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남원, 성산
"첫 끼니는 또 떡볶이인가...어 근데 여기 맛있네."
"응 내가 좋아하는 맛이야."
"튀김은 여기가 괜찮다 더."
투덜거리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불은 내가 당겼다. 지난번에 제주도에 쉬러 왔을 때 아침으로 모슬포 오일장에서 순대국을 먹기 위해 수달이를 끌고 갔고, 거기서 먹으려던 순대국은 못먹고 꽤나 먹음직한 떡볶이를 먹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퍽 맛있었다. 아침의 바글바글한 인파 덕분에 갓 튀겨낸 고추튀김과 김말이를 찐한 떡볶이 국물에 찍어먹는 호사를 누리니 수달이도 새로운 제주도의 여행컨텐츠에 눈을 뜨고, 이번 반달살이에 와서 제주도의 오일장을 모조리 들러 떡볶이 투어를 하겠다는 계획을 짰다.
서귀포 오일장은 역시 규모가 크고 인파도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한켠에 늘어선 식당가의 여러 국밥집, 국수집들이 만석에, 대기줄까지 늘어서 있다. 떡볶이 투어로 계획을 잡아두지 않았더라면 홀려서 들어갈만큼 매력적이다. 우리는 한바퀴 휘 돌며 시장을 구경하다가 마른오징어와 한치를 충동구매했다. 우리집에서 소비되진 않을 것이고 아버지께 오징어는 드릴 계획.
떡볶이 집을 보지마자 그대로 수달이의 발걸음은 멈췄다. 뛰어난 심미안으로 자기 취향의 떡볶이임을 간파한 것이다. 가래떡을 쓰고 튀김도 큼직큼직한 것이 인상적인 모슬포에 비하면 서귀포 오일장의 떡볶이집은 떡볶이도 튀김도 평범한 외견이었다. 좌석은 꽉 차있어 우린 서서 먹어야 했고, 수달이는 코를 접시에 붙이고 열성적으로 떡볶이를 흡입했다. 말 수가 확 줄고 허리를 펴지도 않는다. 맛있다는 뜻이다. 덕분에 여섯개의 튀김이 대개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속 고명도 나름 알차고 따듯한 온기가 그대로 느껴져 맛이 좋다. 먹으면서 보니 또 계속 새로 튀김을 해서 판에 올리고 계시다. 맛집의 법칙. 갓 만든 음식이 언제나 맛이 좋다.
비가 그친 오늘 하늘은 화창해서 아침에 해가 뜨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수달이를 깨워 사진이라도 나가서 좀 찍고 오라고 하니 선선히 패딩을 걸치고 나가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돌아온다. 제주의 어느곳에서나 눈 덮인 한라산이 보인다. 한라산을 가리는 고층건물을 지양하는 문화가 있다고 하는데, 그럴법하다. 맑은 겨울날 바라보는 한라산은 그 자체로 특별한 감정을 선사한다.
그런 날이니, 동백꽃이 만발한 수목원을 걷는 것은 더욱 기꺼운 일이다. 규모는 작았지만 탐스러운 동백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게다가, 연 이틀 쏟아진 겨울비와 삭풍 덕에 그 풍성한 동백꽃들이 길에 진분홍의 양탄자를 깔아두었다. 깜짝 놀랄만큼 길 곳곳에 동백꽃잎들이다. 적당한 규모의 인파만이 수목원 안을 거닐고 있어 욕심을 내 여러장 사진을 찍었다. 일본에서는 떨어지는 벚꽃의 모양새를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나. 오늘 와서 보니 동백꽃에 비할 바가 조금도 못된다. 이틀의 비, 그 뒤에 오늘 와서 만난 동백꽃잎의 흔적들이야말로 비길 데 없는 정취다.
동백꽃 수목원을 한바퀴 돈 뒤에 욕심이 나서 신흥2리로 가보기로 했다. 중산간에 자리한 마을로 300년 수령의 동백숲이 있고. 그 덕분에 마을 전체가 동백을 귤과 함께 가꿔 노란빛과 붉은 빛의 조화가 아름다운 곳이라 한다. 어느새 숙소와는 꽤 먼 거리를 온 셈이지만 흘러 흘러, 이런 것도 여행이지.
