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일 : 다들 이게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인 거겠지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조천, 제작체험

by 공존

"집들이 다 비슷비슷하네. 디자이너에게 맡겨서 최신 좋은 건축법으로 만든 것들이겠다만..."

"그러넹."


제주도에 온 첫날 문득 눈에 띈 것이, 많이 변했고, 변한 만큼 단조로워졌다는 것이다. 대로변에서 잘 보이는 건물들은 대동소이, 비슷비슷한 펜션건물들이고 3,4층 규모의 상가건물들 역시 2000년대 들어서 흔히 볼 수 있는 통유리와 짙은 외벽의 조합들. 지역 전체에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어 놀라운 속도로 개발이 이루어지는 동안 지어진 건물들이 당시엔 최신식으로 보였겠지만,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그리고 난개발로 비슷한 건물을 짓고 또 짓는 과잉이 발생한 뒤의 결과를 보았을 땐 섬 곳곳에 들어선 거대한 몰개성의 형체들로 보였다. 물론 이러한 자본투자와 신속한 관광인프라의 구축이 아니었다면 제주도에 몰려든 관광수요를 감당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테지만. 전국 어딜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그런 건축물이 굳이 이곳에 똑같은 형태로 늘어서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숙소 근처의 빵집에서 브런치를 간단히 해결하고 나와 멀찍이 서귀포시 건너편으로 향했다. 오늘은 어제 예약한 돌담 캘리그라피 체험공방의 수업이 있다. 비가 거세어지기 시작하더니 두시간 가까이 걸린 이동 시간 내내 차를 두들겨댔다. 이런 날엔 그냥 조용히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파돗소리, 빗소리를 들으며 차분히 책장을 넘겨도 좋으련만. 아직 사흘째, 사실상은 이틀째이니 그런 여유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래도 기분 전환도 할 겸 오늘은 다른 책을 챙겨나왔다.

"그럼 남성분은 어떤 걸로 하실까요?"

"저는 유채꽃이랑...여기에 넣고 싶은 거 아무거나 추가해도 되죠 그럼?"

"네에-. 샘플들 참고하셔서 더 꾸미고 싶은 거 넣으셔도 돼요."

"그럼 저는 수달 넣고 싶은데..."

"네에?!"


강사 선생님은 당황하며 "수달은 만들어본 적이 없어서..."라며 털모자를 긁적이셨다. 보통은 잘 겪어보기 어려운 케이스겠지. 클래스에 온 사람들 중에서 제작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고, 이러이러한 걸 꾸며보고 싶다고 하면 강사 선생님이 요리저리 이렇게 저렇게 알려주는 그림. 실제로 수업에서 제시해준 다른 도안은 해녀, 고양이, 강아지 등 다양한 캐릭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연히 수달은 있을리가 없다.


조금 더 앞서서 처음 수업을 시작했을 때, 우리의 작품에 들어가는 모든 구성요소들이 (돌담을 빼고) 직접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듣고 나와 수달이 둘 다 깜짝 놀랬다.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보면 그 수준이 꽤나 높아서 미리 만들어둔 피스들이 있고 그것을 우린 골라 붙인 다음에, 캘리그라피만 위에 써보는 수업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색상의 클레이가 있고 물감도 있어서, 강사 선생님은 한라봉 하나, 유채꽃 하나 모두 수강생들이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 시점에 나는 그렇다면 내가 하고픈대로 해야겠군?! 하며, 유채꽃 도안에 수달을 추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보여준 도안을 참고로 해서, 꽃밭 가운데에 만들어넣기로.


중학교 미술시간 이래로 클래이를 만져본 일 따위 없으니 처음에 한 20분 동안은 클레이를 둥글게 비비고 그것을 다시 눌러 붙이고, 마음에 안들어 다시 둥글게 모양을 잡고 또 누르고를 반복했다. 수달의 땡그란 머리 모양을 살려서 누르는 것과, 몸통과의 접합선을 모이지 않게 하는 것 모두가 문외한에겐 쉽지 않은 과제였다. 한 대여섯번을 누르고 굴리고 누르고 굴리고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그럭저럭 모양을 잡았다. 몸통과 머리가 해결되었으니 나머지는 쉽다. 꼬리를 옆에 배치하고, 둥근 코와 뾰죽한 귀도 붙였다.

