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소심하게 굴국
"아침 먹어야지."
"비빔밥 해줘."
토요일 오전 11시의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이렇게 시작된다. 비빔밥, 이라고 하면, 보통은 일반적으로는 냉장고에 있는 여러가지 재료를 적당히 채쳐서, 특히 나물과 멸치 등 밑반찬을 곁들여서, 스윽스윽 들기름과 비벼먹는 초간단 요리렸다. 그러나 우선 우리집에는 밑반찬과 나물류가 없다. 매번 새 요리를 하는 나의 성격과 입이 짧은 바깥양반의 식성이 결합된 탓이다. 그런고로 바깥양반이 비빔밥을 해달라고 하면 그것은 그대로 새 요리가 된다.
끄응 하고 몸을 일으키면서 재료를 계산했다. 당근. 있다. 호박. 어제 굴국을 끓이기 위해 산 것이 있다. 그 다음에...구색을 맞추려면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스위트콘을 올려주고 가운데에 계란. 그리고 엊그제 구워놓고 거의 먹지 않은 스팸이 있다. 계산이 떨어진다. 나는 냉장고에서 당근과 호박을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
밑반찬을 좀 해두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영 팔리지 않고 나도 재미도 없으니 공연히 품이 든다. 그러나 보기도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바깥양반 먹이기에는 밑반찬을 이것저것 잘라낸 것, 열무김치나 도라지나물이 섞인 정말 맛있는 비빔밥보다는 즉석에서 볶아낸 나물들이면 흠흠할 테다. 채칼에 당근을 먼저 사각사각 밀어내서 팬에 올린다.
어제 굴국을 끓이고 남은 무도 있는데, 무나물을 해?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남은 무 토막을 보니, 오뎅국을 한번 끓이기에 딱 맞는 양이고 나물을 하기엔 살짝 양이 많다. 무 토막이 작아서 이걸 채칼에 밀기도 빡빡할듯싶다. 해서 무는 내려놓고 호박을 은행모양으로 썰어서 당근에 이어 볶는다. 사이사이 어제 미룬 설거지도 하면서, 주말의 늦은 브런치를, 비빔밥으로 한다. 스위트콘을 살짝 따서 뒤집어 싱크대에 살짝 걸쳐놓았다. 쪼르쪼르 물이 빠질 테지. 옥수수가 있으니 무 대신이다. 색상으로 보나 바깥양반의 입맛으로 보나.
어제 끓인 굴국이 맛있다. 벌써 세번째 언급을 하고 있다. 그만큼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굴국을 뒷베란다에서 가져와 데우기 시작한다. 굴전을 할까하고 한봉다리를 샀다가, 그만 파전에 해물라면을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어제는 메인디쉬로 굴국. 사이드가 연안식당에서 포장해 온 꼬막무침이었다. 강릉 엄지네 포차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바깥양반이 어제 집에 가는 길에 뜬금없이 꼬막무침을 사가잔다. 꼬맘비빔밥 1인분(12,000원)이냐 꼬막무침(19,000원)이냐 옥신각신하다가 꼬막무침을 샀는데, 밥에 국에 꼬막무침의 소면에 그만 밥상이 걸져지고 말았다. 소면을 먹지 못하고 짜디 짠 꼬막무침만 간신히 비웠다.
스팸을 적당한 사이즈로 다지듯 잘라서 우르르 팬에 올리고 밥을 퍼서 넓적하게 대접에 폈다. 호박을 살짝 하나 주워먹어보니 겉면이 바삭하면서 고소하게 구워진 것이 이것만 있어도 간장 살짝 찍어서 밥도둑 삼을 수 있겠다. 아무리 포장과 배달음식이 편하고 맛있어도 이렇게 갓 구워놓은 호박의 맛은, 따끈한 겨울밤의 맛, 집밥의 고스란한 맛이다. 구워서 시간이 지나면 수분이 빠져나와 겉면이 질척해지기에 호박의 이런 맛은 사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다.
모든 재료를 새로 손질해서 하건만은 스팸까지 구워지고 나니 금방 준비가 끝났다. 밥 위에 챔기름을 슬슬 흩어뿌리고 동서남북 네 방향에 당근, 호박, 스팸, 옥수수 꾸미를 올린다. 바깥양반을 위한 그릇엔 정갈하게, 내 밥그릇에는 옥수수는 없이 우르르 부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계란후라이. 달걀 두개를 깨 살살 갈라서 자리를 떼 만들어주고, 뚜껑을 덮고 약불로 줄이면서 밥상을 닦고 어느새 부산해진 주방을 치우고 열무김치를 꺼냈다. 이번에 담근 김장김치도 조만간에 꺼내서 맛을 보기 시작해야 할 텐데, 엄마가 여름 내내 만들어서 주신 열무김치가 아직 한통은 남았다. 밑반찬은 하지 않는 대신에 김치도 넉넉, 냉동실에 이것저것 재료도 넉넉하니 먹고 사는 것이 홀가분하다.
"얼른 와. 다 됐어."
바깥양반을 부르고 상에 그릇들을 올린다. 그리고 그때서야 고추장을 퍼서 올린다. 아이코. 콥샐러드처럼 알뜰하게 예쁜 그릇에 고추장이 올라가니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별 수 없지. 상을 마저 차리고 물을 꺼내오는데 그 사이에 바깥양반이 비빔밥이 마음에 드는지 내 폰을 잡더니 사진을 찍는다.
그래 비빔밤, 네가 고생이 많았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