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피아가 울고 갈 고급진 밤맛.
낡은 시골의 상설시라는 것이 늘 그렇다. 오는 길부터가 휑하니 아린 마음이 들고, 시장 주변의 늙어가는 건물들의 때깔만 보아도, 아. 이곳에서 나는 잠시 머물다 갈 뿐이군. 복작복작하던 장터의 옛 모습은 상인들의 나이테만큼이나 먼 기억의 모습일 터. 공주 시내에서 예산 방향으로 40여분. 그러니까, 충청도의 심심유곡이다. 마곡사에 들르는 김에, 올라가는 길에 저녁거리로 닭강정을 사려던 길이다. 밤이 들어간다나. 그래서 왔는데, 일요일 점심을 조금 빗겨서 왔더니 작디 작은 장터가 한산하기만 하다.
안내판 슥 둘러보고 휑한 시장을 몇걸음 걷는다. 시장 끝에서 끝까지가 불과 100미터도 안되어보인다. 관광객들이 오가는 위치도 아니니 오죽하겠나. 나와 아내가 마곡사에 온 게, 그러니까 임신하기 전 해였던가. 그땐 단풍도 제법 물이 들고 해서, 마곡사는 꽤 재밌게 구경하고 돌아갔다. 그때도 이리 저리 임신 고민도 있고 하던 때라, 언젠가 이 풍경에서 아이와 함께, 이 자리에 아이의 사진을. 이라는 생각도 해보기도 했었는데. 오늘 와보니 단풍은 멀었고 날씨는 흐린 것이 비 예보다. 그래서 원래 가려던 마곡사는 패스하고 괜스레 닭강정만 사러 왔다. 그런데, 괜히 닭강정 하나 먹겠다고 씁쓸~
"야 내가 먼저 한다!"
읭?
"아 내가 먼저 한다고."
"넌 맨날 죽잖아 내가 한번 하고-."
.....어....그러니까...애들이네?
"어구- 집에 가 이제?"
"네에- 근데 엄마 아직 안왔어요."
"어어 안왔어-?"
...시장 할아버지랑 인사까지 착하...게...
...어...그러니까...유구...읍이...
음...
음...
음...
음...
나는 걸으며, 지도 앱을 살폈다. 보자. 공주시 유구읍. 시골, 시골은 시골인데...초등학교가 두개. 중학교 하나. 마이스터고 하나. 어...초등학교가...두개. 음. 엄.
내가 시장 뒤 주차장에 차를 댔으니, 이쪽이 입구일 텐데, 야 깔끔하고 멋들어진 카페다. 여기에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젊은 손님들이 섞여있다. 그-러니까, 내, 착각이었구나. 한적한 시장 뒷골목을 보고서는. 쓸쓸한 정취에 혼자. 사실은 작다란 읍내에 학교만 네개가 있는, 나름 이 근처, 중심지인데. 그런데 그게 참 요상하다. 진짜로 위로도 산. 아래로도 산. 이쪽도 산 저쪽도 산인 좁디 좁은 고장에 고속도로 IC가 하나 붙어있다.
그런데 여기에. 심지어, 사람이 산다. 아이들이 뛰어논다. 초등학교가 둘. 흠흠.
그리고, 아주 맛이 좋다는 닭강정 집이 하나.
닭집이라시더니 공주 특산물 밤을 살려 밤을 올린 닭강정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가게 입구에 그렇게 밤이 몇포대나 쌓여있고, 장사 중 짬깜이 밤을 깐 흔적이 보인다. 이거 밤 깍는게 사람 잡는 일인데 기계라도 쓰지 않으시고. 하기사. 기계로 깎으면 제대로 속껍질이 깎이지 않으니 그것도 골치다. 밤 무더기 위로는 여름에 많이 나갈법한 황기 등의 한약재와, 삼계탕에 잘 어울릴 국수 하나. 예산이 가까우니 거기서 국수도 좀 얻어다 오시려나.
공주 유구읍의 시장닭집.
이것저것 방송 출연 경력이 붙어있는, 전형적인 관광지풍의 입구 옆에선 남자 사장님께서 열심히 닭을 튀기는 중이시다. 닭 색이 꽤나 밝다. 그리고 가마솥을 이렇게 꺼내서 기름 때깔을 보여주시니 이거...매력적이야. 공주산성시장에 있는 닭강정집도 이렇게 밖에 놓고 닭을 튀기시는데, 이게 좀 오래된 닭가게들이 이런 식이긴 하다. 앞에 닭을 늘어놓고, 그 옆에 튀김기를 놓고 팔던 식.
