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구일 : 오는정, 가는정, 퍼주는 정...은 아니고.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숙소이동, 대정→세화

by 공존

윤종신의 노래 너의 결혼식은 "몰랐었어."라는 찰진 찌질함과 회환과 감정을 모두 담은 멋들어진 한소절로 시작한다. 예능의 소재로 라디오 스타에서 자주 써먹던 멘트지만 그 한마디에는 돌이킬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상실감이 절절이 배어있다. "몰랐었어 네가 그렇게 예쁜지."


길고 혼란스러웠던 하루를 마치고 다시 아침의 밝아오는 햇살을 바라보며 어제 아침의 한가로웠던 한때의 사진을 대면하니 슬그머니 감개가 차오른다. 떡볶이를 하루에 세번 먹던 어제, 우리는 집에 가서 기르기로 하고 작은 귤나무를 하나 샀고, 아직 이틀이 더 남은 숙소에서의 일정에 따라 화분을 가지고 올라와 베란다에 두었다. 아침에 보니 수달이는 화분을 베란다 테이블에 올려뒀다. 해서, 나는 수달이가 남긴 자몽티를 데워, 아침의 따스한 햇살을 바라보며 잠깐의 여유를 가졌다. 광주에서부터 가져온 오래된 빵을 버터로 굽기 위해 자르다가 부스러기를 제법 주방 바닥에 흘려, 청소기를 빌려와서 청소를 하고 내친 걸음으로 쓰레기도 싹 모아서 버린 뒤다. 오늘 날씨는 제주도에서 머문 날들 중에 가장 온화하며 맑았다. 잔잔한 바람이 땀을 흘린 내 몸을 식혀주었다. 멋진 하루가 될 것 같은 느낌.

아침에 송악산을 걸었다. 역시 육지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다. 마라도와 가파도를 다녀오던 날 사일리커피에서 잠시 쉬며 송악산 절벽을 보고 호기심을 갖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우선 나는 일반적으로 가지 않지만 스타벅스가 있네. 스세권이다. 그리고 이런, 관광객과 중국어 간판으로 버글거리는 섭지코지보다 훨씬 때묻지 않은 자연경관 그대로의 제주다.


코 앞에 산방산, 해안절벽, 망망한 제주 남쪽 쪽빛바다, 마라도와 가파도의 생생한 곡선까지. 딱 비양도 정도 크기의 올레길이 있어 바깥쪽으로 한바퀴, 안쪽으로 한바퀴 돌면 두어시간 여유있게 절경과 정취를 동시에 즐길만하다. 어떻게 이런 명소를 몰랐을까. 산방산과 모슬포는 그렇게 자주 왔었는데?


연유를 살펴보니 제주도의 아픈 역사가 그대로 서린 곳이라 관광상품으로 개발되기보다는 역사성을 중심으로 보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듯하다. 당장, 분화구가 있는 송악산 안쪽 올레길은 휴식기로, 입산이 제한되어 있다. 송악산의 바위들이 모양이 다양하고 오름 일대의 곡선이 풍성해서 저곳을 오를 수 있다면 정말 즐거울 텐데, 올해 7월 이후에나 개방이란다. 가을엔 많은 사람이 걷겠지. 우리는 오늘 그리 여유있게 시간을 잡고 온 것은 또 아니라서, 해안올레길을 절반 정도 걷고 돌아왔다.


짧은 산책에도 일본군이 파 놓은 굴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관광이 아닌, 역사체험의 관점에서 온전히 보존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할 곳이다. 아래는 공식 홈페이지의 설명이다.


