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바깥양반의 제주 반달살이 / 남해→여수
"어서오세요-."
사장님이 작은 가건물의 문을 열자 안에서는 회색빛 줄무늬 고양이와 두마리의 강아지가 득달같이 뛰어나왔다. 손님을 반긴 것은 아니고 정원 한켠의 돌그릇에 담겨있는 물을 홀짝이며 마신다. 이채로운 광경에 나는 폰으로 연신 두마리를 찍는데, 벌컥벌컥 물을 마신 강아지가 먼저 자리를 뜨고서도 홀짝홀짝 한참이나 요녀석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물을 마신다. 나는 확신을 품고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살랑, 또 살랑. 엉덩이까지 토닥여준 뒤에 그 사이를 못참고 "오빠!"하며 나를 부르는 바깥양반에게 가 차를 골랐다. 내 선택은 석류차.
"강아지랑 같이 자라서 그런가 고양이가 사람 손을 타네요."
"거기 앞에 걔가 엄마. 그리고 작은 애가 딸이고 고양이도 같이 키웠어요. 냥이는 지가 개인줄 알아 하핫."
과연 그렇지. 개와 함께 개에 의해 자라난 고양이만이 완벽한 개냥이가 될 수 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사장님은 석류청과 청귤청을 뜨거운물에 휘휘 저어 금새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이토록 한가롭고 완벽한 오늘의 첫걸음이라니.
세번째 밤을 보낸 남해 설천면의 숙소는 꽤나 멋들어진 일출을 보여주었다. 일출이 아름답다는 것은 아침도 쾌청하다는 것이다. 아침 일곱시를 조금 넘겨 나는 커튼을 활짝 얼였고, 바깥양반은 "오빠 너무 멋있다!"라며 눈을 감은채로 폰을 더듬어 연신 일출을 찍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침대에 같이 앉아서 햇빛이 얼어붙어있던 하늘을 부수어내는 것을 보다가, 나는 작심을 하고 캐리어에서 커피와 그라인더, 그리고 드리퍼를 꺼냈다. 아차. 드립용 포트를, 안가져왔다.
어제 마신 게이샤 커피는 훌륭했다. 여행을 떠나서 3일만에 마시는 내 커피는 어떨까, 생각을 하며 그라인더를 휭휭. 그 뒤에 길쭉한 주둥이가 없는 물끓이개를 그대로 살짝살짝 쪼르르 부어가며 커피를 추출했다. 젠장. 제주도로 넘어가면 하나 살까. 아니다. 종이컵에 구멍을 내서 어떻게 임시방편으로 삼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바깥양반이 마실 배도라지생강차를, 이것은 나주곰탕을 먹은 뒤 마을장터에서 샀는데, 다른 컵에 붓고 뜨거운 물을 역시 부었다. 자아. 일출과 함께 하는 모닝 티타임. 펜션의 테라스에 나가서 한껏 사치를 부렸다. 바깥양반은 춥다며 얼른 도망가버린다. 나는, 음 역시 내 입맛엔 내가 볶은 커피 뿐이야, 다시 마찬가지의 결론을 내리며 유유자적 청승과 궁상을 뒤섞어 일출의 그라데이션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농가섬 가볼까?"
"응 날씨 좋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
육지에서의 여행코스와 숙소를 모두 바깥양반이 정했다. 그러다보니 그날 그날의 날씨와 우리의 운세에 따라서 바뀌는 여행일정을 숙소가 충분히 담보하지 못한다. 하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숙소에서 다시 사천으로 넘어가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날씨가 너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어제의 먹구름과 삭풍은 온데간데 없고 베란다에서 커피 한잔을 모두 비울만큼 날씨는 차분해져 있었다. 남해까지 또 언제 올지 모르는데 국내 최장이라는 사천케이블카를 놓칠 수 없지. 게다가 겨울이다. 풀과 꽃을 즐기기보단 멀리서 멀리서 푸른하늘과 옥빛 바다를 즐기는 게 최고다.
사천으로 방향이 정해지고 나서 나의 호기심이 대형사고를 쳤다. 모두가 어린 시절 사회과부도를 갖고 놀았던 것처럼 나는 여행에 와서 지도 앱을 꽤나 유심히 보며 그 지역을 알아보는 편인데...이상한 이름의 섬이 남해 한가운데 콕 박혀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농가섬.
지도의 활자는 축척을 반영한다. 작은 지역은 지도가 축소되어서 멀어지면 이내 표기가 되지 않는다. 반면에 확대를 해서 크게 보면 하나 하나 마을과 길의 이름이 지도에 뚜렷히 떠오른다. 그런데, "농가섬"이라는 지명이 쌩뚱맞게 지도에 박혀있어서 확대를 해보니, 너무나 작은 섬이었던 게다. 이런 작은 섬이 축척을 올렸는데도 지도에 뜬다? 호기심이 발동해 탭을 한 뒤 그곳의 정보를 자세히 찾아보니까...너무 좋은 곳이잖아!
