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세화
"이야아 저기 네 남편 걸려있다 야."
"어 저기 목화휴게소잖아. 세웠다 가자."
고성에서 다시 숙소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타고 천천히 방황하듯 올라오는데 해안도로 한켠에 주렁주렁 오징어가 널려서 해풍을 맞고 있다. 나는 너스레를 떨었고 수달이는 바로 지도를 켜 확인하더니 차를 세우자고 한다. 나도 제주도에 여행 와 몇번 지나다니면서 눈여겨 봤던 곳인데 아무래도 술안주에 술 당기는 곳이라, 좀처럼 먹을 기회가 없었던 곳이다.
근데 읭? 여길 세우자고? 나는 갸우뚱 하며 차를 세워, 하늘하늘한 오징어를 보며 침을 꼴딱 삼켰다. 그것 참 맛있긴 하겠네.
"어떤 거 먹지? 큰 거?"
"작은 거 먹어 방금 만두 먹었으니까."
"흐음. 너라도 맥주 하나 해 그럼."
"응 그냥 한모금만 마실게."
수달이는 이미 목화휴게소를 사전조사로 찍어놓은 모양이다. 우리 숙소에서 내내 오가는 길이라 딱히 오늘 갈 요량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남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이건 못참는 모양. 냉장고에서 맥주와 사이다도 하나씩 꺼내 9천원을 계산했다. 제법 가격이 헐하다. 캔맥주 작은게 2천원 정도, 사이다는 천원쯤 하는 모양. 거기에 오늘 막 걷어낸 반건조 오징어가 6천원.
"아...고문이구만..."
"안돼 사이다 마셔."
비닐로 막은 야장에 앉아서 초고추장과 마요네즈에 적당히 찍어 먹으니 그 맛과 감흥이 이루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작 여기에 술을 못먹는다니 고문이다. 수달이는 운전을 시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을 추정되는 심각한 길치다. 그래서 무조건 내가 차를 몬다. 그리고 사실 목화휴게소 정도가 아니면 나도 굳이 술 욕심을 내진 않는다. 꾹 참고 사이다를 삼키지만 차라리 탄산수라도 챙겨 나올걸 후회는 막급이고. 날씨는 쌀쌀하니 여전히 바람이 살을 에인다. 그러나 하늘이 오늘도 티 없이 맑고 쾌청하다. 오른편에 성산일출봉, 왼편에 우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해안도로 휴게소에 앉아 소금기 거의 없는 순수한 오징어의 감칠맛으로 입을 적시는 시간이라. 이런 게 겨울의 제주도 바다를 즐기는 꿀팁이라면 꿀팁이겠다. 석쇠와 가스불을 오가며 쫄깃하게 구워진 오징어를 다 비우고도 한참 동안 망망한 바다를 한참이나 감상하다 우린 일어났다.
- 안녕하세요! 어제 답변을 못드려서 죄송합니다ㅠㅠ 캐리어에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싸놓아주시면 청소시간에 저희가 옮겨드리겠습니다 :)
- 네 감사합니다^^
- (근데 짐이 너무 많아서 죄송하네요 이 친절함과 배려 널리 널리 알리도록 하겠습니다ㅜㅜ)
- ㅎㅎ에구구 네 감사합니다~~^^
전날 보낸 문자가 아침에 답문이 왔다. 동부의 새 숙소로 우린 이동했고, 원래 묵기로 한 방의 옆방에 먼저 묵고 나서 원래 방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일단 차에서 짐을 대강 옮기고 나니 이걸 옮기는 게 또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아 나는 어제 <안녕하세요 혹시 저희가 주변에 있다가 먼저 정비가 되면 저희 짐을 옮길 수 있을까요? 체크인 시간까지 짐을 빼놨다가 다시 들고 들어가기엔 짐이 좀 많아서요>라는 질문을 해둔 터였다. 그런데 돌담집 사장님은 친절하게 우리 짐을 모두 옮겨주신다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홀가분하게 나올 수 있었다. 동부에서의 첫날. 화창한 날씨가 기분이 좋다. 그러나 바람이 오늘도 너무 강하게 불어서 옷깃을 추스를 수 밖에 없다. 숙소에서 나와 돌담길을 꺾어 꺾어 나가야 주차를 해둔 공터가 나온다. 돌담길로 가득한 옛마을에 자리를 우리는 잡았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오일장 떡볶이투어에 위기가 발생했다. 고성 오일장에 떡볶이 집이 없다. 지금까지 다닌 오일장 중에 애초에 가장 작은 규모이기도 하다만, 붕어빵과 호떡만 두어군데 상점이 있고 떡볶이는 팔지 않는다. 나는 슬쩍 두군데 국밥집을 보여주며 수달이의 의향을 물었다. 당연히 시장국밥을 먹을리가 없지. 나는, 다가오는 아침 외출을 예감하며 다른 대안을 찾아 수달이를 이끌었다. 고성 오일장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흑돼지만두를 파는 곳이 있다. 성산일출봉과 인접하면서도 무언가 관광지로는 그닥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고성읍내를 구경하며, 여전히 싸늘하기만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우린 어렵사리 만두집에 당도했다.
