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일 : 울부짖어라, 덕후였던 남편의 해방된 재능이여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세화, 미술관체험

by 공존

초조하다. 딱 이틀씩 밀리고 있는 여행일기는 하루에 두편을 작성할 만큼의 에너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한시간쯤 집중을 해서 글을 쓰고 나면 이내 침대에 가서 뻗고 만다. 그러고 나선 읽지 못한 책을 생각하지. 원서 읽기는 턱 없이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우보천리라고 읽고 읽다보면 마지막 페이지는 열리는 법이라 긴 시간에 대한 부담이나 두려움은 없지만 내 몸이 하나인 것이 문제다. 여행을 다니며 밀리지 않게 일기를 쓰는 것만도 힘든데 짬짬이 읽는 수준의 독서량으론 원서를 휙휙 넘겨내기가 힘들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어제도 고작 네장 밖에 읽지 못한 책을 떠올리고...일어나 책을 편다. 효율적인 학습환경이다. 눈을 뜨면 다른 할 일이 없고, 밤이 되면 술 먹자고 부르는 친구도 없다.


캐리어에서 커피용품들을 꺼내 콩을 간다. 숙소의 물끓이개로 쪼즈르 쪼르르 물을 떨어트려보려다가 주방 바닥만 온통 적셨다. 역시 드립포트를 사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랬던들 저랬던들 커피는 잔을 가득 채웠다. 썩 잘 내리지 못한 것인지 산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불을 켜지 않고 창밖으로 비껴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해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120년 간의 거대한 미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상을 바라보며 오늘날의 한국과 세계의 미래를 짚어보는 일. 경제적 양극화로 소득계층별로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있고 그것이 한국사회에서는 출산율이라는 지표로 명백히 나타난다. 줄어드는 아동인구는 여러 직군의 교육 노동자들에게 멸망의 조종으로 느껴진다. 보수정치권과 경제권력자는 외국인 노동자를 통해 저임금 노동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에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는데, 내국인의 경제력 감소와 동시에 진행되는 외국인 노동자 증가의 결과는 숱한 서구의 사례를 통해 이미 드러난 바다. 사회분열과 혐오의 확산.


책을 읽다 보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장학관님이 교육과정 철학에 대한 페이스북 포스팅을 최근에 한 것이 문득 생각나 찾아서 댓글을 달았다.


- 조금 전에 생각난 건데 학습자 주도 교육과정에 표준화/샘플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커리큘럼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중/고 단위 학생들이 스스로 커리큘럼을 구상하는데 매번 시행착오가 발생하니 그것을 조금이나마 줄일 방법도 되고...지도교사들이 커리큘럼을 연구하면서 이론적으로 발전도 될 것 같구용


이른 아침인지라 이내 장학관님은 댓글을 달았다.


- 그래요. 올해는 주기적으로 제대로 모임을 해 보자구요. 연구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했으면 해요. 커리큘럼을 한 번 같이 짜 봐요.


방학의 아침 댓바람에 나는 1년간 장기적으로 일을 늘렸다. 하나의 책을 깊게 탐구하며 연관도서를 찾아보는 것이 자기주도적학습이고, 그것을 여러권으로 묶어서 순서를 정하면 커리큘럼, 즉 교육과정이 된다. 교육계 내부에서는 자기주도적학습을 입시공부에 한정짓지 않고 생애 전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몇년간 지켜보니 청소년들은 독서계획을 체계적으로 짜지 못하거나, 독서 자체의 필요성을 느끼는 정도가 덜하거나, 독해력과 활용능력이 부족하다. 진로 분야 별로 독서 커리큘럼을 짜 두면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에 도움이 될 테니, 해볼만한 시도다.

"...이틀 연속 떡볶이야."

"난, 뇸, 매일도, 뇸뇸, 먹을 수, 뇸, 있어."

"아니 탄수화물탄수화물탄수화물 얘도 탄수화물."

"(속삭이듯)오빠 오는정 몇개만 더 꺼내봐."

"나도 이틀 연속 순대국 먹고싶다..."


수달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김밥과 떡볶이다. 내가 순대국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하다. 여행 중에 이틀 연속 같은 메뉴를 막 그렇게 먹고 그렇진 않을 텐데 일반적으로. 어제 점심에 이어 오늘 점심이 또 떡볶이다.


