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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l 28. 2021

Check-in 영월

#Story 01. 야 이게 힐링이네

 "Check-in 영월" 프로젝트 선정자들은, 사전에 숙소를 영월군청의 담당자님께 연락을 취해서 숙소로 기념품과 안내자료들을 받을 수 있다. 당연히 나는 사전에 숙소를 알리지 않았지. 3일 전에 메일을 보냈어야 하는데, 여행 전날 보냈다. 그래서 오늘 출발한 뒤에 답메일을 받았다. 우리가 군청으로 받으러 갈 수 있겠느냐 여쭈어봤는데, 다행히 와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잘됐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내 상태가 여러모로 좋지 못했다. 심지어는 바깥양반과 여행일정을 대강 정리한 자료를 날려버렸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클라우드 문서를 이용하면 날릴 고민 따위 없었을 텐데. 거실에 둔 낡은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던 게 잘못이다. 귀찮더라도 내 노트북을 따로 꺼낼 것을. 그러나 바깥양반은 그런 내 실수를 잘 메꿔서 세곳의 체험프로그램을 예약해뒀고, 숙소도 모두 잘 잡아두셨다.

 영월군청에서 기념품을 받아 건물을 나오자 탁 트인 하늘 아래 영월읍이 한눈에 들어온다. 벌써 덥지 않았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캐리어와 짐가방 몇개를 차에 싣는 그 짧은 과정만으로도 땀이 났는데, 한동안 서서 사진을 찍으며 구경을 해도 그럭저럭 참을만한 더위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하늘 아래, 읍내 곳곳에서는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이 목격되었다. 읍내 어디서나 하늘을 바라보면 낙하산을 볼 수 있을듯했다. 산과 하늘이 곧 영월이랄까.

 간단히 늦은 점심을 먹고 닭강정을 사러 가기로 했다. 지난 주말 이틀 연속 막국수를 먹은 터라, 오늘은 막국수 말고...동치미국수. "생활의 달인"에 방영된 식당인데, 생활의 달인이 그 많은 맛집 안내 프로그램 중에서도 유독 신뢰도가 낮긴 하지만, 그래도 설마 영월까지 와서 그런 못된 짓을 할까, 또, 영월읍내 이런 식당이 굳이 생활의 달인에서 수작을 부린 것에 이익을 볼까 싶어서 납득하기로.


 다행히 국수는 7천원의 값을 무난히 한다. 알싸한 국물이 보통 동치미보단 진하고 김치말이국수보단 상큼하다. 당근과 무 동치미 조각이 하나씩 들어가 있었고, 내가 근래 먹은 소면 중에 가장 탱글탱글한 면발이 국물과 잘 어우러진다. 다만 삶은 달걀을 두개 천원에 별도로 파는 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영업방식이다. 호불호가 갈려 먹지 않는 사람도 있긴 한 것이지만 삶은계란이란 것이, 어차피 맛보다는 꾸밈으로 쓰이는 것인데 굳이 손님이 얼마나 시킬지 모르고 삶아서 마련해둔다는 건 좀 이상한 일이다. 콩나물국밥에서 계란을 따로 파는 경우야 이해가 간다만.

 읍내가 작아 어디든 한달음이다. 연당동치미국수에서 나오면 두 길 건너 일미닭강정이 있는 영월서부시장이 눈에 들어온다. 서부시장이 있단 것은 중앙시장도 있다는 것일 텐데, 과연 그렇다. 중앙시장이 따로 있다. 나중에 시간 날 때 들러보기로 하고, 차를 조금 움직여 닭강정과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기로 했다.


 수도권의 우리집에서 영월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다. 영월읍내에서 숙소가 있는 김삿갓면까지 또 시간이 제법 걸린다. 그리고 밤에는 별마로 천문대 일정도 있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점심과 저녁을 한꺼번에 해결하고 숙소에 들어가기로 하고, 국수만 늦은 점심으로 먹고 온 것이다.


 익숙한 일미닭강정과 중부내륙. 영월 원픽 맛집이 마주보고 있다. 평일 낮이라 운좋게도 웨이팅 전혀 없이 닭강정 만원어치를 사고 중부내륙으로 간다. 지난번 영월 여행 때 일미닭강정을 맛보고 굉장히 만족해서 다음날 다시 들러 친구 두 집에 택배를 부쳤었드랬다. 먹어본 친구들도 다들 만족.

 그리고 중부내륙은, 과연 오늘도 만족스러운 커피를 뽑아주었다. 바깥양반이 밀크티를 시키려다가 솔드아웃되어(평일 오후 5시 기준) 미숫가루를 시켰는데, 시중에 파는 미숫가루랑 많이 다른 맛이었다. 오렌지 종류의 새콤한 맛과 흑임자류의 구수함이 섞여있는맛이다. 뭐 뭐 들어갔는지 물어보았는데 답을 듣지는 못했다.