작은 돌섬을 산 노부부가 가건물과 캐러벤을 두고, 교실 세칸 정도 되는 그 공간을 하루하루 꾸미고 가꾸며 손님을 맞이하고 계셨다. 마침 알맞춤하게 우리 숙소에서 사천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딱. 이건 못참지 나는 바깥양반에게 그것을 알렸고, 바깥양반은 선선히 내 제안을 받았다. 날씨가, 너무 좋았으니까. 그리고 우리의 도전은 대 성공. 처음보는 아저씨가 온몸을 간지럽혀도 꼬리를 흔드며 그것을 받는 개냥이 "냥이"가 있었고 주인 내외분께서 출근하실 때마다 다리 끝까지 마중을 나온다는 두마리의 강아지에, 조용한 파도소리.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나가고 있는 테이블들과 의자들.
그런데 이 멋진 풍광을 즐기는 비용이 고작 3천원의 입장료 뿐이라니, 인심좋은 사장님과 남해에선 그래도 규모가 있는 촌락인 지족리의 풍광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껏 힐링을 얻어낼 수 있었다. 오늘까지의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수확, 가장 행복한 시간이 바로 농가섬이 아니었을까 싶을만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사천케이블카를 타보니 또 그렇지 않더군요.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케이블카도 대성공이었다. 겨울철, 평일, 코로나 등의 변수로 케이블카는 다섯대 중 두엇만이 사람을 태우고 산과 섬을 넘나들고 있었다. 나는 바깥양반과 단 둘이 10인승 케이블카를 점유하고 실컷 풍광을 맛봤다. 전망대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는 추울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포근한 햇살과 산들바람이 우릴 맞아주고 있었다. 뿌듯한 수확이다. 농가섬과 사천 케이블카 둘 중 한 곳을 고르라면 꽤나 고민이 될 것 같다. 당연히 둘 다 묶어서 즐길 수 있는 여행지니까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고 둘 모두를 가는 게 가장 좋을 테지만. 가장 의미있었던 남해 코스로 농가섬을 뽑을지 사천케이블카를 뽑을지,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아. 사천케이블카 바로 아래에 톳김밥과 배말칼국수를 하는 곳이 있는데 알려지지 않은 로컬맛집 같다. 작은 전복처럼 생긴 배말과 보말고둥으로 낸 시원한 국물이 참 미묘하면서 입맛을 당긴다.
사천케이블카를 뒤로 하고 마침내 육지여행의 종착지이자 제주도로 가는 기착지 여수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잔 뒤에 차를 함께 실어 크루즈선을 타고 제주도로 가기로 했다. 이번에 정한 숙소는 돌산도 초입의 몽돌해변 근처인데, 역시 바깥양반의 훌륭한 선택이었다. 잠을 자는 공간은 복층에 시설도 썩 훌륭하지 못했지만 리조트라서 부대시설이, 무려 인피니티풀이 있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온수풀인지 여러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괜찮을까? 싶지만 이런 풍광을 보고 몸을 담구고 싶은 마음은 매한가지일듯했다. 우리는 리조트를 두루 구경하며 나중에 코로나가 종식되면 이곳에 꼭 다시 오기로 약속을 하고, 사천에서 여수를 건너오는 사이에 어느덧 저물어가는 해를 기다렸다. 노을을 본 뒤에,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그런데 말이야. 여기 바베큐 돼?"
"될걸? 응 잠깐만...있어. 해줘. 근데 좀 비싸네. 이만원."
"어어...밥 나가서 먹지 말고, 그냥 여기서 바베큐를 하면 어때?"
"오...괜찮을듯. 안추울까?"
이렇게 또 계획을 순식간에 바꿨다. 오늘의 일정은 온통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들 뿐이다. 게장백반은 내일로 미루고 야외에서 고기를 굽기로 했다. 해가 더 넘어가면 안되겠지. 우린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처의 마트로 차를 몰아 신속하게 고기와 야채를 사고, 득달같이 바베큐를 요청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의 저녁은- 동켠 바다로 스며드는 노을과, 제법 추운 바람과, 그 바람을 상쇄시켜주는 달갑지 않은 숯의 연기와, 절반도 마시지 못한 막걸리로 마무리되었다. 아침 일곱시부터 긴 긴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일찍 쉬어 두어야 한다.
내일의 일출은 향일암으로 정해져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