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도 배불리 먹이고 글감도 하나 적립해버리다니 완전 럭키비키잖아.
탁구공보다 조금 큰 미니사과를 솜씨좋게 깎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건 글로 써도 되겠다. 멀쩡한 과도도 아니고 식기 나이프의 끄트머리에 살며시 톱처럼 날이 서 있는 부분으로 제법 매끈하게 이걸 잘라놨으니. 아빠의, 귀감이 될만하지아니한가.
아내는 조식 디저트로 미니 사과를 두개 가져왔다. 그런데 동백이가 와앙하고 자기 주먹보다도 작은 그걸 딱 쥐더니, 열성적으로 깨물더니 이내, 토토 작은 소리를 내며 사과껍질을 뱉어내는 것이다.
“아빠가 깎아줄게 깎아줄게.“
나는 서둘러 나이프를 작았다. 쉽지않다. 이건 소시민적 묘기에 가깝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엄마든 아빠든 하지 않을 일이다. 글쎄 우리 엄마라면 아마도 재밌다고 먼저 나서서 슬슬 하셨겠지만.
“자-.”
내가 재빠르게 사과를 깎는 사이에 동백이는 서너번 더 껍질을 뱉어내던 차다. 그리고 아빠가 깎아준 사과를 크게 깨물어먹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사과 정도에 세상 진지한 이 표정은 뭐람.
누구나 그렇듯 아이가 태어나기 전과 지금의 나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 이전에는 타인에게 그럴듯한 애처가 정도로 비쳤다면 아이가 태어난 뒤엔 체력과 건강에 제한사항이 있으신 주제에 하고픈 건 세상 누구 못지 않게 많으신 아내와 이 왈가닥 딸네미를 위해 매일 매일 한계치까지 날 몰아가며 사는 좀 딱한 존재로 주변에 비치는 처지다. 물론, 그 중 절반 이상은 오히려 대학원 3년차에 접어든 내 개인 문제가 더 크지만.
그러다보니 하루하루 ”나는 그렇게 못한다.“ 라거나 ”딱하다.“라는 소릴 듣는 일이 생긴다. 내 발목 부상은 결정타를 날린 사건인데 실제로 나는 지금까지 굉장히 무리를 하고 있다. 발목처럼 후유증이 남기 쉬운 부위를 다쳐놓고는 다치던 그날만큼 그대로 몸을 혹사하고 있는 중이다.
발목의 사고는 한편으로는 아이를 둔 어버이로서 나도 한 순간에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고작 3미터 남짓 길이의 워터슬라이드를 내려가다 발목이 부러졌으니 세상 무슨 일도 생길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말이지. 건강에 대해선 나름 자신하고 살았지만 사고는 한순간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쨌든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
“자아-.”
나는 뭉툭한 식기로 매끈하게 사과껍질을 깎아냈고 동백이는, 씨와 꼭지만 남기고 사과를 다 먹었다. 훈장처럼 접시 위에 아빠와 딸 각자의 흔적이 올라왔다.
“다 먹었네! 맛있어?”
“응 사과 맛있어-.”
“어어. 어휴.“
“오빠 칼 뺏어 안돼.”
“…아냐 괜찮아.”
그러더니 이번엔 아빠 손에서 나이프와 사과를 한꺼번에 뺏어간다. 그리고 자기가 깎아보겠다는듯이 사과를 열심히 찌르고 베어낸다. 아마도 아이의 팔 힘으론 나이프로 자기의 살을 벨 일은 없겠지.
마침내, 동백이는 나이프를 탁 내려놓고 사과를 깨물어먹는다. 나는 그것을 보며 겨우 숨을 돌린다. 제법 많이 커서 오늘 아침은 대강 혼자 많이도 먹었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고작 세 돌도 되지 않은 아기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곤 한다. 아이의 성장발달이라는 신기를 앞에 두고 고작 미니사과를 깎는 것이 묘기라니 언어도단이란 생각도 든다만은.
우리의 동행은 끝까지 잘 이어질까. 나는 마지막까지 아이에게, 지금처럼 최고의 아빠가 되어줄 수 있을까. 뭐 살아봐야 알 일이다만 글쎄 또 어떤 날은, 아빠는 아이가 뱉어내는 사과 껍질을 보고 나이프를 들 때가 있다.
탁구공만한 사과를 깎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생각보다 많은 우리의 미래가 달렸을지 모른다고, 이제 거의 다 붙어가는 내 경골은 조용히 내 안에서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