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이일 : 그 풍경에 붙들려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우도

by 공존

"몇시나 됐지?"

"한시 반."

"우리 여기서 너무 오래 있지 않았어?"

"그건 무슨 상관이야 밥도 먹었겠다 천천히 보다 가면 되지."


수달이는 슬그머니 내게 눈치를 줬지만 나는 땅콩아이스크림을 삭삭 긁어먹으며 나무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었다. 배를 타고 우도에 들어온지 벌써 두시간 가까이 되었는데 너무 한군데 오래 있긴 하지. 그러나 오늘 같은 날에 일정이며 코스며 무슨 상관이야. 여기서 한숨 낮잠을 자도 되겠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다, 수평선을 바라보다, 나란히 늘어선 네대의 각기 다른 색의 전기자전거를 보고 사진을 찍었다. 하고수동이라. 우도에 세번째 오는데 번번이 제주도 여행 일정이 타이트해 여기까진 와본 적이 없다. 서빈백사와 검멀레가 전부. 어쩌다가 이 풍경을 놓치고 있었을까.

2월 첫째주 토요일, 당장 이번 명절 연휴만 되어도 관광객으로 북적일 하고수동 해변은 아직 인적이 드물어 한 없이 부드러운 그 모래와 에메랄드빛 바다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돌이 길게 늘어서 있다. 포토존이다. 수달이를 저기에 세우고 찍기보단 이 풍경 자체만 갖고 싶었다. 단 몇일만 늦게 왔어도, 이 사진 한장을 얻기 위해 수십명 나란히 줄 선 끝에서 나도 순번을 기다려야 하겠지. 운이 좋다. 두 커플이 삼각대를 두고 열심히 찍는 것을 재미있게 감상한 뒤에 이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물론 사진을 얻고 나서 수달이도 저기에 섰다. 완벽한 날씨, 완벽한 바다. 완벽한 구도와 풍경.


사진을 찍고나서 뒤로 돌아 길가로 올라오려니 형은 꽤 깊이 구덩이를 파놨고, 어린 동생은 그것을 구경하고 있다. 파서 무엇 나올 것 같진 않은데 사내아이들이란 어쩔 수가 없지. 그런 모습도 정겨워 사진에 담았다. 발을 떼기가 쉽지 않다. 빠른 길이 아니라 돌아돌아 해안가 끄트머리로 갔다가, 다시 아쉬워 반대편으로 한번 더 발걸음을 옮긴다. 포토존 사진을 얻었으니 이젠 이 바다를 온전히 담아봐야지. 다시 내려가 잔잔한 물결을 연신 사진에 담았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배 부르고 등따신 이런 날에는, 나도 모르게 이 풍경에 오래 오래 붙들리게 되는 것이니까.

숙소 앞에 귤화분을 내어놓았다. 햇빛에 내어놓아야 한다고 해, 이름도 햇살이라고 붙여주었다. 방의 유리창으로 보면 저 화분과 돌담이 함께 보인다. 내일은 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오늘 일정은 원래 함덕과 김녕 해변을 차차 둘러보는 것이었는데 수달이가 아침에 골똘이 폰을 보고 계시더니만, 우도 일정을 하루 당기자고 한다. 하자면 하는 거지. 여행 일정이 고작 3일 남았다. 나는 화창한 날씨를 보며 아내의 선택이 옳은 것임을 예감한다.

그리고 과연 오늘의 날씨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어제의 봄날씨가 서막이라면 오늘의 이 하늘과 바람은 너무 이른 클라이막스일까. 우도로 향하는 배에서 겉옷을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날씨가 포근하고 바람은 잠잠. 미세먼지는 조금도 감지되지 않는 맑은 하늘에 승객들은 마음껏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뿌리며 그들의 비행을 유도했다. 갈매기는 마치 호위병단처럼 우도로 향하는 짧은 항행을 뒤따르며 멋지게 새우깡을 캐치한다. 새우깡이 그만 뒤에 선 사람들의 얼굴에 와 부딪히며 연신 웃음소리가 터진다. 영리하게도 뒤에 선 승객들은, 그 새우깡을 들고 갈매기를 꼬여낸다. 정말로 갈매기 한마리가 가까이 날아와 그것을 채 간다. 왁자한 함성과 함께 배는 우도에 당도한다.

빌릴까 말까 걸을까 말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전기 자전거를 한대 빌려, 대여소에서 알려주는대로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다. 날씨가 워낙 좋아 태양의 각도에 따라 유난히 바닷물이 파랗게 되는 지점부터 자전거들이 우르르 주차되어 있다. 그런 곳에는 응당 아기자기한 우도 스타일의 카페며 책방도 바닷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원래는 빠르게 한바퀴 돌고 올레길도 조금 걸을 생각이었는데 전기 자전거가 워낙 많이 달려 걷는 게 쉽지는 않겠다. 나도 내려서 한참 바다를 구경하고 다시 자전거를 달리며, 느리게 느리게 첫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우선 오늘의 일정 변경의 주인공, 흑돼지 타코를 먹기로.


