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 : 마라도와 맞바꾼 뿌듯한 하루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서귀포시, 중문, 남원

by 공존

-세상에나.


"어떻게 하지?"

"아아 오늘 가고 싶었는데."

"아 일단 옆에 카페에 가서 생각해보자."

"응."


날씨가 흐릴 줄 알았는데 오늘도 퍽 화창하다. 제주도의 날씨가 천변만화하니 반달살이 초반에 굵직한 일정은 모두 해두기로 했다. 이래서는 힐링은 커녕 매일 바쁘기만 하지만 2주의 체류 일정이 마냥 긴 것만은 아니다. 게다가 모레 하루는 잠깐 학교를 다녀와야 하니 하루는 버릴 예정이다. 그래서 오늘 마라도와 가파도를 가보기로 하고 아침을 챙겨먹고 나왔는데. 너울성파도로 접안이 불가능해서 배들이 결항이다. 가까운 가파도에는 들어갈 순 있지만 나올 순 없을 거라며 들어가지 말라고 권한다. 휴, 과연 삼다도구나. 하긴, 매일 우리는 산책을 하는 동안 바람 때문에 눈도 제대로 못 뜰때가 많다.


두 섬을 둘러보고 나와서 저녁을 먹는 일정인데 하루가 날아가 버렸다. 가까운 카페에 가서 생각을 해보기로 하고 차를 모는데 길가에 확 눈에 띄는 입간판이 들어왔다. "검은 노루". 나는 차를 몰든 걸어가든 항상 좌우를 두리번 거리며 관찰을 많이 하는 편이다. 호기심이 동해서 좁은 길을 서행하며 어떤 가게인지 보는데 으음? 건물도 조금 힙해보인다. 12시 무렵인데 불이 켜져있다. 더욱 궁금증이 커져서 차를 길가에 세우고 지도에서 어떤 식당인지를 검색해본다. 국수집. 평이 좋다.

"저기서 점심 먹자."

"뭐? 카페 가기로 했잖아."

"여기 맛집 같아. 평 좋아."

"그래서 지금 여길 가자고?"


수달이는 급작스런 내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었지만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차를 돌렸다. 11시...20분이다. 9시가 안되어 아침을 먹었고 산책도 30여분 했다. 점심 정도는 먹어도 될 시간이다.


"뭐 파는데?"

"고기국수. 우리 아직 제주도 와서 고기국수도 안먹었잖아."

"아아 그래도..."

"아 맛 없으면 내가 살게."


여전히 수달이는 마뜩잖아 한다. 그래서 원래 점심 지출은 수달이 담당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겠다고 툭 내뱉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수달이도 가게 이름이나 꽤 멀끔한 외관을 보니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나는 휭 먼저 들어가서 가게를 둘러봤다. 단촐한 편이지만 괜찮은 메뉴가 있다. 딱새우 물회가 13000원. 허어? 궁금하다. 고기국수와 함께 하나씩 주문을 했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10년간 제주도에 예닐곱 번 왔는데 지금까지 가본 모든 제주 식당 중에 손에 꼽을만한 맛이다. 물회엔 딱새우가 열 한마리. 식당에서 회만 주문해도 저정도면 15000원은 받는다. 그런데 엄청 저렴한 딱새우회를 시켰는데 물회가 딸려나오네요? 그것도 무진장 푸짐하게?


게다가 고기국수도 놀라운 퀄리티다. 톳과 고기 육수가 진하면서 잡내가 조금도 없다. 수달이는 내가 집어주는 딱새우를 연신 입에 넣으며 넙적한 칼국수면을 부지런히 씹어삼켰다. 내가 딱새우를 두점 집어먹는동안 아홉점을 입에 넣어줬는데 단 한번도 내게 양보하지 않는 고마운 마음씨를 느끼며 나는 익혀져 나온 딱새우 머리를 아작아작 씹어서 국물과 함께 먹었다. 다만 물회 자체는 그렇게 맛있다고 할 순 없었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게 너무나 차가워서 제대로 맛을 느낄 틈새가 없었고, 명색이 물회인데 고기국수를 드시는 수달이에게 모두 양보를 해버리는 바람에...물회를 물회로 먹지 못하고...


"혹시 밥 필요하세요?"

"어? 네네 주세요."

"뭐야 밥도 먹게?"