"와 미치...겠네...요."

"유채꽃 너무 작게 만들면 힘들어요-."


그러나 유채꽃. 유채꽃은 수달에 비하면 TOP였다. 강사 선생님께서 뚝딱 유채꽃 샘플을 만들어주어 그것을 따라 만드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네장의 꽃잎을 만들어야 하는데 물방울 모양을 살리면서 고추씨앗 크기로 눌러야 한다. 그리고 꽃술에 해당되는 부분은 좁쌀보다 조금 작은 크기다. 손톱을 물어뜨는 버릇 때문에 만들어진 내 투박한 손가락으론 무리다. 무리무리한 일이다. 어찌 어찌 네 장의 꽃잎을 물방을 모양을 살려서 겨우겨우 만들었다 싶으면 그것을 하나로 붙이면서 반드시 삐뚤빼뚤하게 이어지고, 이내 유채꽃은 마르고 시든 모양이 되어버렸다. 어떤 꽃잎은 짧고 어떤 꽃잎은 길다. 꽃마다 형태가 달라 조잡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조잡함이, 열개 정도를 겨우 겨우 만들기 위해 눈이 빠져라 집중을 한 결과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긴장으로 목이 바싹바싹 마르는 경험을 하며 겨우 작은 화폭을 채울 수량이 완성되었다.

죽음의 유채꽃 행군이 끝나니 그 뒤는 비교적 수월하게 흘러갔다. 글루건으로 뚝딱뚝딱 현무암 파편들을 화폭에 붙여 돌담을 표현하고, 이어서 강력접착제로 피스들을 하나 둘 고정시킨다. 손을 모으고 있는 경우가 많은 수달의 특성을 살려서 꽃을 손에 들고 있는 모양을 만들고 싶었지만 내 븅딱같은 손가락은 유채꽃을 작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꽃이 너무 커 수달의 손과 팔, 얼굴이 가려져서 자세를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문제는, 칼라 클레이의 접착력이 생각보다 세서 살짝 올려본 것뿐인데도 떼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애석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머지 꽃들을 붙여서 꽃밭을 완성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수달의 눈코입을 그리고, 털을 표현했다. 눈 위쪽 털의 각도가 조금 아쉽다.


그런데 또, 이렇게 열심히 두시간 내내 만들어놓고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에 또 실수를 할 줄이야. 글자 배치를 실수했다. 문구를 뽑아서 수십번 글씨를 연습해본 뒤에 화폭에 쓰는데, 그만 위로 지나치게 치우쳐져버렸다.


"어...어떻게 하죠? 글자 배치가."

"아하하 아 위에 여백을 원래 좀 두셔야 하는데."


미술이 워낙 서투른 수달이에게 강사님의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어 나는 유채꽃 샘플을 보여준 뒤로는 아무런 코칭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글씨도 내가 휙 한번 쓰는 걸 보시더니 "어 해보셨네요."하고 더 별 말이 없없다. 내게 할애하지 못한 시간은 그대로 수달이에게 투자되었다. 나는 글씨체를 여러번 바꿔보며 고심에 또 고심을 거듭했다.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다. 수달이가 끝낼 때까지 충분히 글씨연습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양껏 A4용지 앞뒤에 시험을 해봤다.


그러나 이미 완성된 상태의 작품에 글씨만 덧대는 거라서 부담이 크다.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그 부분을 확인했었는데, 글씨부터 몇번 써보고 그 뒤에 작품을 만드는 공정이라면 캘리그라피의 완성도가 높아질 것이지만, 2시간이라는 제한시간이나 작은 화폭을 낭비하게 되어버릴 테니 그렇게 수업이 진행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강사 선생님의 지도나 도움에 따라서 피스를 제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캘리그라피를 직접 연습해서 쓰는 것은 실습이나 체험의 수준이 아니라 한 글자를 쓴다 해도 몇시간은 연습해서 선을 익히고 익혀야 하는 문제다.


