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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자녀 애착과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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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공부를 왜 해야 할까?”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질문에 답을 해본다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는 대학이 떠오르시죠. 한국인이라면 모두 같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직업, 재산, 아파트 등등의 키워드가 줄줄이 따라옵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현실적 조건들이죠. 그래서 우리는 굉장히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초등학교, 유치원, 혹은 그보다 앞선 시기부터 아이의 교육을 계획하고 차근 차근 교육기관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비슷한 목표를 공유하며 높은 성적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를 잃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줄로 줄을 세워 일부는 올리고, 일부는 탈락시키는 경쟁 구조에서는 반드시 소외되는 아이들이 나오기 때문이죠. 좌절의 경험을 몇 번 갖게 되면 아이들은 공부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아이들도 많지만, 그런 아이들을 줄 세우기 위해 공연히 어려운 문제가 나오고, 그런 불합리한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 아이들은 잘 시간, 놀 시간을 줄입니다. 아이들의 자발적인 배움은 스르르 밀려나게 되지요. 성적 경쟁에 말입니다.


마침 이럴 때 아이가 머리가 굵어서 반항할 시기가 되면서 아이와 우리의 관계는 크게 한번 출렁 합니다. 그 전에 초등학생 때쯤 아이와 지지고 볶으며 관계의 변화를 경험했는데, 두 번째 이 파도는 꽤나 버겁습니다.

이렇게 몇 번의 파도와 함께 아이의 정체성이 부모님과 분리가 되고 나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아이와 관계가 너무 멀어졌구나. 돌이키기 어렵다.” 그때부터 고민은 더욱 깊어집니다. 대학과 취업, 그리고 생존이라는 현실의 과제는 굉장히 명쾌한 공부의 제 1 목표이지만, 그로 인해서 아이와 공부의 관계, 우리와 아이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한번 이 물결에 휩쓸리며 아이의 성적이 하락하는 것을 경험하면 우리는 발을 동동 구르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우리가 이미 실천하고 있고, 10년도 넘게 지속해 온 방법입니다. 이렇게 한번 질문을 던져보지요.


“이거 다, 우리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애착과 학습


우리는 아이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지금 아이에게 거는 기대, 교육을 향한 투자 역시 모두 아이를 위한 것이죠. 몸과 마음이 모두 바쁘고 시간과 녹이 말 그대로 녹아내리는 일이지만, 우리는 아이를 위한 일이기에 기꺼이 감내합니다. 이것이 마땅한 부모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과연, 아이가 다를까요? 아이는 원래 엄마와 아빠를 정말 좋아합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엄마 아빠가 박수를 쳐주면 수 십 바퀴 돌면서 춤을 추기도 하고, 높은 단상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요. 그렇게 가정에서의 첫 걸음마, 유치원에서의 첫 상장, 학교에서의 첫 번째 시험지를 통해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아이 스스로도 보람을 느끼지요.


우리가 아이에게 보내는 사랑, 아이가 우리에게 보내는 사랑. 부모와 자녀 사이의 애정 관계를 흔히 애착이라고 부릅니다. 수많은 연구가 부모님과의 애착 관계가 아이들의 공부 지속에 아주 강력한 연관관계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독립된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가운데 여전히 부모님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성적이 좋더라는 것이죠.


당연히 이 애착이 잘 형성된 아이들이 사고를 치는 일도 적고 반항기를 무난히 넘어가게 됩니다. 마음속에 부모님과 나누는 애정이라는 든든한 무게추가 있으니 또래문화나 사춘기의 거센 파도에 흔들리는 일이 덜한 것이죠.


우리 또한 한결 편한 분위기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아이와 옥신각신 다툴 일도 없고, 예측 밖의 돌발행동도 적게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육아와 양육의 품이 줄어듭니다. 알아서 크는 아이들이죠. 알아서 공부를 할 것이고 말입니다.


