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칠일 : 비오는 날엔 바라나시 책골목에서 카잔자키스를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제주시내

by 공존

지난밤부터 비바람이 쉼 없이 이어졌다. 수달이는 오늘의 여행 일정을 온전히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날씨에 영향을 과도하게 받는 그 성격 때문에 나는 같이 놀러다니며 스트레스를 제법 받는다. 흐리면 어떻고 비가 오면 어때. 비가 오는 날엔 비 내리는 모습이, 구름 낀 날에는 그 거리의 풍경이 또 아름다운 법이거늘. 우중충한 하늘이 내내 주인공들과 노래를 뒤덮고 있는 영화 <원스>도 있는걸. 혹은 화창한 하늘 아래 펼쳐지는 <이터널 선샤인>의 이야기라면 또 얼마나 웃길 것이며.


그런고로 오늘 나는 비를 만끽하기 위해 수달이를 이끌고 바라나시 책골목에 들렀다. 그것은 우연한 발견.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 느즈막히 점심을 먹으러 왔는데, 헛걸음을 했다. 재료소진을 탁 걸어놓고 직원분들이 모두 식사중이시다. 한 30분만 일찍 왔어도 식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을. 어쩔 수 없다. 내일 또 제주시에는 5일장을 구경하러 올 예정이다. 내일은 꼭 먹기로 하고, 근처에서 또 이름난 맛집을 찾아서 식사를 후다닥 마쳤다.


"여기 근처에도 괜찮은 데 있는 거 같아. 걸어서도 갈 수 있어"

"어 그럼 가봐."


평소 같으면 절대로 이런 양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도에 온지 벌써 열흘이 넘어가고 그간에 수달이는 가고픈 카페며 맛집 리스트를 마음껏 채웠다. 그래서 이제는 하루하루 즉흥적으로 일정을 정한다. 오늘처럼 맛집을 찾았다가 허탕을 치더라도 금방 다른 장소를 찾아내고, 평소라면 택하지 않을 장소들로만 하루를 가득 채우는 일도 가능해진다. 그렇게 찾아온 곳은 바라나시 책골목.

북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작은 구옥이 인도와 히피의 감수성으로 물씬 채색되어 있다. 스피커에선 진짜로 인도음악이 흐르고, 한쪽 서가는 오로지 인도 관련 도서들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닌 것이 한켠 니체와 하이데거, 융이 있고, 다른 편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철학이 한줄 가득, 또 다른 편엔 하루키의 서적만 이십여권. 북카페는 타겟층에 따라 서가가 확연히 구분되는 법인데 이곳은 40대 중후반 정도 되어보이는 사장님의 독서이력과 그 깊이를 보여주듯, 깊이 있는 도서로 한가득이다.


우리가 들어갔을 땐 다섯 구역으로 구분된 공간이 모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큰 좌식 테이블에 잠시 앉아있다가 주방과 통하는 창가자리에 비어서 그리로 옮겼다. 운이 좋다. 덕분에 편안히 책을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서가를 한바퀴 둘러보며 어떤 책을 잡아야 짧은 시간 안에 의미있는 독서가 가능할까 고민을 하다가 카잔자키스를 발견하고 더 고민하지 않고 책을 집었다. 야 반갑다.

작년 이맘때 "한해에 한권은 카잔차키스를 읽기로 했다."고 감상문을 썼는데 그 다짐은 지난해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학원 시험과 우리 가정에 닥친 일 때문이다. 5월부터 다시 대학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래서 한달은 텝스, 나머지 4개월은 교육학 시험을 준비하니 당연히 다른 책을 읽을 겨를은 없었다. 시험을 보고 나서는 그간 소외시킨 수달이와 시간을 보내고, 또 그 연말엔 생기부 업무로 낮이고 밤이고 바빠 책을 펴지 못했다. 지금? 지금은, 어느덧 코 앞으로 다가온 대학원 입학의 부담에 차로 실어온 책만 열권이다. 언제 카잔자키스를 읽나...하고 고민만 하고 있던 차다. 이런 것도 다 운명이려니. 나는 고려원이라는 출판사명을 보고 가슴이 따스해짐을 느끼며 책장을 폈다. 저주받을지어다, 죽음의 신은 찾아와서, 니코스를 꺾어버렸다.

인생 책과 인생 작가가 있다는 것, 그 사람의 책이 고전의 반열이라서 읽는 것만으로 허세를 부릴 수 있다는 점, 또 20대부터 50대까지 내가 평생에 걸쳐 읽기에 충분한 책들을 그가 써냈다는 것은 독자로서 팬으로서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열린책들이 출판한 전집이 서른권이니 남은 그의 책들을 천천히 읽다보면 그가 죽을 나이가 될 때까지 읽을 수 있겠다. 원래 지난해에 읽기로 했다가 오늘 우연히 만나 펴게 된 <영혼의 자서전> 역시, 늘 읽던 익숙한 문체로 날 반긴다. 대지, 목소리, 움뛰는 피의 뜨거움과 가슴에 응어리진 열망. 이곳에 오길 잘했다.