도착한 마을에는 여행객이라곤 우리 말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편이고 수목원 정도가 아니면 동백꽃이 관광상품으로 가치가 크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300년 수령의 동백 숲은 5분만에 두바퀴를 돌 수 있을만큼 작았고 10m를 넘는 큰 나무들 꼭대기에나 동백이 피어 있어, 수목원처럼 풍성한 동백꽃을 보긴 힘들었다. 대신, 마을 자체는 평온하니 걷기에 딱 좋았다. 길에는 우리들뿐이고 곳곳의 집들에선 정원과 마당, 귤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보였다. 새소리를 들으며 한바퀴 크게 돌았다. 듣던대로 노랑과 진홍의 조화가 한적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을 걷는 동안 우리는 "언젠가 제주도에서 산다면"이라는 대화를 하며 구옥들을 샅샅이 살폈다. 돌담이 있는 작은 집을 사, 안채는 스테이로 바깥채는 식당으로, 창고는 카페로 개조해서 꾸미고 살자는 꿈을 품고 우리가 탐내봄직한 매물을 골라봤다. 15년 뒤에나 이루어질 수 있을 일이지만, 만보 걷기 이외에도 제주도를 거닐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늘어난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오늘 우리는 아침 산책을 한 외돌개를 포함해 만 사천 걸음 가까이를 걸었다.
길고 긴 산책의 마무리는 그렇게 골라본 집들에서 실제로 카페를 차려서 운영하고 있는 곳들을 둘러볼 차례다. 수달이가 딱 꿈꾸는 그런 카페를 두군데 골랐다. 하나는 구옥을 사서 리모델링한 딱 그런 카페. 다른 한 곳은 귤밭 가운데에 있는 창고를 개조한 카페다. 제주도에 창고와 구옥을 살려 만든 카페가 트렌드를 따라 우후죽순이다. 여기에 십수년 뒤에 우리가 카페를 차린다면 레드오션에 텀벙 빠지는 길이겠지. 그래서 두군데 카페를 다니면서는, 우리가 카페를 차려서 "살아남는 길"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 처음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만큼만 작게. 동시에 생존할 수 있는 경쟁력을 키울 방법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우리 카페의 특장점을 만들 어떤 독창성이 있어야만 한다. 메뉴가 될 수도 있고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 그것이.
그러고 나서, 더 더 동쪽으로 차를 달려 정체불명의 식당에 들어섰는데, 여기가 정말로 정체가 불명했다. 일본식 숙박을 그대로 활용해서 만든 특이한 레스토랑. 마당으로 창이 난 개별룸에는 코타츠가 한가운데 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코타츠가 일본식 건물에서 수제버거와 피자를 먹으면서라니.
게다가, 음식들도 영 정체불명. 쇠고기와 고등어를 배합한 패티로 만든 햄버거가 가니쉬와 함께 제공된다. 문제는, 그런 특이한 패티라면 햄버거를 한입 제대로 물어 번과 채소, 소스를 함께 맛을 봐야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질 것인데 요녀석은, 칼로 잘라서 따로 따로 먹을 수 있게 서빙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패티 따로, 빵 따로, 채소 따로 먹기 십상이다. 그만큼 햄버거의 배합된 맛이 아니라 따로 따로 재료를 먹게 된다. 일반적인 수제버거는 쇠고기 패티의 맛이 명확하기 때문에 햄벅스테이크를 먹는 감각으로 이렇게 따로 먹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생소한 음식을 접하는 손님들에게는 이런 방식이 음식에 대한 선입견을 키울 서 있다. 음식의 컨셉과 서빙방식이 충돌하는 측면이 있다.
함께 나온 피자도 조금 특이한 맛이다. 소스의 풍미가 생소한데, 근데 그 소스가 뭔지 정체를 알기 힘들다. 맛이 없냐고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뭐랄까. 맛이 있다 없다로 따질 수 없는 아예 다른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런데. 수제버거와 피자를 먹고 나서 코타츠에 몸을 푹 밀어놓고 누워있으려니 기분이 묘하다. 음식이 특이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사장님의 친절함이나 독특한 분위기는 흥미를 자아낸다. 예약제로 개별 룸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하였으니 식사 뒤에 뜨끈한 이불을 덮고 누워서 한 없이 편하게 쉬다 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인테리어도 접객도 식사도 모두가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과는 별개로 존재해서, 맛과는 별개로 신기하다 재미있다 독특하다 그런 판단과 별개로 이 개별 경험 자체가 재미가 있다. 그래서 묘하게 또 오고 싶은 기분을 들게 한달까. 예를 들어 좀 선선한 시기에 창을 열어두고 풀벌레 소리라도 들으면서 피자 하나를 나눠먹으며 여기서 직접 볶았다는(물론 가게의 정체성 덕분에 그 맛에 대해서도 우려와 기대가 교차한다.) 커피를 즐기는 그런.
아침 9시에 숙소를 나와, 다시 숙소를 들어가니 8시를 훌쩍 넘겼다. 겨울비로 이틀간 제대로 걸어다니질 못해 오늘은 청명한 제주를 마음껏 둘러봤다. 그만큼 둘 다 체력적으로 힘도 들어, 나는 열시쯤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한시간 뒤에 일어나 밀려있는 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