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일 : 이런 제주도 떡볶이 세끼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제주시내

by 공존

오늘 하루는 일찍 시작되었다. 반달살이 초반에 들렀던 서귀다원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치유의 숲"이란 공간이 괜찮아 보여서 날씨가 좋은 날을 택해 수달이와 나 각자 천원씩의 입장료를 내고 들렀다. 환경보전을 위하여 사전예약을 통해 시간당 탐방객의 수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불과 두 해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 연간 입도객을 통제한다던 논의가 기억이 슬며시 떠오르며 적절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던 여행객들은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까. 또 돌아온다 한들, 그들과 자연과의 공존, 번영과 나눔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을 하며 천천히 낮은 오르막을 올랐다.


아침 열시, 중산간, 제주도이긴 하지만 추운 날이어서 체감온도가 이내 죽죽 떨어졌다. 친구들은 날씨가 어떻갸 춥진 않냐 자주 묻는데 겨울에 와서 보니 춥진 않아도 바람이 불어도 너무 분다 싶을 때가 많다. 산책만 천천히 즐겨도 체력이 훅훅 떨어진다. 따듯하게 입은 것 같은데, 그리고 방금 전까진 땀도 났는데 춥다. 그래서 수달이는 패딩을 입고 와서도 추워했다. 나는 누빔이 조금 들어간 자켓을 입고 목까지 지퍼를 올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날씨면 땡큐지. 티 없이 맑은 하늘이라 왕복 한시간 반 가량의 산책로를 느긋이 걷기 딱 좋다. 10미터 이상 높이의 침엽수림, 수십년은 되어 보이는 동백나무가 우릴 반기며 한껏 신선한 공기를 전해주고 있다. 평탄하게 길게 늘어진 산책로에 연결된 여러 갈래의 오솔길들이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그곳을 모두 훑어봤다간 아마도 오늘도 해장국집을 허탕을 치겠지. 수달이의 고집대로 중앙산책로만을 빠르게 둘러보고 내려왔다. 아깝다. 좀 더 날씨가 좋을 때 아침을 배부르게 먹고 한적히 걸으면 서너시간 너끈히 돌 것 같은데.

어제 허탕친 해장국집을 다시 왔는데 이러언 세상 마상 맙소사. 이 비수기에, 평일에, 대기줄이 서 있다. 해장국집에! 한시간 반 산책을 하고 치유의숲에서 제주항 근처까지 한시간 반을 또 차를 몰고 오는 길이라 그늘진 가게 앞에서 겨울바람을 맞으며 수달이와 나는 오들오들 떨었다. 그런데 해장국집이 영 사람들이 안빠진다. 국밥이라 뜨거워서 그럴테지 하면서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동안엔 여러가지 투정과 불만이 터져나왔다.


다만 그 와중에도 눈에 띈 것은 가게 앞에 기름통이었다. 해장국과 내장탕을 끓이며 걷어낸 기름이 네모난 큰 업체용 식용유통에 두개 반이 차서 나와있다. 눈치 없는 사람이 거기에 담배꽁초를 하나 버려놨다. 염병할 사람. 이것이 하루치인 걸까. 다른 집도 해장국을 끓이며 기름 정도는 걷어낼 터인데, 가게 앞에 이렇게 기름이 모아져 있으니 왠지 신뢰감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집은, 오늘도 성공이다 대박 맛집이다.


해장국과 내장탕이 모두 8천원으로 이것도 제주시 인근에 위치한 다른 유명해장국집에 비해서 저렴한 편. 제주도에 온 첫날 먹은 내장탕이 만원인데, 오늘 먹은 산지해장국과 비교하면 건더기가 2/3이나 될까 싶다. 수달이는 해장국 나는 내장탕. 그런데 내장탕에 곱창도 퍽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 재료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양도 투박하게 큼직히 썰어져서는 푹 삶아져 보들보들. 국물은 양쪽 다 맛있지만 해장국이 더 맛있다. 겹치지 않게 하나 하나 시켰지만, 다음에 올 수 있다면 해장국을 둘 시키겠다. 그만큼 맛있다.


어쩌다가 제주도에 이렇게 해장국집들이 유명세를 탔는지 모르겠는데, 다른 이름난 해장국 어디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뿐더러 양은 두배까진 쳐줄 수 있을듯하다. 게다가 공깃밥이 무제한에 국물도 리필이 되니, 사장님은 "우리집에서 다섯 공기나 먹은 사람도 있어!"라며 호탕하게 말씀하신다. 돈벌이보다는 장사 자체를 즐기시는듯. 이러니, 어제 세시 반에 왔는데 허탕을 치지. 제주도를 떠나는 날 시간이 맞으면 다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남은 반달살이 기간 동안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게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자 그리고 오늘의 문제...산지해장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동문시장이 있다. 산짓물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시간이면 식사도 하고 동문시장도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여건이라 더욱 좋다. 우린 그대로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동문시장에 가 떡볶이 투어를 시작했다. 모닥치기와는 또 다른 느낌의 사랑분식. 김밥과 버무려진 떡볶이에, 1인 1메뉴가 필수라기에 떡볶이 추가.


