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 애월, 한림
여행 후반전의 시작이다. 우리의 오늘 하루는 가장 정석적인 스케쥴로 이루어졌다. 먼저, 아침에 내가 일어나서 글을 쓰든, 책을 읽든 하고 있으면 수달이가 침대에서 내려와서 아침을 먹자고 한다. 여행을 하며 수집한 빵들이 아직 남아있어 그걸 먹겠냐 하니 빵은 지겹단다. 그렇다고 라면도 벌써 일주일간 세번인걸. 비빔면을 끓여달라길래 아침에 추우니 국물있는 라면으로 내가 바꾸었다. 애호박을 넣고 계란까지 두개 풀어서 푸짐한 아침 한상.
그러고 나서 세탁기에서 빨래를 찾아와서 정리를 하고 아침 일정을 시작했다. 오션뷰 카페로 만족하지 못하는 수달이는 이번 여행에서 구옥을 개조한 카페만 집중적으로 찾아서 가고 있다. 이런 정도의 감성은 나도 환영이다. 마당이 보이는 통유리를 마주하고 편하게 차를 마셨다. 첫번째로 찾아간 카페는 깜짝 놀랄만큼 카페도 디저트도 예뻤는데, 다만 디저트의 경우 꾸밈새에 비하여 맛이 훌륭하진 않았다. 약간 공갈빵 같달까. 그러나 커피는 또 괜찮아서, 이정도면 한적하게 얼마라도 쉬다가 가지 싶다.
오늘은 중학교 졸업생들의 고등학교 배정 발표일이다. 점심시간 무렵에 학교의 행정실무사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통과 홈페이지가 동시에 불이 나, 홈페이지는 이미 뻗었고 실무사님도 뻗을 판이다. 나는 교복 업무를 지난해에 담당했었기에, 2월까지는 아무래도 업무에 참여하고 있다. 미리 짜둔대로 교복 수령 일자표를 다시 정리해 전화응대를 할 수 있도록 보냈다. 이런 부분까지도 정석적인 방학 스케쥴스럽다. 방학 때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선생님들이 있는 건 다른 누군가가 방학 때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교직생활의 대부분을 신학기 준비를 많이 해야 하는 업무로 보냈다. 그리고 남은 여행 후반전은 생기부 점검을 위한 시간을 더 할당해야 한다. 이래저래, 편하게 놀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이런 일정이 나와 수달이의 반달살이.
그러나 저러나 수달이가 오늘 고른 카페 세군데는 저마다 특색있고 개성이 뚜렷했다. 특히 두번째 카페가 그랬다. 8,90년대 소품들이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정말로 88올림픽 시절 동네의 중산층 가정에 놀러간 기분이다. 등나무소파와 테이블에 깜짝 놀라고 미키마우스 컵 세트에는 경악을 할 정도. 어린 시절에도 이런 물건들은 제법 사치스러운 물품들이었는데 낡거나 값이 떨어졌거나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시대가 변했다는 이유로 우리 주변에서는 사라졌다. 사람이 나이를 먹듯 물건들도 나이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긴 하지만, 물건들이 그저 유행이 지났기에 버려지는 것은 과도히 빠르게 변하는 현대소비사회의 명백한 문제다.
이번 여행의 중요한 테마는 제주도 5일장 둘러보며 떡볶이 사먹기다. 대정, 서귀포 5일장에 이어 한림 5일장에 당도했다. 그런데 세군데 주에는 가장 작다. 한림보다도 규모가 작아 시간이 맞음에도 제외한 다른 5일장이 한두군데 정도 된다. 한림 5일장은 딱 커트라인이랄까. 그런데 대신에 애월이나 협재와 가까운 지리적 여건 덕분인지 가장 현대적이다. 드립커피를 파는 말끔한 좌판에서 유명 김밥집 수준의 김밥 네종류를 팔고 있었다. 수달이의 떡볶이 투어만 아니었다면 김밥을 사먹을뻔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림 5일장의 떡볶이집은 다른 두군데에 비해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튀긴지 오래되어서인지 완적히 식어있다. 나는 김말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꼭 시키는 편. 그런데 씹는데 속에 당면이 완전히 굳어있을 정도다. 어마어마한 양을 튀겨서 즉석에서 내어주는 대정의 떡복이 집이나 솥은 작지만 바쁘게 여러가지를 튀겨내는 서귀포를 먼저 다녀와서 더욱 비교가 된다. 오죽하면 수달이가 "오뎅국물 맛집이네."라고 할 정도였을까.
그러나 나는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미션을 수행한 제주도 순대먹기 덕분에 구원을 받고 있었다. 수달이와 제주도 5일장을 순회하면서 가는 곳마다 돼지고기를 파는 상점을 만났다. 머릿고기 부속고기 할 것 없이 돼지고기 특수부위라면 환장을 하는 나에게 순대와 기타 다양한 부속고기를 파는 5일장은 꿈의 장소와 다름이 없다. 떡볶이를 함께 먹어야 하니 지난 두번은 깔끔히 포기했는데 급기야 참지 못하고 오늘은 미리 "나 오늘은 순대 먹을거야!"하고 질러둔 참이다. 돼지껍데기 볶음도 정말 땡겼지만 아직까진 그런 여유는 없다. 대창순대 딱 5천원만 포장해서 떡볶이집에 오자마자 나는 순대를 꺼내먹기 시작했고, 수달이가 떡볶이에 대한 좋지 못한 평가를 내릴 때까지 뜨끈한 순대를 먹으며 행복에 빠져있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5일장에서 껍데기 볶음을 포장해서 숙소에서 막걸리와 함께 먹고 싶은데 어렵지 않을까. 입 짧은 사람과 사는 건 아쉬운 일이야.