이렇게 시장에 와서 닭강정을 먹는 것은, 그 옛날의 시장통닭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공주가 특히 그렇다. 그래 그래 자고로 시장 통닭은 튀김기가 가게 앞에 내어져 있어야지.
"저- 네이버로 주문한 거요-."
"네에. 잠시만요."
가게 안으로 슥 들어가서 여자 사장님 두분께 말을 건다. 뜻밖에도 조리해서 김을 빼고 있는 닭강정이 너댓박스나 있나. 핫플이라고 할만하구나.
"20분 정도면 바로 저희가 주문이 밀릴 땐 준비 되는 시간은 아닌데, 중간에 빼놓기도 해요."
장사 경력을 알만하다. 우리가 딱 20분 전에 앱으로 주문을 했는데, 주문을 받아서 가져가는 시간들을 가늠하시곤 딱 맞게 우리 걸 다른 주문 사이에 빼놓으셨다. 그 덕분에 오자마자 그 즉시 따끈따끈한 닭강정을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밤은 오늘 안에 다 드셔야 해요. 그게 익혀진 거라 계속 진액이 나와요. 닭은 냉장보관하시는 게 더 맛있구요."
"오...저 한번 열어볼게요."
"사진은 여기 지금 식히고 있는거 찍으심 되는데."
"어, 어어...먹...어보려고..."
"아하. 네에."
이야...
우와...
와우...
밤 보소. 밤닭강정이다. 이쑤시개를 청할까 하다가 두 분 사장님이 바쁘시기에, 나는 그냥 살살 밤 한톨 먼저, 그리고 닭강정을 같이 먹었다.
오...
조용히 닭튀김과 어우러진 밤의 그윽한 풍미를 맛보는데 사장님이 웃으며 물티슈를 집어주신다. 장사 천재...
이건 맛있다. 야 이 가을에 꼭 먹어볼 맛이다. 잘 익혀진 달달한 밤이, 짜지 않고 맵지 않고 달지 않은 참으로 품격있는 닭강정과 결합되어서, 내가 먹어본 닭강정 중 여기가 최고다. 속초의 북청 닭강정의 그 강렬한 맛과 비교해봐도 전혀 다른 스타일이면서도, 양도 아쉽지 않다. 아니, 이 밤이! 닭강정이랑! 같이 먹으면 그냥! 와!
"감사합니다 사장님-."
"네에 또 오세요-."
마침 공주는, 대전 사람인 나에겐 마음의 거리가 한없이 가까운 곳인지라. 어릴 때야 대전 사람들은 동학사 정도까지만 오가긴 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공주 오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네 시간이 지나서 대전도 공주도 커졌고, 오가는 길도 커진데다가 각자의 매력을 품은 여행지가 되어 있다. 특히 여기 공주는 이번에 아내의 주도로 오게 된 곳인데, 단풍 즐기기 좋은 고장이라, 가을에 딱 어울리는 이런 맛난 음식이 마곡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고향을 두고온 사람으로서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에 공주에 왔으니, 아마도 단풍을 마곡사에서 볼 것 같진 않지만 누구에게라도 알리고 싶은 곳이다. 공주. 가을. 단풍. 맛집. 그것은 밤과 함께 먹는 닭강정. 달고달고달고단 그런 맛이 아니라 풍미는 강하고 맛은 부드럽다. 이 부드러운 맛이 밤의 식감, 맛, 달콤함과 어우러져, 야 이거 소주랑 먹기 좋겠다.
시장닭집 옆에는 인산닭집이라고- 이웃에 유명세에 가려진 집이 있는데, 저긴 인삼 뿌리를 좀 올려주시려나. 저기도 사장님께서 밖에 나와서 열심히 닭을 튀기는 중이시다. 궁금한데.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다는 생각만 뒤로 하고, 닭강정을 맛보여주러 아내에게.
아까 꼬맹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할아버지의 가게에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만 밤 한바구니를 샀다. 아내에게는 보늬밤조림을 할까 얘기를 해뒀다. 바쁜데. 언제 하지. 일단은 내일 아침을 위해서 쌀을 씻으면서, 나는 밤을 하나 까서 대강 쪼개 함께 밥을 앉혔다. 내일 아침은 밤밥. 공주산, 맛난 가을 밤.
그리고 우리는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로 이 훌륭한 밤닭강정을 먹었다. 차게 식어도 닭강정의 풍미와 튀김옷의 바삭함이 좋아 매우 맛있다. 밤은 조금 딱딱해져있었는데, 이 또한 좋을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