바닷가 절벽에는 일제 때 파놓은 일본진지 동굴이 아직도 남아있어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탄약고가 있었던 송악산 알오름인 섯알오름은 6·25 후 예비검속된 한림, 대정 지역의 주민 200여 명을 대정읍 곡마창고에서 이송시켜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통한의 학살터이기도 하다. 이들 주민들은 무고한 양민과 보도연맹원, 4ㆍ3 당시 체포됐다가 석방된 사람들로 정부는 6·25후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이들 주민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그때 학살된 주검은 6년 후에야 겨우 유족들에 의해 수습됐는데 그 때 수습된 132구의 유구들은 누가 누구인지 몰라 유족들은 '조상은 일백이요, 자손은 하나'라는 뜻의 백조일손(百祖一孫) 묘역을 조성했다. 백조일손지지에서는 매년 위령제가 열리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송악산을 절반만 걷고 돌아온 이유는, 오늘의 우리 목표가 오는정 김밥인 탓이다. 이틀 뒤에는 숙소를 동부에서 서부로 옮긴다. 서귀포 중심가에서 한시간 반이 걸린다. 연돈도 오는정김밥도 모슬포의 숨겨진 맛집들도 안녕이다. 오늘 오는정김밥을 우선 포장해서 먹으면서, 느긋하게 제주 서남부를 거닐기로 했다. 마침 바람이 적어 걷기에도 딱이다. 차를 달려 오는정김밥에 먼저 도착, 예약을 걸어둔 뒤에 서귀포 KAL호텔이 경영하는 오션뷰 카페로 향했다. 그 사이에 오는정 김밥에 150통이 넘는 예약전화를 걸었지만, 단 한번도 통화가 연결되지 않은 건 안자랑.


"아 연돈 빡친다. 오늘은 꼭."

"안될거야 포기해."

"저녁 생각해둔 거 없지?"

"응 근데 아직도 배가 안꺼져."

아침은 어제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남긴 떡볶이에, 튀김을 후라이팬으로 데워 적셔 먹었다. 이틀 사이에 떡볶이 세끼가 떡볶이 네끼가 되었구나. 오는정김밥에 대한 수달이의 강렬한 애정으로 우리는 예약시간인 세시까지 조각케익 하나만 먹으며 어제의 과식으로 지친 위장을 겨우 달랬다. 그리고 햇볕이 산산히 부서져 반사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반달살이 숙소의 사장님이다.


"여보세요? OO씨? 나갔어?"

"네네 아침 먹고요."

"아아 차가 없어서~ 언제 나갔는지도 몰랐네 말해주지!"

"아아. 하하. 네 저희 서귀포 와서 오는정 김밥 기다려요."

"그래요~ 못봐서 아쉽네~ 그동안 머무르는동안 감사했고~."


네?!


"네? 아니...저희..."

"날짜가~ 더 있으면 좋은데~ 오늘 이종사촌이 오기로 해서~."

"네? 오늘까지라구요?"

"어어. 2월 3일까지 계약 아니야?"


헐. 나는 깜짝 놀라 하늘과, 땅과, 수달이의 눈을 번갈아 바라봤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어어 잠깐만요 잠깐만요."


통화를 유지하며 카톡을 빨리 뒤졌다. 사장님과의 계약...헐. 오늘까지다. 나는 2월 5일까지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아 죄송해요! 오늘까지 맞아요. 어어 저희 지금 짐 정리 하나도 안되어 있어서, 4시까지 가서 빼도 될까요?"

"어어 그래요 그럼~ 친척은 어제 와서 라마다에서 잤어~."

"네네 감사합니다. 빨리 갈게요. 으아아 수달아아 미아안!!!"


미쳤다. 이건 레전드다. 세상에나 여행을 와서 숙박일정을 착각하다니. 게다가 오늘 체크아웃인걸 까맣게 모르고 나와서 무려 서귀포시까지 와서 카페에 앉아있다니. 다행히 이런 일로 피차 짜증을 부리거나 하는 일은 없어서, 수달이는 빠르게 호텔더본의 공실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나는 동부에서 묵기로 한 숙소를 알아보며 신속하게 의사소통이 진행되었지만, 이건 완벽히 내 실수고 불찰이다. 어떻게 3일을 5일로 착각을 했을까.


"아 더본 없어. 진짜 인기있네."

"우리 동부 숙소에 바로 옆방은 비어. 가격은 비슷. 어떡해?"

"괜찮아 그 방도? 똑같아?"

"거의 같아. 내일 모레 옮길 때, 우리 들어갈 방 먼저 청소해달라고 하고, 그 담에 우리짐 옮기면서 체크아웃한다고 어레인지만 하면 될듯."


