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중문
개학이 한달 남았다. 다시 말해 대학원 입학도 한달 남았다는 말이고, 그말인즉슨 음...엄...허엄...음...살이 좀 빠지지 않을까? Upswing을 읽다가 외출 중에 간단히 읽을 책이 필요해 이 책을 다시 집은 게 3일 전. 하루에 한 챕터씩 천천히 읽어서 오늘, 점심식사 전 카페에 앉아서 다 읽었다. 대학원 공부를 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공부할 게 많다. 가벼운 책이니 후딱 읽고 넘기려고 했는데, 이책. 마르크스의 책이 눈에 밟힌다. 이틀 전 비오는 날 들렀던 서점의 사장님께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공짜로 넘기신 책이다.
그러니까, 한달 뒤부터 내가 공부하게 될 학문은 교육사회학이고,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 존속하는데 교육이 기여하는 일을 막고 진정한 인간의 자아획득, 인간관계의 형성, 평등한 공동체의 구성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게 된다. 이러한 비판적 사회철학에는 반드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중심을 이루게 되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지닌 학자와 연구자들은 빠짐없이 반드시, 어떻게든, 마르크스주의를 탐구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에 불과하니 꼭 읽을 필요는 없지만, 이 경우엔 내 독서성향이 작용을 한다. 발췌독보다는 원전을 되도록 제대로 읽는 것을 선호하는 터라 마르크스의 사상을 폭넓게 담고 있는 요녀석을 각종 도서에서 수차례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펴지 않고 넘길 순 없지. 하루 이틀이면 이것도 다 읽을 분량이긴 하다. 그 어렵다는 자본론에 비하면 원론적인 메모 정도라 부담도 적고. 마침 카페에 앉아서 서문을 읽는데 대학원 입학 환영회를 줌으로 한다고 연락이 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넘기고 오늘은, 많이 걷기로 했다. 점심도 저녁도 헤비하게 먹을 예정이다. 아직 제주도 일정 초반이라 수달이는 하루 하루 점심 저녁 일정을 제법 알차게 짜고 있다. 원래 생각했던 제주도 한달살이와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그러다 말겠지 뭐. 살이 찔까봐 고민하는 것도 낭비다. 푹 쉬고 넉넉히 먹고 올라가서 또 바삐 살아야 한다. 나도 수달이도.
점심은 그 식당을 예약을 성공했다. 운 좋게도 우리가 제주도에 도착하고 3일 뒤부터 새벽부터 대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에 머무르는 사람에 한해서 하루 전에만 예약을 할 수 있게 시스템이 정비가 되었다. 앱으로 예약을 하면 예약자의 카톡으로 메세지가 온다. 이정도면 대기표 거래를 완벽히는 아니어도 웬만큼은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앱 예약 첫날, 저녁 8시 10분 전부터 대기하고 있다가 정확한 타이밍에 예약에 성공했다.
"오빠는 치즈 안먹어?"
"...뭐...너 먹지 왜."
"아냐 치즈가 진짜 맛있어. 이번에 오빠가 치즈 먹어. 내가..."
"아냐 너 치즈 먹어. 나 등심이 더 좋아. 다음에 또 먹게 되면 둘 다 치즈 먹는 것도 고민해보자."
"응."
원래는 희망 메뉴까지 앱 예약시 같이 기재하게 되어 있는데 너무 급해서 넣는 걸 깜빡했다. 다행히도 2인 메뉴로 등심 하나, 치즈 하나가 조정이 되어 있다. 한달만에 먹는 건데 맛이 어떨까...생각을 했는데, 역시 맛있다. 테이블에 지난번에는 못본 꽃소금들이 올려져 있어, 소스와 소금을 번갈아 찍어먹다보니 지난번보다 카레를 적게 먹었다. 만족스러운 식사.
"와 저기 봐봐 저기. 진짜 경치 좋다."
"응 그러네."
"여기서 세울게."
"어?"
"여기서부터 걷자."
"응? 여기 올레길 아니잖아 아직."
"응 그래도. 걸으면 길이지 뭐."
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오니 햇살은 너무 좋은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원래는 가기로 한 카페까지 왕복 두시간 정도를 잡고 올레길을 걸을 계획이었지만 어려울 것 같다. 일단 차로 카페로 이동한 뒤, 상황을 보아 올레길 8코스의 휠체어구간을 걷기로 했다. 해안산책로를 길게 끼고 있을뿐더러 저녁 노을을 보기도 좋은 구간이다.
그런데 목적지인 대평포구로 내려가는 언덕길이 너무 경치가 좋았다. 저 멀리 포구가 내려보이며 숲과 바다, 하늘과 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데다가 왼쪽 오른쪽으로 산등성이에 귤밭이 실하게 깔려있다. 충동적으로 길가에 차를 세웠다. 네이게이션이 3.5km가 남았다고 말해준다. 걸으면 딱 30분쯤이면 걸리겠다. 인도가 없는 길을 차를 살펴가며 조심조심 걸었다.