"공짜잖아. 나 그리고 이 시려서 더는 못먹겠어. 그거 줘봐."


수달이가 국수의 면을 다 비우자, 서빙하시는 분께서 오셔서 공깃밥이 필요한지를 물었다. 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고기국수 국물이 맛이 좋았다. 그리고 이가 너무 시렵다. 남은 딱새우 머리와 두어개 남은 회를 앞접시에 모두 옮기고 물회 그릇을 치웠다.

배부르다는 수달이 대신에 나는 갓 지은(오픈시간한지 얼마 안된 시간이었으니) 밥을 국에 말아서 건더기를 삭삭 긁어서 몇숟가락을 떴다. 국수 면발은 내가 먹어보지 못해서 평할 순 없지만 수달이의 말에 따르면 "어울리는 맛"이었다고 한다. 밥? 밥에는 정말, 끝내주는 궁합이다. 톳이 거의 씹히지 않을만큼 푹 익어서 부드럽게 술술 넘어간다. 야 이런 집을 발견하다니, 정말 기분 좋은걸.


계산을 하려고 보니 귤을 쌓아두고 얼마든지 가져가라신다. 가게 마당엔 비싼 수입SUV가 주차되어 있고 뒤에는 200평은 되어보이는 밭이 딸려있다. 귤농사를 따로 조금은 하는 집이렷다. 임대료가 없어서 이런 저렴한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건인가 하는 계산이 금방 내려졌지만 건물주면 또 어때. 양심껏 이런 훌륭한 맛을 보여주다니 말이야. 나는 양 손에 귤을 하나씩 쥐고 가게 뒷마당에 앉아서 흡족한 기분으로 그것을 까먹었다.

"귤체험 할까 오늘?"

"어? 그럴까?"

"오늘 하는지 알아봐."

"응."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의 카페에 앉아서 뭘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수달이에게 말했다. 어제, 일요일이라 쉬는 바람에 바로 앞에까지 갔다가 허탕을 친 귤체험 농장을 오늘 가면 될 것 같았다. 여전히 바람은 너무나 심하게 불었지만 다행히 화창한 날씨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귤체험 역시 일찌감치 해치워야 할 이번 반달살이의 큰 목표다. 하루라도 빨리 해치워야한다. 다행히 농장은 오늘은 연다고 확인이 되어, 재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를 몰아 나오는데 해프닝이 한가지 발생했다. 산방산은 유채꽃 풍경으로도 유명한데 그...유채꽃밭에 배추를 닮은 요상한 작물에 유채를 닮은 요상한 꽃이 가득 피어있다. 이것은 아무리 봐도 유채꽃이 아니다. 차에서 내려서 이게 대체 무슨 꽃인가 신기해서 잠깐 들어가봤는데 자릿세를 받는 윗자리의 유채꽃밭 할머니께서 얼른 이리와서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시라며 재촉을 하신다. 세상에 1월부터 유채꽃도 아닌 아이들을 심어두고 부지런도 하시지. 자리를 뜰까도 생각했지만 이천원을 드리고 한바퀴 돌고 나왔다. 들어가서 유심히 보니 아무리봐도...배추다. 한가지 다행한 점은 유채꽃밭의 퇴비내음과는 달리, 이 배추꽃밭에서는 익숙한 그 배추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

"여기 바구니에 가득 담아오시면 되고요, 무게를 넘기면 추가비용을 내셔야 합니다."

"앵."


한번 산방산 유채꽃밭에서 배추꽃에 눈탱이를 맞고 나온 마당에 감귤체험 농장에서도 퍽 비싼 값을 요구하니 앵. 소리가 나왔다. 제주도에서 만원이면 10kg치 한박스를 사서 손가락이 노래지도록 까먹을 수 있다. 그런데 내손내딴 감귤이 두명 만원에 2kg밖에 안된다니.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신에 귤따기 체험을 하면 커피 가격은 퍽 저렴하게 마실 수 있고, 귤밭에서는 얼마든지 시식이 가능하다고.


