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삼일 : 채울것은 휴식, 충만히.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구좌

by 공존

나는 나의 한달살이 버킷리스트를 채웠다. 마침내 날씨는 화창하여, 드디어 돌담집의 안마당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을만큼 포근한 아침이 찾아온 덕분에. 아침에 수달이가 머리를 말리는 사이 커피를 갈고 마당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심호흡을 한다. 방이 세칸인지라 체크아웃을 하는 건지, 이내 생면부지인 한지붕 다른 가족들이 마당을 휙휙 지나가지만 반팔에 반바지 차림, 그리고 머리도 감지 않은 후레한 차림의 나는 오롯이 드리퍼에 물을 붓는다.


쪼록쪼록. 드립용 주전자를 가져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굵기를 조절해서 몇번 내려보니 물끓이개로 거칠게 드립을 하더라도 그럭저럭은 맛있게 커피가 내려진다. 다섯번에 두번 혹은 세번 정도 빈도로 내가 내린 커피가 카페에서 사먹는 것보단 맛있다. 아. 물론 카페에서의 메뉴 선택권도 온전히 수달이에게 양도한 터라, 온갖 생크림과 분말들이 추가된 커피들을 먹는 경우가 많아 공정한 평가는 어렵다.


"안씻어?"

"나 이거 다 마시려면 좀 걸려. 천천히 나가자며."

"응 알았어. 마시고 씻어."

"너는 뭐 안마셔?"

"난 괜찮아."


뜨거운 커피를 두어모금 마시려니 머리를 말리던 수달이가 슬쩍 문틈으로 고갤 빼고 내게 묻는다. 어제 우도를 다녀와 오늘은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 여행은 이틀이 남았다. 마침 흐리고 미세먼지 예보까지 있어, 오늘은 딱히 큰 일정을 잡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도 수차례 자문하곤 했던 "이게 한달살이 맞나?" 라는 문제의식의 나름의 반성이기도 하다. 제주도에선 스무레, 그리고 남도에서 닷새. 중간에 13차 쯤 되어서 숙소를 한번 옮겼다. 그것이 우리의 여행이 반달살이라고 이름 붙여진 약간의 이유다.


그러나 단 하루도 쉬지 않고 7시에 일어나 12시에 잠들며, 낮잠은 자지 못했고, 잠자리가 낯설어 여러차례 새벽에 깨곤 하는 날들을 보내고 나니 여행의 끝이 다가올수록 체력이 달림을 느꼈다. 마침 추운 겨울에 여행이 시작되었고, 가고픈 곳은 많아 바삐 다녔다. 원래는 한달살이라는 것이 이다지 바쁜 것은 아닐 텐데 말이지. 한달살이라기보단 관광. 머무림이라기보단 이어짐의 날들. 나는, 그 와중에도 여러권의 책들을 싸고 와 스스로의 마음의 족쇄를 채웠다.

아침을 근처의 두루치기식당에서 먹고 비밀의 숲이란 곳을 찾았다. 개인 사유지라서 입장료가 2천원이 들었다. 비자림 근처이고 하니, 성수기에는 부쩍 입장객이 늘어날 것이다. 올레길은 모두 공짜에, 아름다운 오름도 숱하게 많지만 길은 길이고 오름은 오름이다. 나름 알뜰하게 관리되고 조경된 숲은 그 나름의 정취가 있다. 멀찍이 차를 대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천천히 걸었다.


미세먼지가 뿌옇다. 오늘 우도를 갔더라면 굉장히 아쉬웠을 텐데 오히려 숲길이라서 흐린하늘도 위안이 되었다. 흐리지만 포근한 날에 이어 자욱한 미세먼지까지 보고 나니 정말로 봄이 휘적휘적 큰 보폭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나는 등에 천천히 열기가 오름을 느끼며 자켓의 지퍼를 열고 바람을 맞았다. 일요일의 느긋함이다. 이런 날엔 좁은 숲속 오솔길도 좋지만,

탁 트인 평원이다. 비밀의 숲의 초입에 들어서자 침엽수들은 잠시 뒤로 물러서고 초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꽤 넓은 들판이 막 싹이 트는 초록잎으로 감싸여있다. 조경 목적으로 들판을 비워둔 걸까. 올레길을 걷는동안 숱하게 보아온 버려진 귤나무들, 그리고 당근과 비트가 떠올랐다. 어떤 들판의 귤나무 아래로는 수확되지 못해 썩어가는 귤들이 마구 흩어지거나 한켠에 쌓여있는 반면, 이 넓은 땅이 나무도 없이 이렇다할 작물도 없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멀리로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산책을 하거나 사진을 찍으며. 삐죽삐죽 머릿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는 삐딱한 생각들을 고이 접어두려 애쓰며 나는 조용히 그리고 느긋이 햇살과 초록만을 몸에 담았다. 우리는 제주도에 와서 너무 많은 것을 맛보고 즐겼다. 유일하게 부족한, 휴식을 채울 차례다. 저 멀리 오름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장료를 지불하고 숲으로 들어간다.