저녁 식사를 위해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오늘의 만보걷기는 올레길 15코스로, 납읍초등학교라는 곳에서 시작. 애월 권역인 중산간 마을로 전체적으로 현대화가 많이 진전되어 있다. 그래서 동네를 걷기만 해도 산뜻한 기분이 든다. 올레길과 올레길이 아닌 곳을 섞어서 빠르게 한시간 반 정도를 걸으니 수달이가 피로함을 표한다. 점심을 탄수화물로 범벅해서 먹고 카페를 세군데를 갔으니 당연히 배가 꺼질리가 없는데 더 걸어야 하지 싶지만, 만보 걷기 목표는 대강 채웠다. 나는 알았노라 하고 다시 차로 길을 잡았다.
납읍에서 호기심이 가는 장소가 두군데. 하염없이 길을 걷고 있는데 누가 봐도 귤창고인 건물에 "이음 문방구"라고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뭐야 저거 이상한데."
"응? 뭐?"
"저거 누가 봐도 창고인데? 문방구라고 붙어있어!"
"에이 도매하는 곳인가보지 그럼."
"여기에? 설마?"
더 다가가 보니 아이들 신발이 여러켤레,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슬쩍 유리문 너머를 훔쳐보니 청소년 문화공간인가보다.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음악을 크게 켜고 어울리고 있었다. 지도교사 선생님도 있고 코로나 부담으로 들어가보지 못했지만 이런 공간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 역시 여행의 즐거움이다.
또 한군데는 케익숍과 서점을 함께 하는 공간인데 2층 다락방에 올라가면 책이 가득 있고 좌식 테이블이 있는 것 같다. 비가 오면 그곳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사실 오늘도 들어가려면 들어갔겠지만 기껏 저녁 먹기 전에 배 꺼트리려고 걷는 중인데 케이크숍에 들어가는 건 말이 안되잖아. 대신에 비가 오는 날이면 다락방 천장으로 빗소리가 울려퍼지지 않을까. 그땐 배가 아무리 부르더라도 그곳에 가자고 단단히 약속을 했다.
열심히 걸은 보람이 있다. 이틀 전에 수달이가 예약해 놓은 작은 초밥집이 저렴한 오마카세 메뉴를 섬세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앉은 자리가 VIP석인 느낌으로, 6석의 작은 테이블에 모여앉은 손님들에게 초밥에 대한 설명을 모두 내 접시에서 해주셨다. 덕분에 직접 발라주신 간장과 와사비를 먹으며 더 큰 즐거움을 누렸다.
맛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커피의 맛을 구분하게 된 것이 요 몇년간 하루에 서너잔씩을 꾸준히 먹어옴으로써 쌓아올린 감각이라면, 초밥 역시 그런 정도의 경험의 축적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수달이와 나 모두에게 초밥은 좋긴 하지만 자주 선택되는 메뉴가 아니다. 그래서 어느정도 가격대가 되는 초밥집에 가면 뭐든 즐겁게 먹고 맛있는 줄은 안다.
다만, 오늘 다녀온 스시 애월의 경우 오마카세의 형식으로는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데 그에 비하여 쌀알이나 초밥의 감칠맛과 신선함은 무척 훌륭했다. 숙성회의 진짜 맛이라거나 하는 건 몰라도, 쌀알이 하나 하나 잘 살아있다는 건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향긋한 와사비도.
초밥을 하나씩 먹을 때마다 녹차를 꼬박꼬박 천천히 마셨다. 그런데 이채롭게도 동서 현미녹차 티백이다. 굳이 속일 것도 없이 당당하게 티백을 보여주는 것은 이 가게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장면이라서 재미가 있다. 물론 맛도 좋았거니와. 이런 부분에서 절감된 원가가 초밥과 횟감의 품질에 투자된다면 대환영이다. 참치 대뱃살 초밥이 두점, 미니 뱃살덮밥이 서빙되었는데 참치뱃살은 너무나 맛있고 기름져서 퍽 많은 와사비를 올려주셨음에도 조금도 맵지가 않을 정도다. 요 티백은 그런 초밥에 대한 자신감인듯싶단 말이지.
그리고,
"오빠 새우 먹어. 나 이제 배불러."
"으엉?"
수달이는 나에게 새우튀김을 양보했다. 주방에서 갓 튀겨져 나온, 포실포실 토실토실한 새우튀김을.
"아냐 너 먹어 이거 방금 튀긴 거잖아."
"나 배불러."
"헐 대박. 찐사랑이네."
이 사랑은 찐인가 싶다. 세상에 새우튀김을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이 결혼, 하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