방값이 저렴하진 않은 곳이다. 수달이가 꼭 묵고 싶은 유형의 숙소라서 감수하고 4일만 묵기로 한 곳인데 오늘부터 들어가면 이틀치의 방값이 추가 지출된다. 이래서야 한달살이의 중요한 메리트가 손실되는데, 이런것 역시 내 실수로 빚어진 비용이니 누굴 탓할까. 아직까진 호텔더본의 조식뷔페에 대한 미련으로 주저하는 수달이를 앞질러 나는 동부의 숙소에 전화를 걸어 빈방을 확인하고 결재를 했다. 보통 모텔에서 자도 비용은 발생한다. 거기에 10만원만 얹은 꼴이니, 이정도면 손실비용으론 납득가능한 선.


오는정김밥은 세시에 예약이다. 망할 150통! 그래서 우선 숙소에 가서 짐을 빼고, 다시 오는정김밥을 챙겨, 동부로 넘어가기로 했다. 원래는 멋있게 체크아웃을 하는 날 사장님께 케이크를 하나 드리려고 했는데 이건 꼴이 우습게 되었다. 수달이가 빵집에 들르느라 잠깐 차를 세워, 완전히 꼬여버린 하루에 대한 황당함에 네비게이션을 빤히 바라봤다. 내가 착각을 하지만 않았다면, 방을 비우고 지금 서귀포에서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다가 동부로 넘어갈 텐데.

모슬포 인근의 숙소에서 13일을 보냈다. 한달살이 기준에서 봤을 때도 저렴한 가격으로 편히 머문 곳이다. 나와 수달이 모두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념촬영부터 했다. 화분이 눈에 들어와 더욱 심사가 처량했다. 후다닥 계단을 뛰어올라가 나는 설거지와 쓰레기처리, 수달이는 각종 짐정리를 한 뒤에 빠르게 내려와 사장님께 롤케익을 전달드리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외장하드!!"

"꺄아악!!"


...Things always come twice...20분만에 다시 차를...돌렸다. 영화와 드라마를 담아온 외장하드를 TV에 꽂아놨는데 다른 짐 다 챙겨놓고 그걸 딱 하나를 까먹었다. TV 뒤에 있어서 잘 눈에 띄지 않고, 막상 여행에 와서는 저녁에 TV를 한참 보는 일은 없기 때문에(둘 다 씻고 일기를 쓴 뒤에 뻗곤 했다.) 우리의 뇌리에 잊혀진것. 벌써 길바닥에 두시간을 버렸는데 40분이 추가가 되었다. 오는정김밥 예약시간을 이미 넘겼다. 도착하면 한시간반이나 지각을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어째. 그 외장하드엔 우리 결혼식 사진을 포함,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80% 이상이 백업되어 있기도 하다.


"어어 죄송합니다. 놓고 간게!"

"아~ 빨간색? 올라가봐 있더라."


묘령의 사장님은 한창 청소중이셨다. 내가 외장하드를 챙겨서 나오자 베개를 잔뜩 지고 계단을 올라오시더니 다시 인사를 드리자, 한라봉 가져갈래? 하신다. 상품은 아니라도 맛은 있으시다며. 장기숙박에선 호스트와의 관계가 중요하고도 어려운데, 1층에서 상주하시면서 편하게 머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했다. 선선히 창고에서 한라봉을 받아와, 오늘의 크레이지한 상황은 또 남겨야 할 것 같아서 다시 기념촬영을 했다.

긴 하루가 되었다. 오는정김밥을 받아서 차에서 허겁지겁 한줄씩 먹어치우고 나니 해가 저물녘이다. 동부에서는 노을을 보기 힘드니 애월항을 갈까 하다가 서귀포에서 멀지 않은 보목포구를 골라 잠시 지친 몸과 마음을 쉬었다. 다행히도, 정말 제주도에서 있던 날 중 가장 화창한 날이어서, 보목포구의 굽이굽이 볼거리가 많은 해안선에서 느긋하게 노을까지 감상할 수 있었다. 정신없던 하루의 아주 짧은 휴식.


"결정했다."

"응?"