아침에. 수달이는 내가 책을 대여섯장을 넘기고 나니 일어나서 내 옆에서 귤을 까 먹었고 제주도에서의 둘째날 첫 메뉴로 오는정김밥을 선택했다. 제주도 올 때마다 거의 반드시 먹는 메뉴다. 김밥러버의 인생김밥이라고 할만큼 맛은 좋지만 워낙에 인기있는 업체라 구매 자체가 도전이다. 10시 오픈시간부터 전화를 80통이나 건 끝에 나는 포기를 해버렸다. 수달이는 내가 80통 넘는 전화를 하는 동안 씻고 드라이를 하더니만, 내가 포기를 하고 한 10분 쯤 지나서 통화에 성공했음을 내게 쿨시크하게 알렸다. 우리는 12시에 김밥을 찾아 바로 뒷골목에 있는 분식집에 가서 모닥치기를 주문해서 몰래 몰래 김밥을 꺼내서 찍어먹었다. 오는정 김밥의 레시피가 인터넷에 있다는데,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한번 만들어볼 테다.

소화를 위해 서귀포시장과 이중섭 거리를 잠시 걸었다. 여전히 포근한 날씨에 목련 꽃눈이 이른봄의 정취를 찐하게 느끼게 해줬다. 여행을 하는 동안 하루에 만보 걷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만보를 채우면 수달이의 앱에서 알림이 뜬다. 성취감이 제법 있어서 육지 여행하는 5일간 나름 잘 지켜진 편이다. 남은 김밥 두줄을 달랑 달라 손에 들고 내려가니 2월만 되어도 사람이 가득한 이중섭 거리는 한산했고 짧은 산책 끝에 잠시 내려앉은 카페의 작은 노변테이블에서 마시는 흑임자 라뗴는 편안하고 달았다. 알록달록한 인테리어가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색감이다. 나란히 앉아 오늘은 뭐할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오는데 괜찮으실까요? 차양 더 내려드려요?"

"아뇨 아뇨 괜찮을 것 같아요."

"네에 알겠습니다."

"오빠 내일까진 비랬어. 우리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거 할까?"


좀 더 걸을 수 있길 바랬는데 아쉽다. 수달이는 폰을 꺼내 뭔가 열심히 검색하기 시작했다.


"원데이 클래스?"

"응 여기 한달살이 하는 사람들이 공방에서 체험 많이 해."

"그런게 많이 있어?"

"어 에어비엔비에. 어 이거 좋다. 돌담길 만들고 캘리그라피."

"오. 콜."


재밌는 체험공방이 제법 있다. 가격이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고기 한번 먹을 돈으로 미술활동이라니 환영이지. 돌담 캘리그라피를 즉시 예약하고 수달이는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이거 미술관도 있다."

"응?"

"여긴 예약 없어도 바로 가면 될 것 같은데? 여긴 그림 체험."

"오..."


성산읍에 체험이 가능한 미술관이 있다. 서귀포시에서 차로 한시간을 넘게 가는 거리에, 다시 숙소로 돌아오려면 두시간 가까이 걸릴 거리지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오후 일정을 확정지었다. 마음 편하게 자리에 앉아 남은 라떼와 빗소리를 천천히 즐기다가, 도통 성기어질 기미가 없음을 알고 카페에서 우산을 사, 차로 걸어갔다.

"저, 도안 없이 백지 주실 수 있으세요?"

"네 저희가 따로 백지는 재고가 없고요...종종 백지 찾는 분들 계신데 도안 뒷장을 쓰셔도 됩니다."

"아하. 넵."


성수미술관에서는 전지 사이즈의 몇가지 도안을 제공하고 특별한 시간 제한 없이 아크릴물감도 무한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수달이는 성산일출봉과 유채꽃 도안을, 나는 고양이 도안을 고른 뒤에 그것을 뒤집어서 이젤에 붙였다. 미술관에 오는 동안 무엇을 그릴지 수달이와 상의해 결정한 상태다. 뒷장은 외곽선조차 없어 일일이 파레트를 대고 점을 찍어가며 선을 그었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전지 크기에 맞춰 신중하게 사진과 대비하며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나의 도안은 지난해 봄에 강화도에 루지를 타러 가서 찍은 사진이다. 함께 간 언니가 뒤에서 찍어주었는데 화창한 하늘에 홀홀한 수달이의 뒷모습까지 퍽 낭만이 넘쳐서 카톡 프로필로도 오랫동안 걸어두고 있을 만큼 아낀다. 풍경화를 좋아하는 내 성향에도 잘 맞아서 재밌게 그릴 수 있었다.

