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애월, 한림
"수달아 돌고래 돌고래!"
"어? 어어 진짜?"
먼저 일어나 거실에 앉아있던 내가 창밖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아직 잠들어 있던 수달이가 두 팔 두다리를 모두 동원해 후다닥 창가로 와서 졸린 눈을 비비더니 내 안경을 빼앗아 썼다. 이른 아침의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가까운 바다에서 돌고래 여러 마리가 수면까지 올라와 헤엄을 치고 있다. 숙소에서 아침마다 창밖을 바라본지 일주일만에 마침매 목격하게 된 돌고래로 제주도 한달살이 버킷리스트가 채워졌다.
"찍을 생각은 하지마. 저거 멀어서 찍어도 안나와."
"응."
망원렌즈라도 적당히 달린 SLR이 있었다면 바다로 달려갈 텐데 이 장면을 인증샷으로 남기지 못해 아쉽다. 대신에 돌고래들은 5분 가량 오래 오래 수면에서 놀다가 모습을 감췄다. 일주일의 기다림이 아쉽지 않은만큼은 힘찬 모습을 바라봤다. 어떤 조건일 때 수면으로 올라와서 헤엄치는 걸까 궁금하다. 아직 우리 숙소에선 5일 더 머무니, 또 볼 수 있을까. 그걸 위해서라도 당장 어디 가서 망원렌즈라도 하나 사둘까 생각도 든다. 거실에 앉아서 돌고래를 보는 게 흔한 일일 리가 없으니까.
아침 여덟시반이라 대정 5일장은 한산하다. 돌고래는 돌고래고 아침을 사러 일찍 숙소를 나왔다.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느라 매대에 물품을 올리는 상인들. 떡볶이집의 일가족은 튀김조와 떡볶이조가 모두 모여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식사를 방해할까봐 슬쩍 지나쳐서 우선 순대를 샀다. 떡, 튀, 순으로. 제주도에서는 당면과 찹살, 야채가 두루 섞인 순대를 쉽게 구매할 수 있다. 그러나 5천원 단위로 파는 게 양이 많으니 오늘까지만. 순대를 받아 떡볶이 방향으로 다시 몸을 돌리니 아주머니 한분이 잘 익은 떡볶이 앞에서 장사 채비를 하고 계시다. 튀김과 꽈배기까지 받아서 냉큼 숙소로 간다.
5일장의 장점 중 하나는 아침 9시가 되기 전에도 이렇게 제대로 된 떡볶이를 사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제 두둑히 아침을 차려 먹었으니 오늘 또 햇반을 돌리기도 그렇고 해서 간단하게 시작.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수달이가 내게 떡볶이를 만들어달라고 한지가 몇개월이나 된다. 즉석떡볶이를 한번 배달을 해서 조리해서 줬더니만 그 맛이 마음에 들었던지, 집에서 떡볶이를 먹을라 치면, 배달을 하거나 포장을 해 온다. 당연히 내가 만든 것보다야 그런 게 맛있겠지. 수달이는 밀떡, 나는 쌀떡 중에서도 가래떡으로 만든 왕떡볶이파다. 대정 5일장 떡볶이는 수달이보다 내 취향에 맞다. 다음 목표인 제주시 5일장의 떡볶이는 어떨까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마쳤다.
느즈막히 숙소를 나와 한경면으로 향했다. 내 목적은 당초에 북카페였는데 수달이가 "어 한경면에 가고 싶은 카페 있었어!"라며 넙죽 받는다. 아니 왜요...왜 내가 고른 한경면 카페 가로채...라며 항변을 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풀 죽은 목소리로 "거기 갈거야?"라며 묻는 수달이에게 나는 카페를 양보했다. 대신에 북카페에 먼저 잠깐만 들렀는데...아 여기 좋다. 누워서 읽다 마시다 잠들며 고이고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카페였다. 사람에게 엉겨붙는데 두려움이 없는 페르시안 고양이도 한마리 있고 사장님께서 나긋하고 푸근한 목소리로 안내를 해주신다. 사장님께는 "잠시 한군데만 들렀다 올게요."라고 약조하고 QR코드 인증까지 했는데 결국 오늘 가지 못했다. 대신 수달이는 내일은 비가 오니까 내가 가고픈 데로 가라고 한다. 비오는 날이면 저 창에 비치는 풍경이 더욱 차분해지겠지. 그래 오늘 하루 또 내가 져준다.