나는 타코를 상당히 좋아하고, 향신료를 싫어하는 수달이가 그나마 유일하게 먹는 향이 강한 요리가 타코다. 물론 둘이서 함께 먹게 되면 나는 고수를 따로 추가하고, 수달이는 미리 고수를 빼달라고 말은 한다. 우도의 타코 식당이 일요일엔 열지 않는다는 것이 원래 일요일이던 우리의 일정을 토요일로 옮긴 원인. 그러니까, 이 타코밤이라는 곳이 우도 일정에 고려해야 할만한 문제가 된 셈인데,

결론은, 그 정도 가치가 있다. 우선 대단히 친절하다.젠트리피케이션 때문인지, 제주살이에 대한 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태원에서 성공적으로 장사를 하던 사장님들께서 이주해서 차린 곳이다. 기본적으로 장사를 잘 아는 분들이기 때문에 주문과 접객이 굉장히 훌륭하다. 그리고 요리대회에서 우승 경력이 있을 정도이니 우도와 제주도의 모습을 담아낸 한라산볶음밥이라는 메뉴가 눈과 입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매콤하게 볶아진 돼지고기에선 불향이 난다. 기대를 한참 넘어서는 퀄리티다. 볶음밥에는 또띠아가 함께 제공되어서 타코를 만들어먹을 수 있다는 점도 즐겁다.


원래는 볶음밥은 과할 것 같아 타코와 부리또를 먹으려고 했는데 12시가 되기도 전에 벌써 타코는 모두 소진이 되었단다. 세상에나. 그래서 별 수 없이 볶음밥만 하나 시켜 둘이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또 과식이로군. 몇숟가락 타코도 만들어보고 하다보면 딱새우를 가져가 먹기 좋게 손질해서 가져와주신다. 이쯤에서 또띠아를 추가해서, 타코에 딱새우까지 넣어서 먹으니 더욱.


날이 딱 오늘 춥지 않아 바깥자리에서 바다를 보며 이 진미를 즐기는데 바로 옆 카페에...라쿤? 라쿤이 있다?

촬영 사절이라 카페 인스타그램에서 펌.

와우. 타코밤 옆의 카페는 사육사 부부께서 여러 동물들을 번갈아 가게에 데려와서 손님들에게 선보이면서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마침 라쿤을 데려온 날인가보다. 라쿤은 자기 놀이기구에 매달려서, 앞발로 흰 말라뮤트에게 연신 장난을 치다가, 사장님이 다가와 말리자 이번엔 사장님 품으로 뛰어든다. 다시 놀이기구에 내려주자 두 앞발을 마구 내젓더니 다시 품으로 뛰어든다. 멀리서 밥을 먹으며 그걸 구경하는 나도, 카페를 둘러싼 구경꾼과 손님들도 모두 그것을 즐겁게 구경한다.


환상적인 식사를, 환상적인 풍경 그리고 바람과, 환상적인 라쿤의 재롱까지 보며 즐겼다. 야 이것 정말 오늘 완벽한 날이네.


식사를 마친 뒤에 산책으로 하고수동을 한바퀴 돈다는 것이, 그만 저 백사장 풍경까지 보아버린 것이다. 나는 수달이를 이끌어 해변 이곳저곳을 두루 구경하였고, 그리고 풍경에 이끌려 그곳에 눌러앉아 오래 오래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보낸 시간이 얼마였더라. 그러니, 우도를 나가는 뱃시간이 두시간여 밖에 남지 않았다. 마침내 수달이는 날 재촉하였고, 우린 다시 전기 자전거를 달렸다. 시계방향으로, 동으로, 남으로. 검멀레와 우도 등대를 향해서.


하고수동의 풍경에 붙들린 게 너무 길었을까. 해가 넘어가면서 우도엔 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등대에서 바라보니 제주도 쪽은 또 더하다.


"어어 내가 너무 오래 있었나 하고수동에."

"뭐 어쩔 수 없지 이정도라도. 그러니까 일찍 나가자."

"무슨 소리여 저기 등대는 올라가야지. 걸어."

여독이 쌓이고 쌓여 체력이 떨어진 수달이는 그리 높지 않은 우도 등대길을 올라가는 것을 내심 피하려는 기색이었지만 오늘도 나는 배가 부르다. 그리고 여독은 여독이고, 운동은 운동이다. 쉴 때 쉬어야지. 그리고 날씨가 안좋더라도 우도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르고, 길게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그나마 이 날씨라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말 구경도 함께 하며 천천히 느리게 우도 등대에 오른다. 다행히 우도 동쪽 바다는 여전히 화창하고 푸른 바다뿐이다. 등대 밑에 앉아서 땀을 식힌 후 내려와, 뱃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빠르게 자전거를 몰았다. 걸어서 여행했더라면 한바퀴 도는데만 네댓시간이라는데, 그랬더라면 식당도 바다도 빨리 빨리 지나칠 수 밖에 없었겠다.

배에서는 소라를 가득 채운 트럭을 구경하기도 하며, 제주도로 돌아와 한참동안 카페에 앉아 배를 꺼트렸다. 나도 수달이도 매일 일기를 남기느라 카페에 앉혀놓으면 충분히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성산일출봉을 감상할 수 있는 카페가 여럿 있어 그 일대를 한적하게 거닐다가 한군데를 골랐다. 나는 슬쩍 슬쩍 아침에 일출을 보자며 수달이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수달이는 거절.


저녁은, 흑돼지다. 근데 여기가 또 재미가 있네.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사장님은 자기 고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맛나게 고기를 먹고, 서비스로 들고 가라는 귤도 각자 한봉지씩 손에 들고 와 그날은 일찌감치 자리에 누워서 오랫동안 몸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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