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일 : 동백꽃 필무렵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제주 입도, 애월

by 공존

다육이로 취미를 바꾸기 전에 엄마는 화분을 무척 좋아하셔서 우리가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를 한 뒤에는 베란다를 스무개가 넘는 화분으로 가득 채우셨다. 원래 단칸방에서 살다가 넘어간 세간살이라서 아파트는 한동안 휑하니 텅텅 빈 집처럼 보일 정도로 공간이 남아돌았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베란다는 작은 정원처럼 긴 시간 유지되었다.


어느날은 겨울에 베란다에 들어갔다가 새빨간 꽃이 나무에 가득 달린 것과, 신선한 꽃향기가 확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끼고 신기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베란다에 빨간 꽃이 무슨 꽃이야?" 하고. 매끈한 이파리에 빨간색, 작약하는 그 빛깔은 무척이나 고혹적이어서 전화를 걸 정도로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그 꽃이 동백꽃이라고 알려주셨고, 나는 그만 "동백꽃이 향기가 되게 좋구나." 라고 말해 엄마를 빵 터트리고 만다. 엄마는 이내 웃으며 "야~ 동백꽃은 향기가 없는 꽃이야~." 라며 나를 깨우쳐주셨다.


그게, 내가 동백꽃을 처음 알게 된 날이다. 내음이 없는 겨울 꽃. 그러나 그 화사함으로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그리고 오늘, 제주도에 와서 두번째 일정이 약 2천평 규모의 화원을 갖춘 농원 겸 카페였다. 8시가 조금 안되어 차와 함께 배에서 내린 우리는 해장국을 아침으로 후루룩 먹고 숙소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몇시에 숙소 들어갈 수 있어?"

"으음- 두시인데."

"아 피곤해 죽겠는데. 오빠 전화 좀 걸어봐 좀 더 일찍 들어가볼 수 없냐고."


간밤에 나도 수달이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방이, 너무 더웠다. 온돌에 등을 지지는 거면 차라리 낫겠는데 공기가 건조하면서도 더우니 새벽에 몇번이고 깨다가 다섯시를 조금 넘겨서는 아예 우리 모두 더 자는 것을 포기했다. 허리도 조금 아팠다. 고루고루 잠자리가 편하지 못하보니 나는 심지어 생전 없는 일을 겪는데, 배탈이 나고 말았다. 그 배탈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 내게 달라붙어있다가 다음날 말끔히 풀렸다.


몸에서 열기라도 빼볼까 하고 옷을 대충 입고 갑판 위로 나갔다. 사방이 모두 칠흑같은 밤. 통신장애 구간이라 핸드폰으로 뭘 더 할 수도 없었다. TV를 켜서 둘이서 우두커니 시간을 보내다가 여섯시반쯤부터는 일출도 볼겸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때가 되니 다른 승객들도 모두 깨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제 제주도네. 저기 해도 뜬다."


바다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여행자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기회다. 이런 날에 날씨가 흐려서 제대로 된 일출을 못보기라도 하면 굉장히 아쉬울 텐데 다행히도 적당히 구름이 가라앉은 하늘은 차분히 달아오르며 붉은 빛을 뿜어내주었다. 동에서 서로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경로라서, 날이 차츰 밝으면서 저 멀리 눈 덮인 한라산 정상이 보이고, 제주시의 새벽 야경과 성산 방향의 오름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일출이란 것이 별다른 것이 아닌데도 이번 여행에서 수달이는 유독 해맞이에 열성이었다. 예전엔 아침잠이 너무나 많아 여행만 왔다 하면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까지 꽉 채워 나오곤 해서 내 속을 썩이더니만, 근래엔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착착 준비를 하고 날 재촉하곤 한다. 덕분에 나도 아침에 일어나 등 붙이고 폰이나 하는 나쁜 버릇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체크인이다. 세시간 남짓의 수면과 배탈로 몸상태는 최악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숙소에 가서 쉬고 싶은데 두시라. 그리고 우리가 배에서 내린 것은 8시. 그렇다고 8시부터 숙소에 전화를 걸어서 체크인 시간을 당겨달라고 할 수도 없다. 수달이의 의견으로 9시에 여는 카페를 찾아 일단 들어가기로 하고 마노르 블랑에 도착했다.


"멍멍!"

"어어엄마야아아아!!"

"어어어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야!"