문제는 애착을 지속하며 아이들을 이 혹독한 학습 경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부모님과의 애착 관계 속에서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는 나잇대에는 세상은 말 그대로 총천연색의 놀이동산과 같습니다. 뭐든 재밌고 말랑말랑하고 보드랍죠. 그런데 그런 행복한 시기를 몇 년 보내게 되면 아이들의 세상은 어느 시점에서 굉장히 딱딱하고 무채색의 불편한 물체들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딸이 있는 가정에선 친구 관계가 툭, 튀어나와 정서를 어지럽히고 아들이 있는 가정에선 체육 활동 문제로 옥신각신하며 애착 관계가 흔들립니다. 부모님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들, 애착 관계를 어지럽히는 문제들이 차츰 늘어나죠. 그런 상황에서 성적이라는 결과물이 늘 우리를 쫓아오죠.


가정 형편이 넉넉하고 아이의 성적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지 않은 일부의 가정을 제외하면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문제를 경험합니다. 아이와의 애착 속에서 아주 풍족한 배움을 함께 해 왔는데 아이의 성장이라는 기쁨 속에, 애착은 깨어지고 배움은 멀어지는 일 말입니다.


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자녀가 아직 어리다면 지금의 애착관계 속에서 학습에의 동기를 불어넣는 길, 자녀가 충분히 나이를 먹었다면 아이의 정서를 보듬어주며 학습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배움이다 – 효도와 입신양명


조선은 흔히 “성리학 국가”라고 말합니다. 그 성리학이란, 공자에 의해서 제창된 초창기 유학에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 결합된 새로운 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리학의 탄생 이전에는 그런 세상의 이치보다는 개인의 몸가짐,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 등이 유교의 기본 관심이었습니다. 성리학에서 “성”이란 글자를 성품으로 이해하면 대강 맞습니다. 성리학에서 “리”라는 글자는 우주 만물의 이치에 해당하죠. 학창 시절을 잠시 떠올려보자면 주리론, 주기론 같은 용어가 있었지요? 그런 부분이 세상의 이치를 다루는 성리학의 한 영역이었습니다.


이렇게 개인의 품성와 우주 만물의 이치를 통합하는 학문으로서의 성리학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은 철저하게 성리학의 원리에 맞추어 인재를 교육하고, 등용하고, 나라를 경영했습니다. 과거 시험 역시 당연히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였지요.


자, 간단한 3단 논법으로 조선의 인재 교육의 원칙을 정리해보겠습니다.


① 성리학의 원칙에 따르자면, 우주만물의 이치와 개인의 품성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② 그러므로 국가경영을 위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선 품성을 잘 닦아야 한다.

③ 우주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 한 사람의 도덕과 지능이 별개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발달한다.


어렵지 않지요? 이 삼단 논법을 간단히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성어입니다. 지금 정리한 3단 논법이 함께 담겨있으니 전체 내용을 한번 살펴볼만합니다.


만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선후 관계를 알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칠 수 있다.

자고로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하고

그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하고

그 집안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지신의 수양을 해야 하고

자기지신의 수양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로 해야 하고

그 마음을 바로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해야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식에 힘써야 하고

지식에 힘쓰고자 하는 것은 만물의 이치를 철저히 연구함에 있다.