그런데 정말 좋았다. 대평감산로. 안덕계곡에서부터 이어지는 평화로운 이 길이 왜 올레길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건지 모를만큼. 우리 말고도 이 길의 맛을 아는지, 몇몇 사람들이 길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 이따가 나도 저렇게 언덕을 거슬러 올라와야 하겠지. 카페에 가서 목만 축이고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래야 카페에 앉아서 충분히 여유있게 노을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와 진짜 좋다."
"여수가 좋다하되 제주 아래 육지구나."
언덕을 내려와 잠깐 골목길을 걸으면 이내 탁트인 박수기정(샘물절벽이라는 뜻)이 한 눈에 들어오는 올레길8코스다. 날씨가 좋으면 이 풍광을 즐기며 10여분 바닷길을 걸을 수 있는 제주도 올레길 투어의 백미다. 날씨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여길 내내 걸었을 테지만 아직 수달이와 올레길을 제대로 걷는 문제에 대해선 합의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날씨도 춥고. 올레길 투어보단 당장 쌓이고 쌓인 카페투어가 급하다.
"나 이제 간다."
"얼마나 걸려?"
"뭐...걸어서 30분. 차로 5분 걸리겠지."
어처구니 없게 무슨 시그니쳐 메뉴라는 달짝지근한 커피를 받아왔길래 딱 두모금 후루룩 마시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몰라서 가방까지 메고 왔는데 다 헛일이다. 책은 한줄도 펴지 못하고 일단 차부터 다시 가지러 가야겠다. 오면서 호강은 다 했다. 얼른 가서 차를 가지고 온 뒤에 쉬어야지. 여전히 칼바람이다.
바람을 한껏 맞으면서 생각을 해보니, 삼다도의 바위, 바람, 여자 중에 여자가 많다는 건 쉽게 말해 풍랑으로 어부들이 많이 죽어서 과부들이 많다는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어떻게 이 척박한 섬에서 때론 사람이 굶어죽는 사태를 겪으면서 살아남았는지.
왜 수달이는 저녁 메뉴로 탕수육을 먹자고 하는 걸까 싶긴 한데. 어쨌든 저녁은 탕수육이다. 언덕길을 훅 하고 오르내리는 한시간이면...아니, 방금 수달이가 시킨 그 이상한 생크림 가득 시그니처메뉴면 우리가 걸은 칼로리는 바로 보충이 될 텐데 말이지.
어 저기 할머니 오시는데, 오시는데, 인사를 할까말까. 인사를 할까말까. 아아. 눈이 안마주친다. 그냥 지나치게 되었다.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나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보기엔 먼데 이내 오르막길로 들어서서 해가 저물녁이 되어 거세어진 바람을 맞으며 뒤를 돌아봤다. 오는 길도 가는 길도 아름답기만 한 이길.
올레길을 제대로 걷는다고 하면 하루에 네다섯시간은 투자를 해야 한다. 친구와 둘이서 걸으러 여름방학 때 왔는데 워낙 날이 더워 흘린 땀과 같은 양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눈에 띌 때마다 들이켰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여자사람동생까지 한명 껴서 셋이서 8월의 올레길, 6코스를 걷던 기억이 선연하다. 그런 올레길이 요즘 치안문제와 관광상품의 개발로 인해 즐기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고 하니 애석한 일이다.
저 아래서 보이던 옹벽을 마침내 지났다. 여길 꺾으면 차가!...없다. 에휴. 더 걸어야 할 모양. 그래서 굽이굽이 낮은 언덕을 두개쯤 지나 모퉁이를 도니, 저기 차가 보인다.
모처럼 아내로부터 벗어나 혼자 조용히 걸었다. 여행을 하는 내내 달라붙어 있어야 하니 이런 혼자만의 시간이 귀하다. 그리고 이런 일이 아니면 카페에서든 숙소에서든 글을 쓰느라 책을 읽으나 마음이 번잡하고 바쁘다. 대학원이 아니라면 이렇게 굳이 여행에 책을 여러가지 가지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캘리그라피 책도 챙겨왔는데 일정도 바쁘고 마음이 급해 펴보지도 못했다.
놀멍쉬멍걸으멍 살고 싶은데 혀언~실은. 도무지 쉴 틈이 없는 하루하루다. 충동적으로 차를 세우고 공연히 위태로운 길을 하염없이 걷는 바람에, 생각할 시간, 그것을 정리할 시간도 잠깐 가져봤다. 카페로 돌아가니 정말로 딱 35분만에 돌아왔다. 오래 오래 노을을 바라보다가 일어나 저녁을 먹으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