"내가."

"응."

"딱 두시간 본다."

"어?"

"두시간 넘기면 분명히 너는 빨리가요오 대충해요오...보인다 보여."

"아니야아."


나는 후다닥 스케치를 마치고 언덕의 밑색을 칠한 뒤에 본격적으로 채색을 시작했다. 막상 선을 따고 보니 배경이 되는 언덕의 구성요소가 좀 복잡하다. 양쪽에 중복되지 않게 다양하게 꽃과 나무를 배치해야 하는데다가 전경-후경이 되도록 언덕을 충첩해서 그려야 한다. 빡세잖아! 그런데 미술관에서도 걸어두지 않은 제한시간이 내 옆에 살아숨쉬고 있었다. 두시간이 지나면 수달이의 체력과 인내심은 바닥이 날 것이고, 자기 그림도 끝마쳤겠다 빨리 가자며 날 재촉할 것이 분명했다. 종이는 크고, 애초의 생각보다 그림은 복잡하고, 붓은 충분하지 않다. 제법 스릴 있는 도전과제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모든 잡념이 사라지며 오롯이 나만의 세계에 집중하게 되었다. 창작이야 말로 최고의 유희지. 금계화를 한 붓 한 붓으로 일일이 점을 찍고 거칠게 쳐올려 꽃과 잎파리를 표현하고 나니 두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언덕은 크게 세개의 레이어로 구분해서 표현해내는데에 성공했다. 어려운 하늘 표현이 남았지만 가장 시간이 걸리는 부분을 해결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옆에서 열심히 칼라링에 여념이 없는 수달이를 놀리기고 하며 여유를 찾았다.


하늘 그리기. 하늘색은 과감하게 칠해야 한다. 진한 색으로, 물감도 진하게. 어릴 때 나는 스케치 능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채색을 못했다. 색상에 대한 이해가 떨어져서 그런 것도 있고 스케치에 비해 채색은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있다. 그래서 잘 만든 스케치를 엉망인 채색으로 날려먹어서 미술선생님을 황당하게 만든 적도 있다. 별 옛날 생각을 다하네. 생각하며 나는 최대한 과감하게 과감하게 하늘을 칠하고 구름을 표현해나갔다. 이때쯤 수달이의 재촉은 심해져 구름의 그림자를 디테일하게 표현하진 못했다.


"오빠아 빨리이."

"아니...이걸 보라고. 이걸 세시간만에 다 한게 기적 아냐?"

"아니 배고파아. 그리고 윤스테이도 봐야되는데 멀잖아아."

"저기요. TV 때문에 이 그림을 끊으라고?"

"나중에 그려."

"아 어떻게!"


정확히, 예상한 대로다. 덕분에 구름의 표현 말고도 몇가지 세부표현을 더 포기했다. 원래 루지를 타는 도로 양쪽의 블럭을 제주도식 돌담으로 표현하려던 계획이었다. 제주도 현무암을 표현해야 하니 점을 찍어야 한다. 본방사수는 중대사항이고...시간이 너무 든다. 포기다. 그리고 후경의 언덕에 큰 나무를 몇개 그려서 원근감을 표현하려던 계획도, 역시 포기다. 덕분에 조금 지형이 어색해졌지만 허용범위다. 나는 수달이와 카트, 그리고 도로를 빠르게 채색해 마침내 그림을 완성했다.

"맘에 드냐."

"짱이군요 짱짱."

"얼른 가자. 휴휴휴휴휴."


세시간 40분 가량의 작업이었다. 정말 쉴 틈 없이 붓을 놀리느라 목이 바싹바싹 마를 지경이었지만 전지가 아니었으면 만족감이 덜했을 것 같다. 작은 화폭에는 이 장면을 모두 담아낼 수 없을 뿐더러, 그랬다가는 세필로 일일이 점을 찍고 잎새를 쳐올리는 과정이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마음에 든다 뿌듯하다. 대학 시절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진득하게 그림을 하나 끝냈다. 그러나 나보단, 뿌듯한 선물을 받은 수달이가 더욱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은 고생한 보람이 있게 흑돼지를 먹었다. 연탄불에 바싹 구워진 고기를 사장님은 일일이 골라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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