"그냥 고기 먹자."

"응 오빠 가고 싶은데 가."


딱 하나. 딱 하나 서부에 남기고 가기엔 아쉬운 곳이 있어 보목에서 다시 강정으로 차를 25분 거꾸로 돌렸다. 또 한시간 가까이 시간이 버려질 테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판단에. 제주도에 흑돼지를 무한리필로 제공하는 곳이 몇군데 있다. 서부의 숙소와 가까운 이곳을 찜해뒀다가 어쩌다가 오늘까지 미뤄지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가기 힘들다. 남은 여행일정도 엿새뿐이고, 동부에서 강정까진 한시간 반이 걸린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가까운 이곳에서 다녀오기로 하고, 비록 네시반에 김밥을 한줄씩 먹은지 고작 한시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그래도 도전.

그럴 가치가 있느냐 하면, 충분하다. 목살과 삼겹살로 구성된 흑돼지 한근의 가격은 55,000원 선에서 평준화되어 있고, 흑돈퍼주는집의 경우엔 2인 기준 4만원에 여러 부위가 섞여서 제공되는데 무제한. 무한리필이라고 해서 나쁜 고기만 있는게 아니라 항정살도 두툼하게 하나, 삼겹살도 150g 가까이, 갈메기살도 있고 갈비뼈가 붙은 후지쪽 살도 나왔다. 게다가 갈탄도 아닌 참숯이다. 이것이 이 식당을 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성산에도 큰 흑돼지 무한리필 집이 있는데, 가스불이다.

그런데 더 재미난 건 쌈야채다. 무청, 얼갈이, 청경채, 쑥갓에 상추까지 네댓종류인데 유기농이다. 이것이 흑돈퍼주는집의 단가를 오히려 낮춘 1등공신으로 보였다. 도시에 있는 고깃집에서라면 별도로 채소류를 납품받아야 하고 그것이 가격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제주도는 어디까지나 농촌이고 이 척박한 땅에 지천으로 깔린 것이 뿌리채소류다. 그러니까 이 식당의 경우 강정이라는 비교적 개발이 덜 진행된 곳에서, 마을에서 기른 채소들을 그대로 식당에서 소비를 하는 진짜 시골식당이라는 것. 제주도처럼 비싼 관광지에서 오히려 정말로 괜찮은 시골고깃집을 방문한 셈이니, 이 쌈야채만 많이 먹어도 돈을 버는 느낌이고, 실제로 싱싱한 쌈이 마구 손길을 당겼다.


원래 맛있는 고기집에서는 쌈을 자제하게 되는 법이기도 한데 여긴 채수가 좔좔 뿜어져나오는, 갓 수확한 작물들이니 그 맛이 오죽할까. 잔뜩 숯불향을 머금은 기름진 고기를 쌈에 싸먹으니 별다른 간을 하지 않아도, 그 육즙과 채수의 조화만으로도 진한 풍미가 느껴졌다. 게다가 고기를 손질하고 남은 자투리들을 잔뜩 넣은 시원한 김치찌개까지 있어 어느 흑돼지집이 부럽지 않다. 단점을 꼽자면 식당보다는 술집에 기울어진 식당의 형태라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 가기엔 문제가 있다. 식후 냉면도, 베이비시트도 기대할 수 없는 곳. 그러나 삼겹살 목살에 한정짓지 않고 여러 특수부위들을 최상의 퀄리티로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집이다. 우린 첫 접시로 나온 고기를 다 먹지 못하고 한주먹가량 남겼다. 대놓고 첫접시부터 근고기보다 많은 양이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리필도 안하고 내가 감길 기색을 보이자 수달이가 아깝다며 고기를 집어먹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오겹 부위를 잘라서 주었다.

그렇게 우리 여행의 열아홉번째 날이 저물었다. 오는정, 가는정에 퍼주는 정...까진 아니고 신선함이 뿜뿜하는 고기와 채소까지. 내 덤벙거림으로 완전히 꼬였지만 그래도 또 보람차게 하루는 흘러갔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 위해 우린 열심히 달려 구좌읍에 안착했다. 몰랐었어, 오늘이 체크아웃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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