대신에 수달이가 고른 카페에서 한시간 가량 차를 마시고 나와 올레길을 찾아 또 걷기 시작했다. 어제 두 섬을 돌면서 2만보 가까이 걸었다. 오늘 천천히 나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보를 걷는데 두시간 정도 걸리는 셈인데 그래도 매일 이정도 운동은 하기로 했다. 아침을 또 배부르게 먹었고, 꽈베기도 남아있어 물배를 채운 지금이 딱 걷기 좋은 시간이다. 어느새 하늘은 조금 쾌청해졌고 바람은 불지만 중산간 올레길이라면 충분히 햇볕을 즐기며 걸을만 하다. 언덕을 천천히 올라가며 구릉 사이사이로 그림처럼 그려진 여러 색깔 작물들의 색상을 보고, 저 멀리로 한림의 해안선과 손에 잡힐듯한 비양도의 모습을 감상한다. 찾는 사람이 드문 중산간의 오솔길을 따라 농사를 짓는 도민들의 삶을 슬며시 훔쳐본다. 벌써 또 두시간 가까이나 걸었다. 나는 수달이를 이끌고 골목길 틈새 틈새 없는 걷기코스를 굳이 개척해가며 한낮의 온기를 느꼈다. 1월에도 이런 정취라니.
제주도의 어딜 가나 즐비한 귤밭엔 수확철을 지나 처치곤란이 되어버린 귤들이 그대로 말라붙거나, 낙과가 되어서 바닥에 흩어져 있다가 한켠으로 모아진다. 코로나 때문에 과일 소비도 줄었을 것이다. 판로를 찾지 못한 귤들을 어디서나 본다. 너무나 무심하게 방치되어 있어서 초롱초롱한 귤들이 아름다우면서도 가슴이 시리다. 본래는 저 귤들이 모두 수확되어 있는 풍경만을 보아야 할 터.
귤의 소비가 줄고, 귤산업이 사양화된다는 것은 인구구조변화와 농업의 쇠락을 의미한다. 산책을 마치고 폐교를 아름답게 리모델링해서 카페와 문화공간을 겸하고 있는 명월초등학교를 찾아 저녁을 먹을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국토 최남단 마라도분교는 그 상징성 때문에 어떻게든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가파도는 정말 아름다운 초등학교에 매년 졸업생이 한명. 제주도에는 곳곳에 폐교들이 있다. 심지어 한경면의 조수국민학교는 "국민학교"라는 문패가 그대로 붙어있는 것을 보아 폑교가 20년 이상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광활한, 그러나 척박한 평야에서 귤과 당근, 감자와 생강 등을 기르던 농민들은 도시와 육지로 떠나고 본디 대부분이 농촌지역이던 제주 곳곳의 학교는 폐교가 되어 관광객이 찾는 공간이 되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확장되는 규모는 인구 집중을, 그리고 폐교보다도 훨씬 더 많이 곳곳에 흩어진 폐가들은 변화하는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저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제주도의 역사성을 감지할 수 있다.
어...그런데 피카츄 돈까스는 좀 탐난다.
점심을 꽈배기 하나씩으로 해결하고, 만보 가까이 걸었음에도 카페를 세군데나 들러서 물배를 치워놓았으니 저녁은 고기를 먹기로 했다. 그런데 이 집이 좀 재미있고 유별나다. 서귀포시에 하나, 한림에 하나 있는 뽈살집이라는데 육지에 가면 삼겹살보다도 비싸게 받는 특수부위가, 모두 흑돼지임에도 불구하고, 2/3가격 정도로 저렴하다. 2인분에 29,000원인데 500g정도는 되어보인다. 게다가 저 구성. 목항정(천겹살이라고 이름을 붙인듯), 갈매기살, 뽈살에 꽃살이라는 것도 섞여있다. 먹다보면 수제소세지, 떡갈비, 떡베기가 서비스로 나온다. 게다가 갈탄이 아닌 참숯에, 이걸 봐라, 소금에 핑크소금에 갈치젓에 멜젓. 양파소스 쌈장 등등. 소스만도 일고여덟이다.
