한 주장을 펴기 시작합니다. 군군신신부부자자. 각자가 자신에게 걸맞는 덕을 실현하는 것이 우선 사회의 혼란상을 막는 방편이 될 것이라 생각했죠. 그의 정치철학을 보여주는 주요 저서인 <국가>는 소피스트들과의 끝없는 논쟁으로 당대의 상대주의를 반박하고, 정명에 따른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글라우콘이라는 소피스트가 등장해서 재미난 논변을 폅니다. 투명의 권능을 가진 반지를 끼운다면 외부에서 ‘나’를 규명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라도 타락하고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 글라우콘의 전형적인 소피스트적인 논리인데요, 이에 대해 플라톤은 손쉽게 국가의 존재를 들어 타락이라는 글라우콘의 논의를 봉쇄합니다. 반지를 끼고 행하는 개인의 도덕문제보다는 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거시적인 국가의 정의가 훨씬 논의하기 쉬울 것이니, 개인이 속한 국가의 정의를 먼저 논하자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농부와 의사, 수공업자와 상인으로 차근히 국가성원을 논하는 소크라테스는 군인을 국가를 수호하는 핵심계급으로 제시하고, 군인계급이 갖추어야 할 육체의 강건함과, 용기가 폭력으로 흐르지 않을 이성의 중요성에 대하여 의논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보듯, 플라톤은 정치적으로는 비판적인 주장을 펴는 소수파였으며, 소피스트들의 비판에 맞서 진보적인 주장을 펴는 인물이었습니다. <국가>의 첫번째 논쟁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자이니, 곧 권력자는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옳다고 여기게 되니, 이익이 정의다.’라는 소피스트의 주장에 맞서서 '그렇다면 강한 자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어떤이가 권력자 중에서도 최고위의 국가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죠. 이 질문에 대한 답변도 꽤나 재미있습니다. '권력자가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옳고 그름을 결정할 수 있는데, 불의한 지도자는 아는 것과 무관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 알지 못하므로 정의를 행할 수 없으며, 정의로운 지도자는 자신을 온전히 알고 그에 맞는 실천을 하기 때문에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입장인데, 슬슬 말이 꼬이죠. 어려운 이야기는 이정도로만 줄이겠습니다. 다음 한가지 <국가> 속 발언을 보고 오늘의 주제를 이야기하도록 하죠.


『국가 안에는 소질이 각기 다른 세 개의 종족이 있어 각자가 제 각기의 일을 할 때 올바르다고 여겨지며, 또한 그들 종족의 뭔가 독특한 마음 가짐 여하에 따라서 절제를 가릴 줄 안다느니, 용기 있다느니 지혜가 있다느니 등으로 여겨왔지? (중략) 따라서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랑하는 나의 친구여.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속에 그것과 똑 같은 종족이 있어서 국가 안에서의 세 종족과 마찬가지 상태로 있는 것이 같은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이 당연하겠지?』


 이 말의 의미는 플라톤이 국가, 다시 말하여 인간의 사회공동체의 속성이 바로 인간의 영혼을 그대로 옮아놓은 공간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세가지 덕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 집단이 스스로를 다스리듯, 한 개인의 내면 역시도 세 덕을, 영혼의 세 부분을 다스리며 함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플라톤의 사상적 특성입니다. 개인과 국가의 합일을 먼저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개인과 국가 양쪽 모두의 덕을 실현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안하는 통합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죠.