만물의 이치를 철저히 연구한 이후에 지식이 지극히 되고

지식이 지극히 된 이후에 뜻이 성실히 되고

뜻이 성실히 된 이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며

마음이 바르게 된 이후에 자신의 몸이 수양이 된다 - 수신

자신이 수양된 이후에 집안이 잘 다스려지고 - 제가

백가(百家)를 정돈한 이후에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 - 치국

나라가 잘 다스려진 이후에 천하가 평화롭게 된다. - 평천하


첫 문장에서 성리학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그 순서를 잘 알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칠 수 있다. 그리고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려면 그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먼저 마쳐야 하는데, 그 순서를 따르다 보면 가장 먼저 마음을 잘 다스려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이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성어가 담긴 대학大學이라는 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대학은 성리학의 필수 교재인 사서삼경의 하나입니다. 율곡 이이 같은 천재는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이 사서삼경을 줄줄 외웠다고 하지요? 사서삼경을 모르곤 조선 시대에 과거는커녕 선비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의 가장 첫 번째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그것에 응답하려는 자세. 즉, 효도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효도가 곧 우주 만물의 이치와 하나로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도, 공부를 하고 무예를 닦는 것에도 모두 부모님을 공경하고 잘 모시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효도라는 단어를 21세기에 꺼내드니,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이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모님과의 애착 관계가 높은 학업 성취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연구들이 수 없이 많다는 예시들을 돌이켜보도록 하지요. 왜 부모님과의 좋은 애착관계가 높은 성적으로 이어지는지, 그에 대해서도 앞에서 모두 다루었습니다. 아이가 우리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자라면서 만나게 될 어려움들로 인해 위기를 덜 겪으며, 공부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 또한 잘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 부모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를 한다는 생각도 아이의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조선 시대엔 아주 흔한 상식이었습니다. 개인주의가 자리 잡은 21세기에는 아이의 인생과 부모의 인생이 별개의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가족주의가 보다 탄탄했던 과거에는 아이는 부모님을 위해, 부모는 아이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곤 했죠.


오늘날 효도라는 개념이 잘 쓰이지 않다보니 우리에게 남아있는 효도에 대한 인상은 부모님께 복종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그런 것으로 잘못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기 수양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개념이죠. 아이를 성리학 질서 속에서 키우는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수양했습니다. 즉, 아이를 통제하거나 간섭하려하지 않고, 아이의 덕성을 존중하고 내면을 함양하도록 했습니다. 겸손하고 검소한 태도를 자녀에게 보이려 노력했지요. 조선 시대 기준으로 “잘 교육받은” 아이들은 부모님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롤모델로 여겼습니다.


효도와 입신양명의 모범사례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 장군입니다. 권율 장군의 아버지는 최고 관직인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었습니다. 그런데 뼈대 있는 명문가였음에도 권율 장군은 40살이 되도록 관직을 얻으려 하지 않고 한량처럼 보냈습니다. 친구들이 벼슬을 얻으라고 권유를 해도 자신은 그럴 재목이 아니라며 여행을 다니고, 지리를 공부하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요?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공부를 강제하지 않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너를 내가 낳았구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무슨 뜻이었을까요, 그 유언에 무언가 깨우친 것이 있던지 권율 장국은 별안간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하더니, 46세에 급제해 벼슬길을 시작합니다. 권율 장군의 장녀가 결혼한지 5년이나 되었으니 할아버지가 되었을 나이입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의 군사를 총괄하는 지위에까지 오르니 그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비로소 입신양명에 뜻을 두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운명 자체가 바뀌었을지 모르죠. 한량의 삶을 계속하는 대신 권율 장군은 효도를 실천해 이름을 널리 알리고 나라를 평화롭게 하였습니다.


아이와의 관계는 모든 교육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위에서 다룬 조선의 인재교육의 원칙을 현대의 언어로 수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세상의 진리와 아이의 품성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② 그러므로 자녀교육을 위해선 품성을 잘 닦아야 한다.

③ 아이의 품성과 지능은 통합되어 발달한다.


이 3단 논법의 결론, 품성과 지능이 통합되어 발달한다는 것 역시도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성적표에 적혀있는 좋은 성적은 하나의 결과물일 뿐이지만,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결과에 도달합니다. 창의성이 높은 아이, 집중력이 좋은 아이, 인내력이 빼어난 아이, 아니면, 다방면에 두루 뛰어난 아이. 공부를 목적으로 대하는 아이, 공부를 수단으로 바라보는 아이. 이렇게 각기 다른 특성으로 학습에 임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습자가 될지는 아이의 품성에 달려있다는 것 역시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이의 품성을 잘 닦아야 하며, 부모로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품성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와의 애착관계와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효도에 대한 우리의 기억처럼 강압적이고 통제 중심의 자녀교육이 아니라, 민주적이며 수평적인 애착관계 속에서 부모에 대한 사랑이 자연스럽게 효도라는 실천방안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때로 우리는 아이에게 효도를 가르치기 위해 우리의 부모님에게 잘 해야 할 필요를 느낄 것입니다. 네 그것도 진실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자녀교육에 있어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재력, 그리고 양육 참여가 필수로 꼽힌다죠. 조부모님과의 애착 관계가 좋다면 부모님과의 애착관계 또한 좋겠죠. 그것이 다명면으로 아이의 품성과 지성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구요. 이렇게 자녀교육은 하나의 큰 고리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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