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 : 커피, 그리고 책

나와 바깥양반의 제주 반달살이 / 남해

by 공존

<이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다>를 다 읽었다. 전날밤, 그리고 오늘 고집스레 책을 붙든 결과다. 360여 페이지에 달하는 빡빡한 분량에 미 민주당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의 빈곤과 권력에 맞선 긴쟁과 깊은 생각이 담긴 명저다. 이번 여행을 위해 제법 많은 책을 챙겨왔는데 아직까진 한곳에 머무르는 것보다 이리 저리 이동하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 운전만 아니어도 책 읽기는 좀 더 수월할 텐데-


그러나 운전이 아니더라도 하루 하루 여행은 계속되어 오늘이 벌써 삼일차. 각자 매일매일 기록을 남기자는 바깥양반과의 약속으로 바깥양반은 다른 SNS에, 나는 브런치에 일일 기행문을 쓰고 있다. 아무리 압축을 해서 짧게 쓰려고 해도 꼬박 한시간 이상은 노트북을 붙들고 있어야 하니 제법 고되다. 책 읽을 시간을 퍽 빼앗기는 데다가 중간 중간 편히 쉬지도 못하니 나나 바깥양반이나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오면 씻고 잠들기 바쁘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고 나면 소중한 기억의 표지석들이 되어주겠지. 성실한 게 최선이다.


아침으로 빵과 커피를 먹고 느긋하게 반신욕을 했다. 광주에서 사 온 공룡알 빵과 다른 두어가지를 곁들였다. 계란샐러드와 바게트빵의 조합인데 마요네즈와 오이의 함량을 좀 더 높인다면 어땠을까. 회전율이 높은 인기메뉴이니 채소에서 즙이 나오더라도 큰 문제는 아닐 테고. 내 입에는 계란샐러드라기보단 계란을 단순히 으깨어먹는 정도의 식감이었다. 그리고나서 숙소를 떠나 찾은 곳은 상주 은모래 해변. 한적한 바다를 잠시 산책을 한 뒤에 카페에 들렀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하향조정되어 카페에서 취식이 가능한 첫날이다.

은모래 해변에서 바라보면 산 꼭대기 근처에 보리암이 보인다.

1박 2일에 소개되어 유명해진 남해의 보리암과 금수산장엔 재작년에 다녀왔다. 전날에도 비가 와서 행여나 우리는 못올라가면 어쩌나, 올라갔는데 날씨가 흐려서 제대로 사진을 남기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금수산장에 올라서 컵라면을 시켜 절반쯤 먹을 무렵까지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우리 다음으로 금수산장 특등석에 앉은 커플은 꼬물꼬물해진 하늘을 바라봐야 했다. 그때엔 은모래 해변에도 물놀이 하는 어린 아이들이 퍽 많았다. 물이 맑고 깊지 않아 아이들이 놀기에 좋은 해변이고,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에도 평화가 깃드는 그런 곳이다.


은모래 해변에 들른 이유 중 하나는 상주장이라는 새로 생긴 힙한 카페였다. 드립커피로 다양한 원두를 서빙하고 있었다. 내가 커피를 유난히 좋아하니 바깥양반은 "오빠에게 맛있는 커피를 먹여주지."라며 야심만만하게 네비게이션에 카페 이름을 찍곤 한다. 이번에도 그랬지만 안타깝게도 바깥양반이 성공하는 일은 드물다. 직접 콩을 볶아서 마시는 단계쯤 되면 일반적인 카페에서 제공하는 커피로는 도무지 취향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주장에서는 무려 9천원짜리 게이샤를 취급한다.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세계 최고의 품종 중 하나이니 분명 맛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바깥양반과 나 모두 가졌지만- 커피가 아무리 맛이 있어도 결국 기호품인 탓에 나는 게이샤의 그 빡빡히 들어찬 풍미에 무언가 번잡함을 느꼈다. 꽃향기, 과일향기, 적절한 산미, 달콤함까지 명성에 걸맞는 퀄리티의 원두를 바리스타께서 서빙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커피를 볶은지가 1년이고 그 사이에 볶아본 원두는 십여종, 그리고 볶아본 횟수는 대강 50여번. 그걸 또 테이스팅하자고 덤비다 보니까 하루에 서너잔씩은 커피를 마신다. 직장에선 물보다도 커피를 더 많이 마실 정도이니, 그런 탓일까 결국 중간-가벼움 단계의 볶음도로 뽑혀나오는 꽃향기가 뭔가 거북하게 느껴진다. 내가 선호하는 것은 그 꽃향기를 품은 원두를 강하게 볶아 추출하는 꿀향과 캐러멜향이다. 보통은 그렇게 커피콩을 태우면 커피콩의 보관기간이 짧아지기 때문에 카페에선, 특히 요즘같은 불황에는 다크로스팅을 하지 않는 편이다. 어쨌든.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로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게 이번 여행의 수확이랄까. 다행히 제주도에서 매일 내려먹을 원두를 500g 이상 넉넉히 챙겨왔다.