바라나시 책골목은 온통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오늘 하루의 클라이막스였다면 윈드스톤은 훌륭한 전초전이었달까. 오늘의 첫 코스로, 어제 들른 유림위드북스는 아니었지만 수달이의 취향을 반영한 만족할만한 선택이었다. 아주 소량의 장서를 판매하기도 하면서 마당이 갖춰져 있고,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슬레이트 천장이라는 점이다. 빗소리가 책을 읽는 내내 천장을 두드린다. 어려운 책을 읽고 있는 와중이라 책장이 술술 넘어가진 않았지만 이렇게 즐거운 시간이라니, 비가 오늘 날엔 이곳보다 편안한 곳이 또 있을까.


이곳도 바라나시 책골목처럼 올레길에 면하고 있어 손님이 퍽이나 붐이고, 그 덕분에 대화하는 소리가 꽤나 가게를 울리게 함에도 그 빗소리, 음악소리 덕분에 충분히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좋은 시작이야. 책만이 아니라 글을 쓰기에도, 비오는 날 뿐 아니라 맑은 하늘일 때에도 더욱 좋겠지. 딱 하나, 책만 좀 더 많았으면. 그러니까 북카페는 타겟층의 도서취향이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윈드스톤에서 시간을 퍽 오래 보낸 뒤에 일어났다.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서점을 한군데 들었는데 이곳만 들르지 않았어도 점심 식당을 허탕치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동네책방은 주인의 독서취향을 알 수 있다는 점이 즐겁다. 미래책방은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물씬, 진보 사상과 페미니즘의 색채가 뚜렷했다. 버니지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보여 수달이에게 집어줬더니 거절한다. 참 책 취향 안맞아. 대신에 제주도에 와서는 내내 시를 좀 읽고 싶다고 하시더니만 시집을 하나 집었다. 나는 재밌어 보이는 책을 하나 집고서 내내 고민하다가 내려놓았다. 내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논문이란 말이야."

"책도 많이 싸왔구만. 볼 거 없으면 굳이 사지마."


숙소로 돌아오기 전에 들른 마지막 서점. 중대형 사이즈에 책을 읽고 갈 수 있게 충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윈드스톤처럼 빗소리가 토동토동 들려오거나, 바라나시 책골목처럼 문향이 물씬 풍기는 공간은 아니다. 제주도에 이런 공간도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수달이가 고른 다른 책을 쥐고 계산대로 향했다.


내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그 책의 참고문헌들이다.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한번 손에 들려줬다가 다시 내려놨다. 고심하다 연말에 샀으니, 집에 가서 짬을 내서 읽어야겠다. 읽기로 해두고 사지 않은 책이 뭐가 있더라 하며 계산대로 향하던 발걸음을 잠시 돌려 마지막으로 한바퀴 둘러보다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에서>를 골랐다. 두권 다 진즉에 읽어뒀어야 할 책인데 말이지. 특히, <노인과 바다>는 대체 이 짧은 분량으로 어떻게 노벨상을 탔는지 정말 궁금하기도 하다.

"어릴 때 우리 집은 매번 엄마가 솥에 밥을 지었어."

"응."

"전기밥솥이 없었거든."

"응?"


수달이가 뭔 소리인가 하며 날 바라봤다. 여긴 도민들이 주로 찾는 현지인 맛집 누룽지 식당. 고등어조림에 돌솥밥은 하나만 시켜, 누룽지를 긁어먹으며 나는 말했다.


"88년 지나야...우리집에 어릴 땐 비디오도 없었어. 다들 없었거든. 90년 쯤 되어서 비디오도 나오고 했을걸?"

"아아."


수달이와 나의 터울은 네살이지만 88년을 기점으로 상전벽해로 달라지는 삶의 풍경에 대한 기억은 크게 다르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 비디오 플레이어 없이 살던 우리집과, 훨씬 어린 시절부터 비디오를 보고 자란 수달이의 환경이라거나, 역시 그 즈음부터 전기밥솥을 사용하게 된 우리집. 그래서 어린 시절에 엄마는 항상 솥에 밥을 해 우리 가족과 서점 직원들의 밥상을 차렸다. 매 끼니마다 누룽지와 숭늉을 먹었다.


그래서 나에게 숭늉은 어린시절의 기억이긴 하지만, 가난과 고난의 기억은 아니다. 엄마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양반도 아니고 당시엔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부모님은 젊으셨고, 커나가는 우리가 있었다. 전기밥솥이 없어도 탁탁 솥밥을 끼니마다 해내며 거기에 숭늉을 끓여주시던 엄마의 삶, 그리고 솥밥과 누룽지 숭늉이 외식의 카테고리에 묶이는 요즈음의 삶. 편의를 택한 댓가를, 나는 살고 있을까.


"아무래도 욕구불만이 심각해진다. 집에 가면 나, 하고 싶은 요리 다 할거야. 튀김도 김치찌개도."

"좋징."


그렇게 말을 하고 나는 빠에야 레시피를 검색했다. 수달이가 계산을 하고 돌아올 떄까지 나는 내내 숭늉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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