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냉장고에서 갓김치를 꺼냈다. 열무김치와 배추김치를 각각 한통씩 정리한 뒤였다. 이제 곧 불볕더위가 찾아오겠지만, 여름답지 않은 여름은 어쨌든 익어들었다. 이즈음 하여 그 많던 김치 통들이 하나 둘 착착 비워진다는 것은, 김장 날짜가 고작 백일여 남았다는 사실을 실감시킨다. 틈만 나면 엄마가 해서 들고 가라시던 열무와 총각김치도 담글 철이 이미 지나버린 뒤다. 김장철까진, 남은 김치들을 열심히 먹을 일만 남았다.
이 갓김치가 엄마가 언제 해주신 거더라. 열무가 들어가 있다. 지난해 여름이 되기 전이었던 같다. 내가 무심하게 엄마에게 갓김치 얘기를 꺼냈더니 일주일 뒤엔가 만들어놨다고 연락이 왔다. 평일엔 큰이모 가게에서 소일 겸 알바, 주말엔 누나집 가서 조카 돌봐주느라 하루도 비는 날이 없으신데 언제 하셨담. 마침 겨우내 배추김치만 먹느라 심심하던 밥상에, 바깥양반도 좋아하는 알타리무가 알싸하게 무쳐진 갓김치가 한동안 식탁을 물들였다. 그리고 그 얼마 뒤쯤 해서 나는 냉장고에서 아주 푹 익은 열무김치를 발견했고, 여름이 무르익어가면서 엄마는 신나게 열무김치를 담아서 내게 보내셨다. 그리하여 오늘.
갓김치와 선지국으로 아침을 뚝딱 해치우고, 진로강의를 마치고 잠시 홀로 외출을 했다. 바깥양반은 브런치로 매끈한 복숭아 두알. 두꺼운 구름이 군데군데 걷힌 사이로 더 없이 청명한 하늘이 드러나고,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충분히 차를 몰만한 시원한 여름날씨는 오랜만에 찾아온 긴 장맛비의 수선함을 잠시 가라앉히는듯, 시름조차 잠시 잊게 만든다. 하휴. 내일은 원고를 하나 써야 하고, 다음주엔 시험과 생활기록부 업무로 꽤나 바쁠 시기다.
"물회 먹을래?"
"아니 여름이라 좀 그래."
"아깐 초밥 사간다니까 좋겠다더니."
"아 그러고보니 초밥도 그러네."
"그럼 뭐 먹고 싶어?"
"간짬뽕? 아 그건 덥겠다."
이런식. 바깥양반이 영 선택을 못한다. 혼자 집에 남은 바깥양반이 심심해하니 운전하는 중간중간 전화를 꽤 자주했다. 나는 생각나는대로 이런 저런 메뉴를 불러보는데 답이 안나온다.
"아. 그럼 차돌박이랑 관자 사갈게. 갓김치 꺼냈으니까 삼합하자."
"응 좋아."
삼합이라. 작년에 여수에 놀러가서 처음 먹었던 요리가 여수삼합이다. 갓김치, 해물, 냉동삼겹살. 비가 억수로 오는데 여수삼합으로 유명하다는 맛집 앞에서 대기를 하며 나는 꽤나 인상을 찌푸렸다. 이걸 줄 서서 먹어야 하나? 아무리 봐도 관광객들이나 먹을만한, 억지로 개발한 메뉴 같은데? 하며. 마침 정말, 정말로 억수로 비가 오는데 연휴시즌이라 여수밤바다의 주차장에는 차들이 바글바글했고, 차를 세우고 식당으로 가는 100m 남짓의 걸음에 신발이며 바지가 푹 젖었더랬다. 맛이야 뭐, 술안주를 두고 술을 먹지 못하는 운전수의 슬픔이여. 이처럼, 그리 기억이 좋은 요리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자 안팔아. 차돌박이는 샀는데. 전복으로 할까?"
"아니야 그냥 와. 전복 안좋아해."
"끄응..."