 플라톤은 귀족정의 지지자가 아니라 정명사상에 따라 개개인의 덕을 함양하여 사회의 조화를 이룸과 함께, 자신의 내면의 세 덕을 다스림으로써 인간의 실현을 도모한 진보주의자였습니다. 모두에게 이성, 용기, 욕구가 있으므로 평민이라도 이성의 인도에 따라 철학자가 될 수 있고, 철학자에게도 용기와 욕구가 있어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죠. 실제로 이 <국가>에서 그는 "영혼의 합일"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세 계급의 통합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실제로, <국가>에서 공동육아 등 공산주의 뺨치는 아이디어도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교육론이 현실에서 실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플라톤이 맞서 싸우고자 했던 현실의 모순이 역사의 전개과정을 통하여 해소되기보다는 악화되어왔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으로 인간이 신과 대화할 권리를 부르짖으며 직접 학교를 설립하여 귀족이 아닌 일반 아동에게 문자 교육을 시작하고 나서야 교육이 ‘인간’의 주요관심사가 되었죠. 루터 이전까지는 철학은 신학의 도구라는 인식 하에 오로지 신학자와 귀족들만이 과정으로서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개인이 학교를 설립하여 신학을 가르치는 사례는 다수 있었으나 카톨릭이 면죄부를 통해 드러낸 타락상과 마찬가지로 영리 목적의 사교육기관으로 오로지 귀족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절대주의가 중세 유럽인들에게 이성을 상징하는 성직자, 기개를 상징하는 왕족과 귀족, 욕망을 상징하는 시민에 대한 분리된 인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인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는 절제의 미덕만을 가르치는 것이 ‘정의’라고 인식되었죠. 따라서 초등의무보편교육이 실현되는 19세기까지 학교는 철저히 시민을 분리하였고, 예비성직자와 귀족들만이 다니는 전근대 학교에서 교육은 오로지 고전희랍어와 라틴어를 통하여 이성만을 함양하는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학교 밖의 직업교육은 그리스 교양을 습득함으로써만 가능한 이성의 함양과는 다른, 교육이라고 부를 수 없는 성격으로 중세유럽인들은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선 다음 이야기 때 다루게 됩니다만, 현실적으로 농촌은 무학의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그 농민을 계몽해야 할 정치적 이유도 경제적 이유도 없었습니다. 16세기가 시작되기까지 유럽 사회는 의무교육(계급 차별 없는 보편교육) 제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전근대 사회의 귀족학교가 단지 엘리트를 모아 선발효과만을 누린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영혼의 삼분론에 따라 투철한 이성교육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엘리트학교의 생활과 수업은 매우 혹독한 것이었고 퍼블릭스쿨에서 자주 발생한 학내 소요 역시 이런 억압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귀족 자제들의 일탈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학내소요가 빈발해 지역사회의 문제로 거론될만큼 학생들을 고통스럽게 한 고전어교육은 그러나 당대의 귀족 및 지성인 집단에겐 유일한 인간화, 계몽, 이성 획득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고전어와 엘리트교육

 한번 이야기를 해보죠. 정의란 무엇일까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국가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엘리트적인 질문입니다. 실용적이지 않죠. 그러나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누구라도 이 답을 추구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건 소수일 뿐입니다. 구두장이가 할까요? 어부가 할까요? 물론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푼 뒤에, 플라톤처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렇게 묻는다면 또 다른 결론이 도출됩니다.


 즉 중세의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정치학, 신학과 철학 등 기초 인문교양 학문은 그 자체가 범인이 접하기도 어렵고, 답을 얻어내는 것도 한없이 어렵고, 그 답을 얻어낸다한들 그것의 실천은 더더더더욱 어렵고 고통스러운 고행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또 엘리트교육을 통해 배출된 귀족들이 사회에서 그 덕을 실천하고 산 것도 아니지만, 개중엔 엘리트교육을 통해 양성된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가 있어서 문명을 몇백년은 앞당긴 사례도 있죠. 엘리트교육의 이상이 현실의 귀족주의를 합리화할 수는 없고, 그래서 프랑스대혁명 같은 역사적 사실도 발발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식인들의 관점에서 인문교양의 추구란 긴 고행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면, 고전어를 배워야 할까요 아니었을까요? 고전어를 안다는 것은 고대그리스어와 라틴어를 통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 다양한 문인들의 저작을 타인의 도움 없이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최소한 그것이 학문의 완성은 되지 못하더라도, 학문의 상징 징표로는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전어 능력이 없다면 어디까지나 타인이 번역한 자료들만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학습된 고등교육은 결국 학생들의 의존성향을 없애지 못합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은 중세인들의 관점에서도 그릇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테고, 결정적으로 철인답지도 않은 태도입니다. 고통스럽더라도, 해야하는 일이었죠.


 질문의 답이 나왔습니다. 엘리트가 되길 원하는 자, 고전어를 통해 스스로 진리의 문을 열어야 한다. 고통스러운 학문의 과정은 그러나 그 뒤에 열려있는 더더욱 고통스러운 학문과 실천의 길로 열릴 것이니. 이쯤이면, 플라톤의 철인정치도 귀족정을 합리화하는 입장이 아니라 국가지도자라면 스스로 이성을 갈고닦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노력해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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