비밀의 숲의 경우 2천원의 입장료가 아깝지는 않다. 다만 그것은 비성수기, 날씨가 좋으면서도 한적하게 둘러볼 수 있을 경우다. 오늘 같은 날엔 삼삼오오 가족들이 느긋하게 한두시간 걷기에 참으로 좋은 공간이지만 곧 5월이 되고 9월이 다시 찾아오면 이 작은 숲은 삼각대와 셀카봉을 든 젊은 여행객들이 발 디딜 공간이 좁아지도록 찾을지 모른다. 그리고 진입로는 기나긴 주차의 행렬로 몸살을 앓을 것이고.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공간이 초원과 침엽수림으로 구성되어 여러가지를 구경하긴 좋지만, 다른 한가지 문제는 쉼터가 적어서 중간에 발길을 쉬고 싶어도 쉴 공간이 없다. 다행히 우리는 체력이 충만한 상태라 두시간 정도 산책을 하더라도 특별히 몸이든 다리든 쉴 필요까진 없었지만, 조금 지친 상태로 이곳을 왔다면 천천히 초원을 걷는다는 합의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또 이 평원과 숲지대를 헐어서 그곳에 쉼터를 만들라는 주문은 더욱 무리일 테다.


아차. 또 생각이 복잡해져버린다. 쉬자. 쉬자.

"산굼부리 갈까 말까?"

"괜찮긴 해. 억새 보려면 가자. 이번에 억새 제대로 못봤잖아."


수달이가 찜해둔 카페를 한두군데 더 들르고 나니 해질 무렵이 다가왔다. 수달이는 흐린 날씨로 인해 산굼부리 방문을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두 해 전 겨울에 친구들과 제주도에 놀러 왔다가 산굼부리에서 꽤나 괜찮은 풍경을 감상했기에 고민하는 수달이를 이끌고 차를 몰았다.


그런데, 막상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보니 12월의 산굼부리와는 또 다르다. 그나마 억새가 풍성해보였던 그때완 달리 여엉 억새가 마르고 풍성하지 않아보인다. 아차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예쁘게 사진이라도 찍어주려고 이리 저리 포토존을 찾아서 수달이를 세웠다. 그러나 나도 수달이도 한달을 그렇게 놀고 먹었으니 잔뜩 얼굴살이 부풀어 있는 것을 어쩔꼬.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는 수달이를 놀려댔고, 다가오는 설날까지 포함해서 다이어트 계획도 함께 세웠다.


그러니까, 몸의 휴식 마음의 휴식에 더해서, 위장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위장에 좋다는 양배추를 다시 씹을 계절이 당연히도 찾아왔다.

"야 이거 재밌다. (한입 더 씹으며) 이거 백종원 흉내임."

"오빠 이거 먹어봐. 향신료 느낌 살짝 나는데."

"음...아냐 향신료가 아니라 엄청 진한 무 국물이야."


그리고 그날 저녁은 우동을 택했다. 어떻게 하면 좀 가비얍고, 칼로리 높지 않고, 그러면서도 제주도 스멜은 살짝 풍겨야 하고, 맛까지 있어야 할까 수십군데 식당을 고르고 고르다가 수달이까지 만족할만한 식당을 골랐다. 우동이라면 인정이지. 한달의 혹사로 지친 위장에 딱 한가지 힐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이 또 재미가 있다. 곱창우동과 고기우동. 그런데 곱창우동은 누가 봐도 딱 칼칼한 쇠고기김치국 베이스의 국물에, 고기우동은 찐~한 쇠고기무국 베이스다. 적절한 퓨전인데 맛도 있고 그 맛이 주는 기시감에 웃음도 난다. 이렇게 한식과 우동을 재해석해서 요리를 만들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의외로, 살짝 가미된 김치 맛이 곱창과도 어울려서, 꽤나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다만 그날 밤, 많이 걷고 가볍게 먹은 하루를 마감하며 나는, 그리고 수달이는, 자정이 다 되어서 기어코 참지 못하고 과자를 꺼냈다. 나는 거기에 막걸리, 거기에 맥주까지. 하루 푹 몸과 머리, 그리고 위장을 쉬게 해주었으니, 이제 내 영혼도 조금 쉬자. 우도 땅콩 막걸리와 함께 농협에서 사온 "부드바이저" 맥주로 그날은, 진짜로 꿀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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