그래도 집에서 해먹으면 맛이 없을 수는 없는 요리라, 푹 익은 갓김치를 바깥양반도 더욱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로는 알맞춤하다. 여전히 편식을 고치지 못하는 바깥양반은 생김치를 잘 먹지 못한다. 볶아주면 콕콕 젓가락을 가져가면서. 그런데 관자가 없다. 수조를 두고 활어회도 팔고 활전복이며 꼴뚜기에 쭈꾸미까지 두루 파는 대형식자재마트인데 조개 관자가 없다라. 하기사. 원체 잘 상하는 식재료인데 비해서 딱히 중국요리 아니면 해 먹을 일이 없으니.
그래서 두부를 샀다. 문어도 보이기는 했지만 둘이서 한끼 먹기엔 수지가 맞지 않다. 만두도 있고 다른 먹어치울 거리들도 많으니, 이왕이면 쓰임새도 많고 조림으로 두고두고 먹을 수도 있는 두부로 삼합을 꾸려야지. 갓김치, 두부, 차돌박이면 보기도 꽤나 좋고 염분도 낮춰줄 수 있으니 좋은 대안이다.
다만 한가지 실수를 하긴 했다. 3개 모둠인 상품으로 알았는데, 크잖아! 이런 걸 다 파나 싶다. 딱 먹을만큼만 손질해두고 남은 건 내일 쓰려고 했는데 이미 뜯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일단 한꺼번에 모두 부쳐두기로 했다.
"바깥양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아나?"
"뭐? 어떤 음식? 너무 범위가 넓잖아. 고기야 아니면 요리야?"
"아니. 그냥.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딱 하나 있어. 명확해."
"어렵잖아."
3일 전에 비지를 짜내고 쉬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슬쩍 바깥양반에게 농을 걸었다. 정답은 두부조림. 요리를 잘하는 엄마의 음식 중에서도 두부조림은 정말로 밥도둑이다. 어린 시절엔 뜨거운 두부조림 하나면, 밥에 물을 말아 뚝딱 한그릇을 해치웠다. 그런데 나는 단 한번도 두부부침도, 두부조림도 만들어보진 않았다. 두부조림은 엄마의 요리이기 때문에 맛있는 것이라서 그런 것을 거라고, 그저 짐작이나 할 따름.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두부조림을 해보게 생겼다. 흐음. 너무 태웠나? 술안주시렵다. 빠삭하니 지금 간장 묻혀서 한입 깨물면 세상 행복하련만. 갈 길이 멀다.
크게 잘라놓은 두부들을 유리통에 정리해서 차근히 담아두고, 이번에는 지우개 정도 크기로 두부를 한번 더 잘랐다. 후라이팬에 삼합을 그득하게 담아야 하니 넓게 조각을 내서는 모양이 잘 안잡힐 것 같다. 이때쯤 TV에서는 <놀면뭐하니>가 방송을 시작했다. TV에서도 셋, 내 후라이팬에서도 세상 맛있는 음식이 셋이 모여서 삼합이 되니 이치가 재미있다. 뭐든지 합치고 섞여야 맛이지.
한쪽 면이 잘 익을 때까지 기다려, 두부를 뒤집고 자리를 만들었다. 차돌박이와 갓김치를 함께 올려, 차돌박이 기름이 김치에 스미도록 팬을 기울이고 김취를 뒤집는다. 가운데에 동그랗게 자리를 만들어 새우를 조금 올릴까싶어 해동을 시켜두었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바깥양반이 너무 수선스러운 음식은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이정도면 딱 흐붓한 한상이다. 더 빼고 더할 것도 없다. 참기름에 소금 하나면 딱이지. 갓김치의 시큼한 군내를 잡아주며, 차돌과 두부의 간도 함께 잡아줄. 그리고 밥솥에는 따끈한 새 밥.
생각해보면 모든 요리의 과정이 결국은 모으고 합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날것으로 먹는 생선회도 칼과 회뜨는 사람이 함께 모여야 하니 셋. 삼겹살 구이도 쌈에 소주 한잔이 합쳐져야 하니 셋. 떡갈비도 숯불에 양념은 적어도 갖추어야 하니 셋. 오늘- 갓김치를 가운데에 두고, 나와 바깥양반까지 합쳐서 셋.
여전히 여름날의 바람은 시원했고, 저녁을 먹는 내내 우린 흐뭇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청순과 요염함을 마구 오가는 린다G를 딱 보아하니, 푹 익어 맛나고 신선해 맛있고 뒤섞여 복스러운, 그런 인생이 딱 저깄네. 이효리, You w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