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함덕, 김녕
사실상의 마지막, 제주도에서의 아침식사가 되었다. 내일 오후 네시배를 타고 올라간다. 그리고 내일의 아침메뉴는 남아있는 햇반과 햄으로 정해져있다. 성산일출봉 근처의 맛집을 골라서 조금 애매한 브런치 타임에 왔는데 에쿠. 40분이나 대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수달이와 가게를 다시 나와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날은 너무 화창하고 좋은데, 바람이 분다. 너무 너무 분다.
유채꽃은 이제 제주도 곳곳에 흐드러진다. 섭지코지라도 가볼까 한번 농을 걸었지만 그런 관광지를 들를 일은 없어서, 스타벅스도 들를겸 바람을 뚫고 걷다가 입장료를 받고 사진을 찍도록 해주는 포토존을 또 한번 만났다. 바로 그 뒤에는 올레길을 겸하여 양쪽으로 유채꽃밭이다. 유채꽃이 피고, 곳곳에서 입장료를 받기 시작하니, 그러고보니 2월이 되어 확 여행객들이 늘었다. 부쩍 식당에 사람도 늘었고, 심지어 우도에서는 먹고 싶은 메뉴가 12시도 되기 전에 재료가 소진되는 일도 있었으니까. 명절을 끼고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퍽 많은가보다. 이, 무지막지한 바람을 뚫고서라도. 봄은 봄이니까.
다시 바람을 뚫고 시간을 맞춰 식당으로 향한다. 갈치 반, 고등어반인 맛나식당의 모듬조림은 짭쪼롬하고 단 것이 입맛을 당긴다. 북적거리는 일요일 아침의 활기로 가득한 곳에서 큼직한 갈치를 손질해 먹고 있노라니, 이것 참 갈치는 담백한 맛이고 고등어는 기름진 맛. 이름 난 맛집에서 훌륭한 갈치조림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먹을 수 있으니, 그래 마지막 아침으로 딱이로구나. 젓갈과 김치, 숙주를 더 받아 아침식사를 배부르게 끝냈다. 시원한 바람이 아침식사로 따숩게 덮혀진 몸을 달래준다. 오늘은 어딜 걷게 될까 생각을 하면서 우선 한군데 수달이가 점찍은 카페로 향한다.
<노인과 바다>를 다 읽었다. 오후 반나절, 오전 반나절 해서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짧은 책이다. 문학 책을 읽은 게 몇달만인지 기억도 나지를 않는다. 5월부터 다시 대학원 시험 공부를 시작했었으니, 적어도 10개월은 넘었구나. 음, 그 전에 겨울 내내 철학서를 팠다. 1년이 넘었군 젠장.
생각의 족쇄를 스스로 풀어내자 여러가지 읽을 책들이 다시 떠오른다. SF소설과 공포소설을 제법 모아놨다. 2월 남은 시간은 날 위해 보내야지. 집에 가서 게임도 마음껏 하고, 아이폰 음악도 싹 좀 정리해야겠다. 한달 내내 차를 타고 놀러다니니 쓸데없는 음악이 폰에 많은 게 가장 거슬린다. 날 위한 시간이라. 일에 더해 참 오래 공부에 매달렸다. 입학 그리고 개강 뒤엔 더욱 나의 삶은 조바해질 테니, 명절부터 이어지는 짧은 시간에 충분히 쉬어두어야겠다. 패배했을지언정 결코 실패하지는 않은 노인의 삶 속에 내내 약동하고 있는 그 용기를 보며, 나는 나의 삶을 조금쯤은 성찰했다. 좋은 시기에 좋은 책을 읽었어.
그건 그렇고...어떻게 이렇게 바람이 분단 말이냐. 차가 휙휙 바람에 밀리는 느낌. 차에서 내리자마자 머리카락이 휘날리면서 눈조차 뜨기 힘든 이 감촉.
한결같이 델문도가 지키고 있는 함덕 해변에서 단 5분도 산책을 하기 어려운 제주도의 바람을 다시 실감했다. 나름 두껍게 껴입고 있는 나조차도 영상 기온의 칼바람에 뼈가 시렸다. 이 무서울정도로 거센 바람에 그런데 서핑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 큰 바람막을 몸에 연결하고 손으로 컨트롤해가며 1m 가까운 높은 파도를 이리 저리 곡예를 부리듯 서핑을 즐기고 있다. 세에상에나. 파도가 한번 화락 하고 부딪히는 서슬에, 3,4m 정도 잠시 고공비행을 하더니 다시 바다에 안착을 한다.
