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 여행의 시작은 광주에서

나와 바깥양반의 제주 반달살이 / 광주

by 공존

"망월동을 가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데."

"아냐 이거면 충분해 내가 역사교사도 아니고."

"흐음."


나는 바깥양반에게 구 전남도청에 대해 말해주며 넌지시 망월동에 갈 의사를 물었고, 바깥양반은 슬쩍 거절했다. 하기사 한 겨울에 간들. 물론 5월에 갔다가 길고 긴 차량의 행렬에 먼저 그 무게감을 먼저 느끼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날이 썩 춥고 우리의 여행은 오늘 아침메 막 시작했다. 바깥양반과 광주에는 처음 온 것인데 하필 시기도 날씨도 궂다. 우리는 구 도청을 휘 돌아보고 식당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가파른 바람이 금남로 이곳저곳에 걸린 플랭카드를 쥐어짜듯 뒤흔들어 파르르 나부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는 망월동 갔었어?"

"여러번 갔지."

"으응."


여러번. 이라고까지 부를만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재미있는 기억은 2005년, 군대에 입대하기 불과 2주 전이었다. 지금은 이우학교에 몸담고 계신 친한 형님께서 잠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일하실 때였다. 군입대를 코 앞에 둔 나를 부르시더니 5.18기념 초등학생 역사탐방 프로그램을 맡으셨으니 스탭으로 함께 참여해달라고 요청을 하셨다. 두어번 형과 회의와 잔업, 그리고 행사 당일 광주에서 프로그램을 하고 올라와, 몇일 뒤에 삭발을 했다.


그랬던 광주에 오늘 오게 된 것은, 그야말로 별 다른 이유가 있어선 아니었다. 바깥양반과 길게 여행을 계획하고 남도로 향했는데, 군산이나 전주는 두어번씩은 가보았기에 바깥양반이 한번도 와본 적 없는 광주가 중간기착지로 정해진 것이다. 광주에서 1박을 하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선 배부터 채워야지. 광주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식사가 뭐가 있을까 하다가 충장로에 있는 유명한 백반집에 들렀다. 구 전남도청에서는 한참 걸어가는 거리였는데 덕분에 유명하다는 궁전제과에도 들를 수 있었다.

"할인하는데. 골라봐. 제육볶음을 시킬까 낙지볶음을 시킬까."

"난 낙지는 별로인데."

"그럼 제육으로 시켜?"

"아냐 일단 반찬 깔리는 거 보고."


친구와 10년 전에 보성 녹차밭을 가기 위해 새벽에 광주에서 고속버스를 갈아탄 일이 있다. 그때 허기가 져서 터미널의 구내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먹는데, 반찬이 대여섯가지가 깔린 데다가 깜짝 놀라게 하나하나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이웃한 나주에 비해서 향토색은 적으나 어딜 가서 뭘 먹더라도 반찬은 걸지게, 음식은 맛깔나게 먹을 수 있는 곳이니 오늘의 점심 식사도 그랬다. 1인분에 9천원인 식사인데 반찬이 열개가 넘게 깔린 데다가, 하나하나 맛이 빼어나다. 가지 볶음을 한 조각 먹고 역시 깜짝 놀랄만큼 맛있어서, 바쁘게 이 반찬 저 반찬으로 젓가락을 옮겼다. 갈치포 무침이 있길래 바깥양반 앞으로 접시를 끌어다주었다.


"다 나온 거예요?"

"네 이제 동그랑땡 두조각 나와요."

"음 그럼 낙지볶음 추가해주세요."

"네 그럼 천천히 드시고 계세요."


원래는 15000원을 받는 낙지볶음이 코로나로 인해 소비자들에게도 타격이 가자 11000원으로 할인하고 있었다. 제육볶음이야 언제 먹어도 먹지만 낙지볶음은 바깥양반이 좋아하지 않아 먹는 일이 드물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만원어치 서너마리 사면 그걸 다 해치우는 게 또 일거리다. 오늘처럼 저렴하게 사먹을 수 있을 때가 기회렷다, 하고 나는 이미 허겁지겁 서너숟가락이나 집어삼킨 참에, 두번째로 반찬들을 나르러 오신 아주머니께 말씀드렸다. 그렇게 추가로 시킨 낙지볶음도, 다른 반찬들과 마찬가지로 깔끔하니 먹기 좋았다.


서울에선 혹한과 폭설이 동시에 예고된 상태였다. 이왕이면 금남로를 죽 따라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만 대로변엔 칼바람이 부는 터라 골목길로 종종걸음을 치며 다시 주차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어딜 들러서 구경하기도 어렵다. 구 전남도청의 전시관들도 오픈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안전이 우선이다.