그리고 나는 귤로 배가 찰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몸으로 느껴보았다. 물회에 국수에 밥을 말아먹은지 아직 두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 소화는 되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귤을 딸 나무를 고르기 전에, 모양이 좋은 귤을 고른 다음에 그 나무에 열린 다른 귤을 하니씩은 따먹어봤으니, 바구니를 반도 채우기 전에 귤로 배가 그만 차버렸다. 제주도에서 신선한 귤을 따자마자 먹다니 당연히 그 맛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더는 시식을 할 생각도 못하고 얼른 바구니를 채워, 귤밭을 빙 돌며 구경하고 나왔다.


마라도엔 가지 못했지만 이쯤이면 흡족한 하루다. 귤을 따고 나니 시간은 두시를 넘겨,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먹으러 가면 될 것 같았다.


"어디 갈까?"

"한라산 보이는 카페 찾아볼래? 오늘 한라산 너무 좋네."

"응...알았어 찾아볼게."


제주도의 바닷가마다 오션뷰 카페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지금까지는 우리도 그런 카페를 찾아다녔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달랐다. 시간도 어쨌든 여유가 있고 말끔하 하늘이 열리니 눈이 쌓인 한라산 정상이 그렇게 아늑하고 애틋할 수가 없다. 저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고, 이내 수달이는 꼭 알맞은 곳을 찾아냈다. 우리는 다시 중산간으로 이동해, 녹차밭을 갖춘 다원을 찾아갔다.

"저희는 이렇게, 우전이고요. 가장 어린 잎으로 우린 찹니다. 그리고 이건 황차, 발효된 차고요. 이렇게 드립니다."

"오 네에 감사합니다."


중년의 여사장님의 억양이 뭔가 맛깔진 친절함이다. 일흔살 무렵에 시작해 이 서귀다원을 일구신 노부부의 따님이신 걸까. 따듯한 차를 두 종류 내어주시며 얼마든지 편하게 쉬다가 가라신다. 그 말대로, 이야아. 아침부터 해풍에 시달려, 귤 때문에 배불러, 아침부터 나와서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친 몸을 모처럼 마음껏 쉬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다원의 차 나무는 이곳에 심어진지 10년 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것인지 전체적으로 정갈한 모양새다. 일전에 하동의 다원에서 하룻밤 머무르고 산책을 한 적이 있는데, 그곳은 녹차밭들이 수십년씩은 된 곳이라 그런지 나뭇가지가 삐죽삐죽 눈에 도드라진다. 관광지라서 차나무들이 오밀조밀하지 못하고 관광지 느낌이 확 드는 오설록은 말할 것도 없다. 한사란이 올려다보이는 아늑한 산속의 녹차밭. 이곳이 몸과 마음을 쉬게 하기엔 정말 딱이다. 비가 올 때도 좋다고 하는데, 이정도 위치만 되어도 제주도면 구름이 자주 끼는 자리다. 비도 좋지만 이른 아침, 안개와 구름이 착 가라앉은 날씨에 이곳에서 따끈한 차를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은 돼지갈비였다. 중문색달해변으로 와 오늘의 만보걷기를 달성하며 노을을 감상해서 국수와 귤로 채워진 내 배도 거의 비워졌다. 강한 화력으로 빠르게 익혀진 고기를 멜젓에 찍어먹는다. 풍미가 입안에 가득하다. 다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고기에 비해서 소스와 찬거리들이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테면 양파소스는 고기랑 같이 잘 집히지 않고 쌈에 넣기도 어렵다. 무절임보다는 무생채가 낫지 싶은데. 게다가 파절임도 없다. 뭔가 아쉬워! 고기는 인천의 부암갈비, 서울의 성산왕갈비와 동등한 수준이지만 고기의 맛을 찬들이 충실히 받쳐주지 않는다. 다만, 그 와중에 김치는 정말 맛있다. 고기와 김치는 별 다섯인데 찬거리가 별 셋인 집이라니.


좋은 하루였다. 집에 오니 또 다시 하루의 긴 여정으로 피로는 엄습하지만(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라 바깥에 나와서 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된다.) 마라도와 맞바꾸어 충실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을 먹고 길게 산책을 하고, 점심을 먹고는 귤을 따고, 노을을 보며 역시 길게 산책을 하고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다. 다만 오늘도 어김없이 숙소에서는 일찌감치 뻗어버렸다. 제주도에 와서 나도 수달이도 새나라의 어린이들이 되어 10시에 잠들어 7시쯤 깨고 있다. 이런이런. 제주도의 푸른밤은 어디로 간 거야.

부록 : 오늘 만든 아침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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