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도 여럿인 나이에 이 열정이라니
"어-."
"밖이야?"
"어 모란시장."
"뭐어? 모란시장?"
일요일 아침, 늦은 아점을 차렸는데 바깥양반이 머리를 말리고 식탁에 앉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는다. 멍 하니 기다릴 수도 없고 비도 많이 오고 하니 엄마와 아버지에게 순서대로 문안전화나 하자 하고 거실바닥에 앉았다. 그런데 수화기 넘어 엄마의 목소리에 뭔가 소음이 섞여있길래 물어보았더니 모란시장?
"아니 모란시장을 어떻게 갔어? 다육이 때문에?"
"어- 여기가 싸- 이천이 더 싸서 가봐야하는데 그건 멀고."
"지하철로?"
"어 금릉에서 죽 내려와서 2호선 갈아타고-."
"파주에서 거기까지? 끝에서 끝인데?"
"어 그냥 아침에 왔어-."
"새벽에 갔겄네."
"새벽은 아니고 일곱시반이지."
엄마는 다시 파주로 가는 길이라 했다. 다육이 화분을 몇개 사셨으니 피곤도 하실 것이고 눈을 붙이던 중에 내 전화를 받은 것인지 혀가 약간 굳은듯 발음이 요상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파주에서 모란시장이라니.
"화분도 키핑장에 놓고 가야하잖아."
"뭐 가면~ 가는 거고~."
"알았어 조심히 가셔."
"어 밥 먹었냐?"
"이제 차리지."
"두번 안차려서 넌 편컸네 아하하."
두어마디를 더 하고 전화를 끊었다. 비가 억수로 온다는데 다육이 화분들은 어떻게 들고 가시려나. 그러나 내가 걱정을 할 양반도 아니니 나는 내 앞가림이나 잘 하기로 했다. 이어서 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하고 나니 김치찌개가 팔팔 끓고 있다. 열무김치를 잘못 보관해 쉰내가 나는 놈을 살짝 헹궈 멸치와 보리새우를 넣고 팔팔 끓여 요긴히 먹는 중이다.
엄마는 몇 해 전부터 다육이에 꽂히셨다. 화분을 좋아하셔서 열번 가까이 이사를 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화분을 모으고 집이 좁아 처분하고 하시다가, 몇년 전부터 다육이라는 게 유행하면서 틈만 나면 다육이를 구경하셨다.
그렇다고 해도 바쁜 취미이기도 하고 엄마가 한 동안은 또 다른 재미들에 맛이 들려 본격적으로 다육이 재배를 시작하진 않으셨는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변화가 엄마에게 기회를 마련해줬다. 일본이었던가 중국이었던가, 국산 다육이를 수입해가는 나라에 수출길이 막혀 국내 다육이 값이 많이 떨어졌다고. 그 바람에 어쩌다가 한번 사서 집에 몇개 두던 다육이들을 마음껏 팡팡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침 다육이 화분을 보관해주는 키핑장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몇주 전 조카 생일에 식사를 하다가 엄마가 "너 시간 되면 나 좀 태우고 가라. 키핑장이라는 게 있다는데 가보려고." 라고 하시는 말에 당장은 모시고 가보진 못하고, 그 다음주에 같이 가서 다육이를 보관해주는 키핑장까지 바로 계약을 한 참이다.
평생의 취미인 화분재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엄마는 정말 신이 나신 것인지, 지난 주에는 역시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아버지와 같이 집에 있는 화분을 싹 실어가서 키핑장에 두셨다고. 그 양반 열정은 참.
엄마는 평생 참 당차게도 살아오셨다. 정말로 힘든 삶이었는데도 그랬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엄마의 몇가지 인상 깊은 기억은, 아빠 손도 빌리지 않고 집안 가구 배치를 휙휙 옮겨서 바꾸는 모습과 브라운관 티비를 들어 옮기시던 모습. 덩치가 크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평균의 여성 체형에 딱히 뭘 운동을 하신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세대의 어른이 으레 그렇듯 뭐든 힘쓸 일이 있으면 같이 쓰고, 기계나 도구가 없으니 몸으로 떼우고 하시며 일머리가 잘 붙은 것으로 추측해볼 뿐이다.
평생 일을 하셨다. 남들이 한창 즐겁게 삶을 가꿔나갈 3,40대 시기를 국민연금도 불입을 못할만큼 힘들게 보내셨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정을 많이 못주셨고, 나는 엄마가 꽤나 쿨하고 딱딱한 성품인 줄로 알았는데 그것도 웬걸, 첫 손주가 태어나자 돌쟁이 손녀 앞에서 개다리춤을 추며 자기 이마를 착착 때리는 안무까지 대체 엄마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게 있긴 한걸까. 그 와중에 오늘의 문안 통화 말미엔 열무김치를 몇통이나 해놨으니 와서 가져가라는 말씀까지.
나이를 먹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갖고, 나 스스로 교육학에 대한 공부를 하며 나는 나의 여러 기질과 특성에 대해 근거를 찾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유독 구구단을 못외웠던 일이나 활자 중독 그리고 글쓰기 등 그 연유는 나의 성장과정에서 대체로 연원을 짚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엄마의 이 위대한 열정과 정력은 대체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카락이 아직 풍성하시고 나이를 드셔서 안경을 상시착용하게 되셨지만 지금도 어지간한 사람 몇배로 부지런하시다.
내가 엄마에게 영향을 받은 것 중 하나가 요리인데, 엄마는 요리 솜씨가 좋은데다가 자기 위주라서 당신이 만들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쌩뚱맞게도 그걸 착착 해버린다. 그럼 한달 정도는 그 요리가 수시로 상에 오른다. 그러고는 충분히 즐겼다 싶으면 다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고 나면 다시 해달라고 졸라도 소용이 없다. 흥미가 떨어졌고 딱히 몸에 좋은 음식이 아니니 자식이 아무리 졸라대도 즐겁게 요리를 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걸 똑 닮았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그걸 해야 직성이 풀리고, 질릴 때까지 하고 나면 다신 안한다. 신혼 때 토스트나 갈릭쉬림프를 여러번 했는데 요즘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왜인지는 알 수가 없고, 대체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이것을 어떻게 닮아버렸는지 모를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55년 양띠이신 우리 위대한 최여사는 오늘도 자기의 인생을 찾아, 자기의 꿈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신다. 열무 물김치를 가지러 집에 한번 들러야겠다. 그리고 화창한 날이면 바깥양반이랑 최여사님을 모시고 이천이나 한번 다녀와야지.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어제 바깥양반이 하동관 곰탕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나는 오늘 연습 삼아서 호주산 냉동 양과 곱창을 사서 손질을 해봤다. 손질이며 냄새 잡기며 꽤 어려울 텐데 비싼 생 한우 내장들을 썼다가 공연히 냄새를 못잡아서 돈을 버리긴 싫고, 싼 맛에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한시간 넘게 양과 곱창을 손질하며, 아무래도 평생 엄마는 못이기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괜히 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