"숙소는 여기서 가까워?"

"응. 근처에 5.18 기념공원도 있고 무슨 호수공원도 있대. 가서 좀 쉬다가 나와서 산책 하고 저녁 먹으러 가자."


숙소인 상무지구까지 기아자동차 공장 앞 대로를 죽 가로질러 갔다. 그런데 두가지 변수가 생겨서 그날 저녁의 계획은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번째 문제는 차에 사소한 문제가 생겨 잠시 정비소에 들러야 했던 것이다. 귀중한 시간을 한시간 가까이 소비했다. 두번째 문제는, 추워도 너무 춥다는 것이었다. 에어비앤비로 구한 멋들어진 오피스텔에서 한시간 남짓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공원으로 향하기 위해 나섰는데, 광주시청 앞길엔 웬 횡당보도는 그리 많고 해가 저문뒤의 바람은 왜 그리 차던지. 눈 앞에 서너블럭 떨어진 5.18 기념공원이 보이는데도 거기까지 반도 못가서 되돌아왔다.


"우리 오늘만 과식하는 일정이지?"

"응. 광주에 하루 딱 있는데 그래도 유명한 건 다 먹어봐야지."

"...아니 그래도 이따가 꼭 통닭을 시켜야겠어?"

"저번에 통닭 못먹어서 땡겨. 배부르면 좀만 먹고 남기면 되지."

"하아...아니 치킨도 아니고 통닭인데 그걸 좀만 먹고 남기는 게 가능한 일이냐고..."


굳이 산책을 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광주에서 단 하루를 머무르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딱 오늘만 야식을 먹기로 했다. 기름기 가득한 통닭으로. 그래서 나는 그날 오랜만에, 심지어 남의 집에서, 홈트레이닝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식에 앞서 먹은 저녁 메뉴 나주곰탕은 정말로 정말로 훌륭했다. 숙소로 잡은 광주 상무지구에서는 차로 불과 35분. 바깥양반도 곰탕을 퍽 좋아해서 두어달에 한번씩은 함께 하동관에서 먹곤 한다. 최근엔 1인분을 포장해서 둘이 나눠먹었다. 나주곰탕으로 향하면서 우리의 화제는 "과연 하동관을 넘어설 수 있을까?"였는데, 나는 첫 술을 뜨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그 깔끔하면서도 순박한 맛이라니. 고기와 내장으로 함께 육수를 내서 감칠맛이 강한 하동관과는 확 다른 스타일이었다. 순수한 쇠고기 국물, 그런데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균형잡힌 맛이다.


"야 나 이거 정체성이 흔들리는 맛인데."

"순대국 버려?"

"아 고민된다. 넌 어때?"

"난 여기도 맛있는데...하동관이랑은 스타일이 달라서 비교가 좀."

"아 진짜? 난 여기가 나은 것 같은데."


고기는 푸짐, 소머리고기인듯 비계를 따로 한접시 내어준다. 퍼먹어도 퍼먹어도 계속 나오는 고기를 그래도 반쯤 비운 뒤에 비계를 국에 후루룩 말았다. 쫄깃한 소 비곗살이 국물의 온기에 부드러워져 눅진하게 혀에 감긴다. 햐.


"포항 거기도 생각난다. 거기도 맛있었는데."

"응 근데 여기가 냄새가 안나."


포항에서도 유명한 소머리국밥이 있는데, 시장통에 자리잡은 국밥집과 다르게 나주곰탕은 원래부터 유서깊은 나주지역에서 먹던 음식이니 다를 수 밖에. 깍두기와 김치까지 맛이 좋아, 나는 내 사발을 다 비우고 바깥양반이 남긴 곰탕도 싹싹 비웠다. 점심도 백반집 반찬을 모두 싹싹 비울 정도로 과식을 했는데 저녁까지 이래서야, 벌써 걱정이 되지만 여행은 길고 추운 날씨는 곧 풀릴 거란 기대도 있었다. 코로나 감염자 수치도 확확 내려가고 있어 산책을 할 때도 조금씩 마음이 놓아질듯했다. 곰탕골목 일대의 옛길을 잠시 걷다가 차에 올랐다. 그리고 정말로, 통닭을 시켰다.


여행의 첫날인데 온통 과식이다.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해외여행의 빠듯한 예산에 하루종일 걸어가며, 쫄쫄 굶어가며 샌드위치로 한끼 떼우던 날들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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