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모슬포, 마라도, 가파도
문제는.
나는 이 카페덕후 수달이보다 훨씬 커피와 차를 좋아하고 따라서 내 나름의 명확한 카페 취향과 주관이 있다는 것이다. 자리가 편안해야 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어야 하며 사람은 많지 않아야 한다. 당연히 커피가 맛이 있어야 하고. 이런 여러 나의 취향은 수달이의 카페 취향과는 차이가 많지만 나는 일상적으로 일방적으로 양보를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다섯번에 한번쯤 내가 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카페에 가게 된다.
오늘은 내가 하나 고를 기회가 생겼다. 평소에도 여러곳을 찾아서 수달이와 상의를 하지만 그대로 타협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우연찮게 일정 중에 여유가 생겨 나의 제안이 그대로 수용되었다. 지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스크롤을 하다가 모슬포에서 송악산 방향으로 단 3분만 달려가면 되는 곳에 자리한 카페를 찾아냈고, 주변에 아무런 번화가가 없다는 점에 더욱 이끌렸다. 나는 확신에 가득 차 차를 몰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생카페를 발견했다. 사일리커피.
카페에 들어가는 순간 달콤한 계피향에 먼저 압도된다. 그래서 조금 전에 점심을 꽤나 배부르게 먹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고민 없이 케이크를 구매하게 된다. 당근케이크가 막 구워지고 있는 내음이다. 내가 수달이에게 당근케이크를 보챘는데 그건 과한 것 같다며 손바닥만한 초코쿠키를 고른다. 이거라고 당근케이크보다 과하지 않은 것 같진 않다. 게다가 아몬드칩까지 박혀있는걸.
어쨌든, 계피향에 매혹되어 카페를 둘러보니 후면으로는 드넓은 평야와 지평선, 오름, 산방산, 날씨가 좋을 경우 한라산까지 감상할 수 있는, 두 창이 맞닿은 모서리 자리가 있다. 여기에 앉아도 너무 좋을 것 같은데 반대편 해안 방향으론 데크와 테라스가 갖춰져 있고, 실내의 통유리에서나 바깥 데크 자리에서나 왼편의 송악산 절벽과 오른편으로 이국적인 해안선을 볼 수 있다. 이런 인생카페라니. 너무 좋잖아. 게다가 산방산과 모슬포 사이에 낀 한적한 동네라서 주변에 아무 인파도 없다니. 더더욱 좋잖아.
"수달이 넌 먼저 가라 난 여기서 오래 있다가 가야겠다."
"푸훗."
"진짜야. 내일 나 데리러 와."
"아 뭐래 진짜."
정말 좋은 점은 커피도 맛이 괜찮았다는 것이다. 에티오피아 계통의 가벼운 과일향이 느껴지는 원두다. 달콤하며 향기롭다. 완벽한 계피향 완벽한 온기와 완벽한 풍경. 저 멀리 가파도가 보인다.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 이런 카페를 찾고, 잠시지만 휴식을 취할 수 있다니. 이 한 순간이 바로 우리가 여행을 오는 이유인 걸까.
여행. 여행의 딜레마는 아침밥상이다. 어젯밤 나는 수달이와 꽤나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장기 여행에서는 식사 비용이 탄력성이 크기 때문에 아낄 수 있는 구석은 아껴야 한다. 그래서 한달살이를 하는 대개의 경우처럼 우리도 아침은 집에서 차려먹고 나간다. 그런데 역시 합리적인 수준에서 구하게 되는 일반적인 숙소는 전기화구만을 갖추고 있으며 화력도 신통치 않다. 우리도 그렇다. 게다가 각종 조미료도, 김치나 마늘 같은 부재료도 챙겨놓지 못하니(집 냉장고에 쌓인 게 김치인데 굳이 여기서 사서 먹을 이유가!) 열정과 역량을 갖춘 나와 같은 집밥러도 여행숙소의 현실적인 제약에 걸려서 제대로 된 식사를 꾸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점은 수달이도 마찬가지로 동의하고 있다. 나보단 집밥에 대한 집착이 크지 않은 수달이의 경우는 대충 먹자는 투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정말로 대충 빵을 차려주면 빵은 지겹다. 라면을 끓일라치면 또 라면이냐 소리를 자기가 한다. 앞뒤가 안맞아. 그런데다가 숙소가 조금 연식이 있는 편이라 식기를 쓰는 것도 꺼림칙해한다. 이리 따지는 것은 많으면서 여행은 꼿꼿히 다니는 그 열정 리스펙하는 바지만, 그게 아침밥의 이런 고민을 해결해주진 못한다. 그래서 어제 스팸과 햇반을 사, 남은 후반전의 아침 식사에 대해 타협을 봤다. 수달이가 가장 좋아하는 스팸. 그것을 벤치마킹해서 최근 시장에 출시된 K햄. 백종원 씨가 <맛남의 광장>에서 햄 개발에 참여하는 것을 보여줘서 구매했는데 상당히 괜찮다. 한두번 더 먹여보면 완전히 수달이의 입맛에서 스팸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다. "수달이"에게 "먹인다"라고 하니 정말로 무슨 애완동물이라도 기르는 기분이구만.