결국 나도 실패의 부담이 있어 화려한 글씨체보단 간결하게 조형미를 살릴 수 있는 수준의 글씨를 썼는데 그만, 글씨는 그럭저럭 앉혔다만 배치를 잘못하다니. "섬에, 봄에 너라는 꽃이 피어나"라는 글씨가 아래의 피스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아 어떻게 하지? 하늘이라도 그려?"

"아냐 하늘 칠하는 건 별로야."

"네 그건 애매할 것 같아요. 아니면 다른 글자를 더 추가하셔도?"


아아 어떻게 한담. 수달이가 글씨를 쓸 준비가 다 되어간다. 이제 나도 정말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고민 고민 하다가 "활짝"이라는 두 글자를 추가해서 공간을 메우기로 결정하고 수달이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그래서 신중하게...다시 글자를 앉혔는데 악. ㄹ받침이 여엉 별로다. 원래 캘리그라피의 꽃이 ㄹ조형인데. 쩝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또 오늘의 반달살이 활동이 마감되었다. 유채꽃을 만들고 남은 콩알 반쪽만한 노랑 클레이가 고무판 위를 구르고 있어, 집어서 돌담 아래 귤 두개 자리를 만들어줬다. 겨우 목과 허리를 펴고 강사 선생님이 정착제를 코팅해주는 동안 가게 안을 구경했다. 마감이 끝난 뒤에 포토존에 자리를 마련해주셨는데, 수달이는 예쁘다며 또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굳이 또 아내를 오브제로 한 미술창작이었다. 사진을 찍는 아내를 보며, 그리고 나도 일기를 써야 하기에 사진을 여러자 찍으며,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생각해본다. 부럽다는 말들, 사랑이라는 말들이 우리의 결혼이야기에 덕담으로 여러번 달리곤 한다. 나는 그녀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듯이 사랑하는 것일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면 선뜻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의 아내에 대한, 그리고 결혼에 대한 감정선이 글로 드러나거나 어제 오늘의 창작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대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하루의 수십가지 생각들 중 타인에게 보여질만한 것을 골라 엮으면 그것이 곧 아름다움이고 사랑이다. 실제로 내가 겪는 감정들, 품고 사는 생각들은 반영되지 못한다. 나의 일부의 감정과 행위만이 과잉대표되고 실상은 감추어져, 나의 내면의 반영이기도 한 이 작은 일깃장에는 온전히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거울도 나의 모든 것을 비추어줄 수는 없을 것이고, 어떤 거울은 감정을, 어떤 거울은 외양만을 반영하여 주는 것을 생각하면, 남들이 다들 사랑이라고 말하면, 이게 사랑인 거겠지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매일의 수십가지 감정들을 모르고서 나에게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혹은,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만드는 재주가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선물 자체가 굉장히 유니크해 보일 것이지요. 이런 그림, 이런 수달모형을 만들어서 착착 보여줄 수 있는 삶이라면 그게, 사랑일 테지요.

오는 길에 우리는 쏟아지는 비를 뚫고 한 서점에 들렀다. 제주의 여느 카페나 펜션건물과는 완전히 다른 정말 멋진 공간이었다. 구옥 세동을 리모델링해서 서점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책을 고르는 내내 슬레이트 지붕을 후두두둑 때리는 빗소리가 더할 나위 없는 정취를 전했다. 수달이는 두권의 책을, 나는 한권의 책을 골랐는데 사장님은, 내가 고른 중고서적을 팔지 않으시려고 정중히 내게 설명을 하시다가 내가 선선히 알겠노라 말하고 두권의 책값을 치른 뒤에 "에라 모르겠다"하고 내가 고른 책도 공짜로 주셨다. 이런, 복받으실 거예요 착한 사람 같으니.


그런데 그건 그거고. 설마 설마 제주도에서는 새에게 귤도 먹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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