그런데 내입맛에 맞지 않았던 커피와는 달리 점심은 눈부시게 훌륭했다. 상주 은모래해변에서 독일마을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한식당인데 위치는 꽤나 쌩뚱맞다. 1인분에 15000원인 해물돌솥밥을 판다. 만원짜리 해물파전을 곁들이로 시켰는데, 쪽파도 해물도 그득한 것이 그 역시 훌륭했다. 밥을 누룽지가 생기도록 그슬리지 않아 불향이 나지 않는 것이 좀 아쉽다고 할까. 그것말고는 소담한 반찬들도 깔끔하니 맛있고, 무엇보다도 양이 굉장히 많았다. 둘이서 점심으로 4만원을 지출한 것이니 원체 저렴하진 않은 식사였지만 맛난 음식들로만 배를 가득 채웠으니, 이정도면 남해에 굳이 찾아와서 먹을만한 밥상이다.


독일마을로 향하는 길에 스카이웨이도 있고 쭉 뻗은 해안도로도 있지만 날씨가 몹시 흐려 우린 반대편으로 발을 돌렸다. 남해의 3시 방향에서 9시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니 정반대 방향이지만 숙소도 남해군청 위쪽인지라 별다른 수가 없다. 오늘이 남해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니 지금껏 가보지 않은 코스만 들르고 숙소로 향할 참이었다.

남해에서 가장 서쪽, 구미동해변의 한 카페에서 <이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다>를 마쳤다. 바깥양반이 옆에서 칼라링을 하고 있어서 중간 중간 색연필을 사각이기도 하고, 학교에서 생기부와 교복 등 여러 업무 연락이 와 다소 정신이 없었지만 한 2주간 붙들고 있던 책을 뒤늦게 마쳐 속이 가뿐했다.


이 책보다 먼저 <가난이 조종되고 있다>를 읽었다. 한권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미국의 빈곤문제를 인식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분석해나가고 다른 한권은 정치권력의 구성원으로서 주관적 경험과 주요 쟁점을 바탕으로 빈곤에 맞선 투쟁을 이야기한다. 왜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나라에서 순식간에 야만과 폭력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는지, 두 책을 비교하며 읽으면 매우 풍성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세번째 책이 있고 그것이 원서라는 점인데...<Upswing>(상향곡선)이라는 제목이다. 분량은 역시 380여 페이지. 미국이 대공황 이전의 야만적 자본주의의 시대로부터 어떻게 벗어나 전후 황금기를 이끌었는지를 검증하고, 바로 지금이 그런 반전의 모멘텀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는 책이다. 앞선 두권과는 다른 관점에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펴고 빼곡한 알파벳을 보고 한숨을 푹 쉬고, 읽기 시작했다. 한장 한장 읽다보면 다 읽겠지. 여행을 위해 챙겨온 책이 많다. 빨리 읽어넘기고 다음 책을 읽어야 여러권을 챙겨온 보람이 있다. 봄에는 대학원 공부가 시작되니, 그에 앞서 영어독해력을 끌어올리는데에도 큰 도움은, 되어줄 것이다.


셋째날의 일정은 칼라링이 끝난 뒤에 마무리되었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밖에 오래 있지 말고 해가 넘어가기 전에 숙소로 가기로 했다. 바로 옆 수제버거집에서 테이크아웃을 해서 출발했다. 10시 반에 숙소에서 나와서 5시반에 다시 다음 숙소로 가는 짧은 일정인데, 또 그중에 절반은 길 위에서 지그재그 산을 넘으며 보냈으니 참으로 비효율적이기만 한 하루다. 숙소에 와선 첫날의 일기와 미뤄둔 공부 이야기를 쓰느라 오히려 더 바빴으니, 참 이거, 힐링스럽지 못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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