오늘의 우리의 일정은 마라도와 가파도다. 각각 9시 40분부터 11시 50분, 14시부터 16시 20분이라는 가파른 일정으로 두 섬을 둘러보아야 한다. 섬에서 나와 다시 섬으로 들어가는 짧은 간격에 내가 택한 것이 사일리커피였다.
마라도의 첫인상은 낚시꾼들의 섬이라는 것이었다. 50명이 넘는 유람선 승객 중 절반 가량은 낚시하는 인파였다. 다행히 오늘은 파도도 거의 치지 않고 포근하고 맑아 낚시를 하기에는 최상의 날씨인 것 같지만 우와. 정말 낚시에 빠지면 국토 최남단까지 와버리는구나. 새삼 낚시라는 취미의 유별남에 놀랐다.
2시간이면 정말로 여유있게 구석구석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섬. 분교가 있을 정도로 그래도 인구는 유지되고 있었으나 학교는 신입생을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있다. 성수기가 아닌 덕분에 중국집이 즐비한 마을길을 우린 평안히 걸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하염없이 조용히 걷기 좋았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바다 건너로 우뚝 솟은 산방산이 보인다.
마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이채로운 풍경이 있었다. 바다에 둥근 바위가 많다는 것이다. 제주도 본섬이나 다른 유인도 같으면 둥글게 잘 다듬어진 현무암들은 모두 빠짐없이 주민들 손에 옮겨져 석재로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라도는 워낙 작은 섬이니 그 많은 바위들이 소진되지 않은 것이다. 그 덕에 바닷가를 가득 메운 둥그런, 쿠션 혹은 책상 사이즈의 몽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섬 안쪽으론 드넓은 초원에 중앙의 갈대밭. 이곳에 어떻게 사람들이 살았을까 싶다가도, 섬의 동쪽 바다에 빼곡히 모여든 어선들을 보고 바다의 선물이 가져다준 삶의 기반을 짐작한다. 섬은 지금 등대 재건축으로 한창이었다.
짜장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비싸다. 8000원. 짬뽕은 12,000원이다. 그래서 짬뽕은 맛에 대한 기대가 없기에 우린 짜장면만 둘을 시켰다. 맛없는 짜장면으로라도 배를 떼우고자 할 때 시켜먹을 수 있는 가격을 5천원으로 잡는다고 치면 마라도의 이 짜장면은, 글쎄. 딱히 비싼 가격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수입 냉동 오징어라고 할지라도 꾸밈새는 꾸밈새고 톳과 완두콩, 짜장소스에 들어간 당근까지 부재료가 나쁘지 않다. 마라도에서 먹는 관광상품임을 감안하면 플러스된 3천원의 비용은 납득 가능한 선이다. 다만 어쩌다 한번 들르게 되는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방송을 탄 유명한 식당 외엔 딱히 찾아갈 메리트가 없다는 게 문제다.
섬을 돌다 보니 해녀의집이 있어 수조에 해산물을 가득 채워놓은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왕이면 마라도에서는 짜장면보단 그런 해녀의집 모둠회를 먹는 게 어떨까 싶은데 그 역시, 어쩌다 한번 오게 되는 여행객으로선 택하기 어려운 문제다. 국토 최남단에서 먹는 짜장면이라는 메리트를 버리고 제주도 어딜 가서나 먹을 수 있는 모둠해산물을 먹자고 하면...일단 수달이의 경우는 대경실색할 일.