배는 부르지만 떡볶이 소스가 군더더기 없이 맵고 달고 짜서 계속 손이 가는 맛이다.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오나 싶기도 하고, 조금만 바쁜 철이 되어도 몰리는 사람에, 꼬이는 오더에, 서비스의 질이 급전직하한다고 하니 한가한 지금 편히 먹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릇을 싹 비웠다. 떡볶이 국물도 거기에 찍어먹는 만두도 모두 오묘한데, 그중에 만두는 홈쇼핑으로 구매할 수 있는 품목임을 알고 사진을 찍어왔다. 떡볶이 국물에 사과나 배를 갈아서 넣는 그런 정성은 무리겠지만, 올라가면 날을 잡아 떡볶이도 해야지.

그런데 문제가 좀 꼬이기 시작했다.


"오빠 나 왜 배가 안꺼지지?"

"나도 그래...어떻게 하지? 오늘 제주 오일장도 가야 하는데."

"저녁도 오늘 원래...백돼지 가려고했는데..."


배가 안꺼진다!


정확히는 어제부터, 수달이와 나 모두 정체불명의 고도 포만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제는 그래 그럴만한 사연이 또 있었지. 산지해장국을 허탕친 분노로 인해 그만 점심을 과식을 했거든. 그런데 오늘은, 그래. 냉정하게. 해장국을 먹고 거기에 떡볶이까지 각 1인분씩을 주문해서 먹었으니 당연히 배는 부르겠다. 게다가 아침의 한시간 반의 산책으론 운동이 부족했던 것 같다. 오들오들 떨면서 걸은 게 문제였을까? 그것이 부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 혈관과 위장을 수축시키기라도 했단 말인가.


카페에서 두시간 가량을 쉬고 나왔는데도 배가 꺼질 줄을 몰랐다. 일단 걷자고 나왔는데도 칼바람이 너무 춥게 불었다. 여행에 지친 우리의 체력으로 바깥에 잠시도 서 있을 수 없었다.


"좋은 생각이 있어."

"응?"

"오일장 가서 걷자. 거긴 덜 추울 거 아냐."

"아 거기도 추울 것 같은데...그래도 여기보단 덜 춥겠지. 일단 가보자."

우리가 제주도 오일장을 도는 이유는, 반달살이에 적합한 컨텐츠라고 판단한 것도 있고, 매일도 떡볶이를 드실 수 있다는 수달이의 떡볶이 투어를 위한 것이었다. 10개 정도 되는 제주도의 모든 오일장에 가, 각각의 떡볶이를 섭렵해보겠다는 위대한 계획을 세우고, 자잘한 오일장은 패스해서 지금 대정-서귀포-한림-제주시 순서로 네번째. 그런데 제주시 오일장은 역시 제주도에서 가장 큰 오일장답게 서귀포와 비교해서도 세배 정도 되는 크기였다. 별의 별 것을 다 판다 싶게 크고 볼거리도 많았다. 토끼를 판다거나, 아동용 마약(...)을 판다거나.

넓은 오일장을 돌고 돈 끝에, 사람이 가장 많은 떡볶이집을 하나 정했다. 다섯시를 넘겨 상인들이 자리를 정리하는 와중에서 꽈배기를 사려는 사람, 좌대에 앉아 떡볶이를 먹는 사람이 퍽 많았고, 뒤에선 튀김솥에 바삐 오징어를 튀겨내는 중이다. 확신을 얻고 여기서 먹기로 했다.


"떡볶이 하나만요. 그리고 꽈배기 세개요."

"튀김은 안해? 우리 튀김 맛있는데."

"아아 죄송해요 배불러서요."


꽈배기를 먼저 주신다. 따끈따끈. 수달이와 한입씩 번갈아 깨물어 먹으니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다. 괜찮네! 떡볶이는 큰 가래떡을 쓴 왕떡볶이다. 나는 좋아하고, 밀떡파인 수달이는 먹기 불편해하는 장르다. 그래도 매콤하니 달지 않고 시원한 맛이라 팔팔 끓던 국물을 후후 불며 먹으니 추위도 잊을만하다. 이름이 재밌다. 땅꼬네. 떡볶이를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시는 할머니께 여쭤보고 알아낸 충격적인 사실인, 다른 오일장에 다니지 않고 딱 5일마다 한번씩 제주오일장에만 가게를 여신다는 것.