수달이를 먼저 카페 건물 앞에 내려주고 나는 주차장으로 조금 더 들어가 차를 세웠는데 문을 엶과 동시에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수달이의 비명이었다. 농원에서 키우는 대형견이 조금 달려든 모양이다. 사장님이 소리치는 소리도 함께 들렸으니 큰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후다닥 발걸음을 재게 돌려서 가보니, 수달이는 아무렇지 않게 카페 안에 들어가 연신 사진을 찍는 중이다.


"안놀았어?"

"어 엄청 놀랐어 나한테 이렇게 달려와서"


나는 웃으며 수달이를 도닥였다. 그리고 함께 농원을 둘러보는데...이야. 동백꽃 천지다.


1월에 제주도에 와본 적이 없어 이렇게 동백꽃이 만발한 풍경도 난생 처음이다. 서귀포시에서 멀지 않은 올레길에 동백꽃 군락지가 있다거나, 수달이의 고집으로 철지난 2월에 카멜리아 힐이란 곳도 다녀와봤지만 모두 동백꽃은 시들어버리고 난 뒤라 그리 눈요깃거리가 되지는 못했다. 오늘 온 이곳은, 지금이 딱 동백꽃이 필 무렵이어서였던지 세상 아름다운 풍경이다.


"오빠 밖에서 마시자. 음료들 좀 챙겨와."

"끄응...그래."


마침 날씨도 화창하니 땃땃해서 한바퀴 농원을 거니는 동안 패딩이 갑갑하고 덥게 느껴져 벗어버렸다. 그제서야 날씨 앱을 켜 온도를 확인하니 거의 영상 15도에 가깝다. 세상에 봄이로구나! 이정도면 밖에서 차를 마셔도 무방하지. 아쉽게도 동백꽃 말고는 다른 화초나 수목은 모두 빼빼 말라 시들어있는 상태이지만, 어지간한 꽃은, 어디서라도 볼 수 있다. 원래부터 어릴때의 일화로 동백꽃을 좋아하던 나는 이 드넓은 공간을 우리 단 둘이 거닐고 있다는 즐거움에 흠뻑 취했다.


게다가 행운도 따랐다. 우리의 반달살이 기간 동안 묵기로 한 숙소에 연락을 해 보니 당장이라도 체크인이 가능한 상태라고 한다. 와! 다만 너무 일찍 가는 것은 폐가 될까 생각이 들어, 12시부근에 간다고 말씀드리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카페 다녀왔다고 했죠? 옆에 제빵소 갔었어요?"

"아뇨 거긴 아니고 마노르..."

"마노르 블랑? 아유 가지 마요 거기 사람 너무 많아 아직 위험해."

"아...하하...네."


코로나에 대한 경각심을 새삼 일깨워 주시며 사장님은 우리 짐을 거들어서 방으로 안내해주셨다. 처음으로 장기 숙박을 해보는 거라 여러 숙소를 충분히 검토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고른 것인지, 어떤 곳일지 불안한 마음을 우리는 품고 있었다. 경치가 좋고 방은 넓다. 그러나 생활공간이 구분되지 않는 원룸이다. 방은 깔끔하지만 전반적으로 지은지가 20년 이상은 된 건물이라 군데 군데 낡은 티가 났다. 반면 동네는 번화가에서 차로 10분 가량 떨어진 한적한 곳이라 번잡하지 않아 딱 좋았다.


"TV 커?"

"제법 크네. 근데 테이블은 따로 없나봐."


나와 수달이는 각자의 핵심 편의시설까지 점검하며 짐을 풀고 드디어 침대에 누웠다. 5일간의 강행군과 어젯밤 잠을 설친 피로까지 몰려와서 나는 까무룩 잠에 들었


"오빠. 더 잘꺼야? 12시인데..."


...지만...라는 소리에 미련 없이 잠에서 깼다. 잠은 밤에 자면 되지. 우리는 내일부터 온다는 비 예보에 그나마 화창한 하늘을 잠시라도 볼 수 있길 기대하며 아주 아주 핫플레이스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점심은 오일장에서 떡볶이로, 저녁으로는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한산한 길목에 콕 박힌 로컬 식당에서 초밥을 먹었다.


밤이 되니 비는 추적추적 오기 시작하고, 반바지에 슬리퍼, 후드를 푹 눌러쓰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로컬 식당로 가는 길. 5일이나 걸려 제주도에 온 보람이 있다. Slowly to 제주, slowly in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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