이어서 운진항을 다시 들러 오게된 가파도는 마라도의 세배 정도는 되는 면적에 매년 단 한명의 졸업생일지라도 제대로 된 초등학교가 있고 주민도 훨씬 많은 섬이다. 청보리가 관광상품이 되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수 없이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섬이 되었다. 마라도와 가파도를 하루에 모두 둘러보려면 단 두시간만 머물 수 있다. 그런데 마라도보단 훨씬 볼거리가 많아, 네시간은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청보리를 보러 올 날을 기약하며 반바퀴 정도를 천천히 돌았다.
청보리밭이 흐드러지진 않았지만 1월에는 갓 심어진 청보리 순이 밭을 가득 메우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중앙길 걸어서 민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이내 양쪽으로 탁 트인 보리밭이 죽 이어져 있고, 바깥으론 해안산책로가, 그리고 대각선으론 올레길이 가로지른다. 그래서 여행자로선 중앙길, 올레길, 해안산책로 세 경로를 잘 고심해서 산책로를 짜야한다. 우린 자전거를 탈까 하다가 굳이 그렇게 급하게 둘러볼 것도 아닌 기분이 들어 천천히 섬을 훑었다.
말 그대로 걸어도 걸어도 편안하고 좋은 곳. 마라도도 충분히 둘러볼만 하지만 가파도의 이 풍경에 비하긴 어렵다. 인적이 드문 1월에, 오늘처럼 포근한 날에 찾아온 것이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이 평온한 풍경을 성수기에 온다면 보리싹보다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이런 평온한 감정이 구름처럼 흩어져버릴 것이다. 섬의 여유를 가득 품고 담벼락 위에서 잠들어있는 고양이처럼, 우린 느리게 느리게 두시간의 여유를 만끽했다.
섬의 남단 하동에서는 이미 서쪽으로 넘어간 해를 피해 반대편 동쪽 해안산책로를 택했다. 오후의 동편 하늘은 이보다 맑을 수 없는 투명함으로 빛나고 건너편으로 제주도 본섬의 해안선을 모슬포에서 화순금모래해변, 저 멀리 중문까지 충분히 관측할 수 있다. 그때쯤이 되어 뱃시간이 임박해오고, 우리는 짧은 두시간의 산책을 아쉬워하며 섬을 벗어난다. 봄에 보리가 흐드러지면, 그처럼 흐드러지는 인파에 섞여 우리도 이곳에 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말이다. 그때가 되면 사일리카페엔 사람도 더 많겠지만, 그래도 그곳에도 꼭 방문은 할 것이다. 아니, 당장 내일 가도 되지.
반달살이 후반전 이틀째에- 제주도에 온지 일주일간 열심히 좌표를 찍고 다니시던 수달이는 가고픈 카페와 식당을 여럿 가서 열정이 방전되어 버렸다. 그리고 두군데 섬을 도는 동안 쿠키, 청보리핫도그, 청보리아이스크림에 청보리미숫가루라떼를 드셔서 배가 퍽 부르시다. 그래서 저녁을 내가 고를 수 있게 되었고, 나는 수달이를 끌고 한시간 정도 더 산책을 한 끝에 제주 곶자왈 인근 중산간 숲지대를 밀어내버리고 들어서 있는 제주도영어교육 도시의 한 조그마한 식당을 골라 늦은 시간 차를 몰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건 뭐랄까. 철학 없는 도시계획이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를 병들게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공간이랄까. 해외로 유출되는 유학수요를 잡는다고 만든 국제학교들은 귀족학교가 되어 연간 수천만원의 학비를 빨아들이면서도 학생이 부족해 만성적자에 시달린다 하고, 그런 곳에 고급빌라는 수도 없이 지어서 강남 땅부자들의 투자처가 되어 있는데다가, 그 아파트들의 브랜드는 또 얼마나 공허한지 모르겠다. 식당을 가다가 영어로 "사교육"이라고 빌라 단지 정문에 붙여놓은 것을 보고 나는 경악스런 신음과 허탈한 실소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어떻게 저런 글귀를 단지 정문에 걸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 이곳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아이들의 정서와 지성은 어떤 형태를 갖추게 될까.
식당 뒷자리에 앉은 세명의 어린 청소년들은 각자 집안 이야기와 어느 집의 이혼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는 식당 안에선 잠자코 있다가, 수달이가 왜 저 어린애들이 밥 먹는 내내 집안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꺼내자 천천히 이 망가진 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