"야 신기한데."
"왜?"
"일단 흑돼지인데 싸잖아. 그리고 상차림이랑 서비스도 계속 나오고. 이런 단가가 어떻게 나오지?"
짐작을 해보니, 육지에선 국산돼지의 삼겹살과 목살부터 소비가 되고, 특수부위들은 그것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업체로 팔린다. 특수부위를 파는 고깃집들은 품질 좋은 신선한 고기의 유통경로를 확보해(그래야 삼겹살에 비해서 좋은 맛이 날 테니) 오히려 삼겹살보다 비싼 가격에 판다. 그렇게 하고도 삼겹살의 수요가 감당이 되지 않으니 외국에서 저렴한 삼겹살을 수입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제주도고, 관광객들이 흑돼지 집에 가서 목살과 삼겹살, 이따금 다릿살만을 어마어마하게 소비하고 있으니 소비가 되지 않는 특수부위가 육지에 비해서 물량이 많이 남아돌 수 있겠다. 판로를 개척해 육지에서 흑돼지 특수부위를 판다고 하면 또 줄을 설 것 같긴 하지만, 그건 업자들의 사업성에 대한 판단이 있을 것이고 어쨌든간에, 내 짐작이 맞든 틀리든 저렴한 가격에 진짜 신선하고 질 좋은 특수부위들을 먹을 수 있어서 즐거운 식사였다. 생와사비까지 구비한 걸 나중에야 알았다. 이쯤이면 진짜 고기맛은 토를 달 수 없다는 뜻.
소짜만으로도 둘 다 배는 부르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흑돼지 뼈갈비가 500g에 2만원을 하길래 남기는 것을 감수하고 한번 주문해봤다. 뼈갈비를 어떻게 제공하길래 이렇게 쌀까. 갈비가 그래도 삼겹살만큼의 단가는 나오는 고기일 텐데.
친절하게도 숯을 새로 바꿔주신 뒤에 나온 고기를 받아보니 생갈비 구이용으로 보통 나오는 지방이 많은 부위가 아니라 살코기가 많고 뼈가 작은 부위다. 고기가 세세하게 다듬어진 것을 보니 그나마 있던 지방도 걷어낸 모양이다. 에쿵. 저렴한 이유를 알 법 하군! 하고 거의 살코기만으로 된 갈비를 살라서, 숯을 갈아 급 강력해진 불에 구웠다. 그런데 또, 먹고 보니 색다르다. 갈비를 먹는다는 시각적 만족감에, 일부 쫄깃한 부위가 섞인 가운데 세상 부드럽고 육즙이 넘치는 살코기다. 닭가슴살처럼 퍽퍽한 식감은 전혀 없고 마시멜로 정도 식감이다. 쏠쏠하다. 겉을 바삭하게 구워서 스테이크 처럼 먹으면 딱 괜찮다.
다만 이미 배가 부른 참이기 때문에, 수달이는 진작에 젓가락을 놓았고 나는 소금, 쌈장, 멜젓과 갈치젓 등 다양한 소스에 한두번씩만 찍어보고서 반 정도는 남겼다. 뼈 발라먹는 것도 좋아하는데, 둘 모두 뼈를 잡지 않았다. 기름진 고기만 먹다가 이렇게 탐구생활 하듯 새로운 고기를 즐기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다. 서비스가 워낙 좋아서라도 나중에 생각이 날듯하다. 다만, 돼지 껍데기는 굳이 삶은 것 말고 생으로 제공했어도 좋았을듯한데 말이지.
어제도 무리했고 오늘도 두시간 정도는 걸어서, 저녁 시간에 더 밖에 있지 않고 마트에서 과자만 몇가지 사 숙소로 돌아왔다. 바닥을 따끈히 데우고 귤, 과자, 맥주에 낮에 남기 커피까지 천천히 즐기며 휴식 다운 휴식을 취한다.
수달이는 영화를 보자더니 등을 지지고 누워서 눈 감고 TV보는 척만 열심히 하다가, 내가 아예 불도 TV도 모두 꺼버리자 몇번 뒤척이는 척을 또 하더니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