함덕서우봉길을 걷기에 딱 좋은 화창한 하늘이건만, 이래서야 여행 마지막 날에 탈진을 할 기세다. 잠깐 함덕 해수욕장을 거닐다가 후다닥 차에 타버렸다. 아 어떻게 하지, 고민을 하다가 급하게 또 시간을 보낼 카페를 찾았다. 오늘 만보걷기는 완전 틀려버렸다. 김녕 해수욕장에서 역시 잠깐 차를 세워 구경을 하다가 카페를 찾았다. 바람은 코가 막히게 불지만 그러나 이 화창한 날씨가 기가 막히다. 해안도로 툭 튀어나온 카페가, 범상하지 않다.
누구라도 <이터널 선샤인>을 떠올릴법한 해안가의 침대, 피아노, 욕조. 인스타그램을 위한 컨셉형 카페인듯하지만 나라도 이런 날씨에, 이 정도 풍경이면 홀리지 않을 수 없다. 평소와 다르게 수달이를 여기 앉히고 저기 앉히며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제주도 곳곳에 흩어진 수천 수만개의 카페에 오늘은 구원을 받았다. 바깥에 바람은 너무 불어 길을 걷기 조차 힘든데, 날씨가 흐리거나 이런 카페들이 없었더라면, 어딜 가서 앉아있었을까. 그러니까 사람의 고집이나 사고방식은 그저 하나의 고정된 환경에서 생겨나는 단면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조금만 환경이 바뀌어도, 약간만 상황이 달라져도, 사물은 다르게 인식되고 사고에 수렴된다. 늘상 존중은 하지만, 마음껏 놀려먹기도 하는 아내의 카페 사랑. 비록 테이블 좌석이 아니라서 쿠션에 앉아 벽에 대고 책을 읽는둥, 폰을 하는둥 빈둥거리고 있지만, 쉬기로 한 이상은, 통유리 덕분에 따끈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저 햇살을 잠시 바라보며 오로지 파도의 펄럭임에만 집중해본다. 이 색깔이 그리워지기도, 하겠지.
카페에서 카페로. 다른 방법이 없다. 이번엔 아보카도커피? 그런데 이거 괜찮다. 김녕에서 세화로 또 바닷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수많은 카페 중에 한 곳을 골랐다. 커피 메뉴를 일임하여 수달이가 마음대로 시키도록 해서 마신 모든 커피 중에 이게 최고다. 갈아낸 아보카도와 에스프레소샷이, 어울릴까 싶기도 한데 흐음 의외로. 아보카도를 먹고 싶으면 그것만 먹어도 되고, 에스프레소만 쪼옥 먼저 빨아먹어도 되고.
그리고 해가 저물길 기다리며 우리는 이곳에서 꽤나 진지한 대화를 격렬하게 해 나갔다. 각자 한살을 더 먹었다. 결혼생활도 새로운 국면이다. 나는 대학원, 수달이는 힘겹게 견녀낸 일을 극복하고 이게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 보호자이면서 자립심을 요구하는 완고한 태도의 나는 참견과 간섭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내 생각을 꼬치꼬치 말했다. 이야기는 길어진다. 그러나 감정이 터지거나, 다툼이 발생하진 않았다.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서로를 끼고 살아야 하는 우리는 마치 조금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저 아보카도와 에스프레소처럼. 나름, 맛은 있다.
마침내 카페의 유리창에 붉은 빛이 비쳐, 노을을 맞으러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노을은 붉디 붉게, 쾌청한 하늘에 여러겹의 구름이 저마다의 불투명도에 따라 노을빛을 비추거나 가리거나 하면서 하늘을 수놓고 있다. 서서 보기엔 너무나 춥다. 차를 잠시 몰아 세워두고 유리창을 통해 한동안 감상을 했다. 여전히 파도는 철썩철썩 무섭게 휘몰아친다. 바람은 그러나 불어야하지. 선택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늘 노심초사하는 수달이에게 나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선 그만 고민하자는 말을 던진다. 바람은 불도록 두고, 삶은 스치도록 두고, 오늘 하루 지금 여기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한 삶이다.
1월 16일에 시작되어 2월 9일에 마무리되는 우리의 25일간의 여행은, 관광으로 시작되어 머무름으로 결국 옮아갔다. 그 사이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었고 얼음장처럼 얼어붙어있던 각자의 고민거리들은, 어쨌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얼음에서 물로 바뀌는 정도의 변화는 이루어졌다. 여전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대하는 우리들을 빼고.
그날, 저녁 메뉴를 갖고 옥신각신을 하며 배가 부르도록 여러 음식을 샀다. 마지막 날은 홈파티다.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굳이 닭강정을 사야겠냐며 슬금슬금 눈치를 주던 수달이는 닭강정의 떡튀김을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해치웠다. 너에게 떡볶이란...대체 무엇인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