"그래도 서귀포가 넌 윈이지?"

"응."

"아깝네 점심만 좀 적게 먹었어도."


여행이 20일 가까이 되어가면서 나도 수달이도 체력의 저하를 느끼고 있다. 딱 7시간 정도를 자고 매일처럼 10시간 넘게 바깥을 싸돌아다니고 오니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한 겨울에 말이지. 제대로 된 한달살이가 아니니 우리는 바쁘게 메뚜기처럼 뛰어다니고, 날아다니고 있다. 애초에 이런 타이트한 일정만 아니었어도, 어제도 오늘도 이다지 과식들을 하지 않았을 것을. 적당히 오일장 따라다니며, 적당히 떡볶이로 식사를 떼우고, 적당히 숙소에 들어와 쉬는, 그런 일정을.


나는 수달이가 좋아하는 떡볶이 하나라도 더 먹게 해주려고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면서, 수달이 역시 내가 먹자는 것을 군소리 없이 따라다니고 그러면서 하루에 두세시간씩을 걸었으니 체력은 체력대로, 그러면서도 살은 살대로 찌고,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이 포만감은, 그렇게 우릴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고기 먹으러 갈 거야?"

"아아 모르겠어. 어떻게 해."

"냉정해지자. 어차피 흑돼지도 아니잖아. 딱새우 깔끔하게 한 2만원어치만 사."

"그럴까? 아 결정을 못하겠어."

"아냐 단호해지자 수달아. 지금 돼지는 아냐."

"그럼 가위바위보 해."

"뭐어? 야 그냥 고기 먹으러 가 그럼."

"아냐 재미로 해보자."


떡볶이까지 먹었으니 더욱 배는 부르다. 이제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그런데 아직 과제가 남았다. 오늘 계획된 일정에 따르면 우리는 저녁을 고기를 먹...을 예정이었는데...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다. 떡볶이를 1인분 시켜 나눠먹긴 했지만, 지금 둘 다 뭘 더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내가 딱새우를 제안했고, 수달이는 과감하게 가위바위보를 제안했다.


"가위 바위 보!...보!...아아 어떡해 오빠 2:2야!"

"진짜? 어우 야 어떡해."


이런 드라마틱한 승부를 펼치면서. 그리고, 기적적으로 마지막 한판을 내가 이겼다. 아예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열심히 손만 내지른 내가 3:2로 따낸 것. 딱새우다. 살았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칼로리를 낮출 수 있겠다. 이제와서!?


서둘러 차를 동문시장으로 몰았다. 시간이 이미 6시가 되어간다. 숙소에 들어가 씻고 상을 차리면 8시. 그럼 밥을 먹고 일기라도 쓸라치면 11시에나 쉴 수 있다.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동문시장 일대는 주차대란이 여전했다. 간신히 차를 대고 후다닥 내려서 딱새우를 팔만한 수산시장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1인분만 살래?"

"어?"

"여기도 유명하잖아. 난 여길 더 먼저 봤었는데 예전에."

"아...근데 먹을 수 있어?"

"남겨. 내일 아침에 먹어."

내가 대체 제정신이 아닌 것이지. 동문시장에 사랑분식과 더불어 이름이 난 서울떡볶이를 보고, 수달이에게 제안을 했다. 남기면, 남기면 되잖아. 수달이는 조금 고민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제주도 떡볶이 투어의 한 조각을 더 쌓아올릴 수 있다는 유혹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현금을 꺼내 수달이에게 건네주고 딱새우를 사러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면서 속으론 "미쳤다 미쳤어."를 되뇌였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졌다. 밤 여덟시에 딱새우 만원짜리 두개. 그리고 떡볶이 1인분으로 저녁상이 차려졌다. 1시에 점심 후 디저트, 5시에 새참, 그리고 8시에 뒤늦은 저녁으로 세번째 떡볶이가, 또 다시 상에 올랐다.


다행인지 당연한 것인지 수달이는 떡볶이를 거의 먹지 않았고, 우리는 그나마 칼로리가 낮을 것이라 기대만 되는 딱새우를 한참만에 다 먹은 뒤에 내일을 기약하며 떡볶이를 냉장고에 넣었다. 매일 두시간 이상씩 걸었으면서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뱃살이 늘어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어떻게 할까. 아무래도 여행이 끝나면 몇주일 동안은 가열차게 체중감량을 해야 할 노릇이다. 떡볶이로 세 끼를 채운 마당에, 설날이고 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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