작은 만두가게엔 직원 한분과 사장님이 손수 만두를 빚고 있다. 떡볶이 대신에 간단히 먹기에 딱 좋은 메뉴다. 이틀 전부터 계속되는 과잉 포만감 사태에 직면해 우린 오늘부터는 되도록 가볍게 먹기로 약속했다. 만두조차, 딱 5천원어치이니 아침에 나누어 먹은 김밥 두줄과 튀김우동 컵라면 하나에 이어 조촐하니 맛깔난 식단이다. 그런데, 받고 보니까 만두피가 퍽 얇아서 먹음직스럽다. 우리가 만두를 먹는 사이 이내 분주해진 가게를 구경하고, 다시 이 포만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걷고 또 걷는다. 슬슬 여행의 피로에 수달이도 나도 지쳐가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어떻게든 걷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게 딱 제주도 느낌이지 싶은 카페. 2월이 되니 제주도의 모습이 1월, 처음 우리가 당도한 시기와 퍽 다르다. 그것은 서부의 대정에서 동부의 성산으로 이동한 차이이기도 하다. 해안가의 카페는 밤이 되어도 불을 켜둔 것이 코로나 시국을 어슴프레 잊게 하고, 낮의 카페는 젊은 남녀로 가득하다. 오늘처럼 드물게 화창한 날엔, 이런 통유리창으로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즐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다. 내가 수달이의 카페 취향을 아무리 마뜩잖게 생각을 한들, 이 풍경 마저 삐딱하게 바라볼 수는 없지. 어제는 도로 위를 오래 헤메었고 오늘은 이리저리 짧게나마 자주 걸었다. 쉽사리 여독을 버어내지 못하며 우린 느즈막히 밥때가 될 때까지 천천히 바다를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그리고 나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마쳤다. 당대의 다양한 담론을 비판하며 핵심적인 그의 사상을 드러내어 주는 마르크스의 생생한 목소리에, 나는 멀고 먼 공부의 문제에 또 천천히 빠져든다. 이제 조금 홀가분하게 그래도 쉬운 책을 읽기로 했다. 가방에 <노인과 바다>가 있음을 확인하고 나는 비로소 여행 내내 이어진 공부에 대한 강박을 조금 내려놓았다. 내일은, 줌으로 대학원생과 교수님간의 온라인 대면식이다.
그런데 밥을 먹은 곳이, 또 드물게 좋다. 밥짓는시간이라는 감수성 가득한 이름의 식당인데 일단 위치가 돌담길으로 갈라진 밭들 사이에 툭 튀어나와 있는 어민회관의 2층을 쓰고 있다. 쌩뚱맞은 위치에 미심쩍어하며 가게로 들어가면, 또 코앞은 세화해변이요 그 사이에 슬레이트 지붕이 알록달록하다. 이런 곳이면 뭘 먹어도 예쁘게만 나오면 만족할 텐데, 또 내가 좋아하는 가지덮밥. 그런데 또, 가운데 테이블에 "오늘의 밥시"라는 것이 한 뭉테기다.
역시나 호기심이 나 한 손 가득 시를 가지고와 수달이와 함께 여러가지를 읽어봤다. 나태주의 시, 백석의 시, 나희덕의 시, 소월까지. 종이 끄트머리엔 하루하루의 날짜가 꼬박 적혀있다. 일일이 손으로 옮겨친 시구들을 읽으며 오물오물 밥을 먹었다. 가지덮밥이 만원이니 가격으로 따지면 좀 아쉽다고 생각하다가도, 수달이가 고른 쇠고기 덮밥엔 고기가 한가득이다. 나는 그만 시를 읽는 것에 집중해 고기를 단 한 조각도 얻어먹지 못했고, 맛깔나게 버무린 얼갈이나물 무침만을 뺏어먹었다. 게다가, 수달이가 뭐냐고 물으며 첫술을 뜬 고소한 김국까지.
그러나, 이렇게 편안하게 식사를 하며 마음껏 시를 읽은 것이 또 언제였던가 싶다. 오늘 마친 <독일 이데올로기>로 두달 정도 이어진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독서 계획을 대강 정리할 수 있어서 더욱 편안한 마음. 여기에 부드럽고 달큰한 가지볶음이 곁들여진 갓지은듯한 밥이 시와 함께 들어가니, 야 이거 하루 종일 숨구멍을 조여온 추위까지 완전히 벗어던지는 느낌이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보리차를 연신 마시며, 마음에 들어서 가져가기로 한 시들을 한번 더 읽는다. 어떤 시는 나의 이야기. 어떤 시는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어떤 시는,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은, 당신의 이야기.
이런 곳에선 엉덩이 가벼운 우리도 괜스레 오래 앉아있고 싶어진다. 위장은 보드랍게, 마음은 가득, 심장은 푸근하게 채워주는 식당을 수달이가 찾아줘서 고마운 마음이다.
밥짓는시간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니 딱 노을질 무렵이다. 다시 느리게 느리게 월정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세화에서 평대, 월정리까지 제주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해안도로를 천천히 지나며 유우-명한 해맛이쉼터도 또 발견하다가, 마침내 노을이 절정일 때 우린 월정이라 바로 저 앞에 내다보이는 한 등대 앞에 멈추어섰다. 해가 저무는 시간의 바닷바람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지만, 숙소에서의 친절로 오징어의 감칠맛으로 그리고 밥짓는시간의 온기로 덮여진 내 몸은 내내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