 반면에 나는 필터커피로 케냐를 주문해, 한 모금 마신 뒤 20초 뒤에 진동하는 후미를 느끼며 사장님의 커피 실력을 다시 실감한 참이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마침 정비 중이어서 필터로 시켰는데, "케냐를 시키신 게 산미를 원하시는 건가요?"라고 그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로 내게 질문. 이심전심으로, 산미 없이 밸런스 좋게 추출된 커피가 훌륭하다. 나는 두세번, "또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두어모금 잠시 앉아서 마신 뒤에 카페를 나왔다.

시장에서도 눈만 돌리면 산, 구름, 하늘
군청에서 준 빠방한 물품들

 숙소는 컨테이너형 독채펜션이다. 외장에 비해 내장이 훌륭하다. 영월이 이름난 관광지가 아직 아님에도, 알음알음으로 찾는 사람이 많은지 바깥양반이 가려던 숙소들은 여럿 만실이 되어 있었다. 5월말~6월초에 비교적 부지런히 숙소를 잡았는데도.


 게다가 오늘로 임신 8개월 하고도 3일째인 몸이라, 꼭 가고 싶었던 한옥민박들은 포기해야 했다. 오늘 하루만 이곳에서 보내고 이틀 정도만 한옥에서 지내보기로 했다. 임신이 아니었다면 일주일 모두 한옥에서 지내면서 몸빼바지도 입어보고 했을 텐데. 아이가 생겼으니 그런 일은 아주 먼 미래가 되었다.


 아이 이야기를 하니, 오늘 출발하기 전에 28주 입체초음파를 촬영하고 왔는데 아침 일찍인지라 아기가 엄마 뱃속에 아주 온몸을 파묻고 자고 있어서 한참 고생을 시키고도 얼굴 반쪽만 겨우 찍을 수 있었다.

 

 또 한편, 엄마의 임신과 체온 상승으로 나는 콩을 엉망으로 볶았다. 사연이 좀 긴데, 원래부터도 여름이면 바깥양반은 에어컨을 나보다 먼저 켜는 편이긴 했지만 임신을 하고 나선 5분 정도만 에어컨이 꺼져있어도 바로 더위를 호소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니 상당히 연기가 발생해서 앞뒤로 통풍을 반드시 시켜야 하는 원두 볶는 일을 내가 할 수가 없었던 상황. 그런데 길게 여행은 와야 하니 커피 내리는 물품들과 콩은 필요하고, 홍차라도 챙겨갈까 하다가 그래도 커피겠다 싶어서 어떻게 미루고 미루다가 어젯밤에 바깥양반과 상의를 하고 뒷베란다만 열고서 어찌어찌 콩을 볶았는데...


 처음 때처럼 엉망으로 볶아진 콩이 제법 나왔다. 2주일간 마실 300그램 정도 볶는 게 목표였는데, 그럼 세번을 볶아야 한다. 최소한 30분이 소모된다. 그런데 통풍이 제대로 될 리가 없으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에 극히 민감해지고, 로스팅 포인트를 조절하기 어려웠다. 결과는 상당히 덜 볶아진, 약배전이 아닌 그런 커피인데 게다가 그것을 볶은지 하루만에 먹으려니...

 대신에. 숙소 베란다에서 물멍을 때리며 커피를 내리는 기분은 퍽 괜찮았다. 비가 내리지 않은지 3주 가까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물 양이 적지 않다. 물소리가 시원하다. 모기 쫓는 미스트를 온몸에 치덕치덕 바르듯이 뿌리고 앞에 나 앉아 천천히 커피를 내렸다. 필터를 사야하는데 깜빡. 마침 펜션에 드립머신이 있어, 필터만 뽑아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혼자 쭈르쭈르, 이례적으로 맛없는 커피를 내려 혼자서 한참을 시간을 보내니 숙소에 와 낮잠을 자고 난 바깥양반이 베란다 창을 두드린다. 우리는, 바깥양반이 마저 모기쫒는 미스트를 바르고 나서 나란히 앉아 닭강정을 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앉아, 정말로 오랜만에, 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게 힐링이란 거구나. 책을 볼 때 주의를 분산하기 위해 틀어놓는 ASMR 대신에 정말로 물소리, 정말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물멍에 바삭한 닭강정이면, 더 필요한 것들이 없네. 몇해간 쫓기든 달려 살아오다가 이렇게 한가롭게 앉아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마음은 바빴고, 앞날은 두려웠다. 물론 지금도 갈 길은 구만리이긴 하지만 이젠 가야할 방향도 그 경로도 얼추 이해하고 있어서, 비로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내게 인식되고 있는 것인지도.


"아 아아 아아아아 졌다."

"질 수도 있지 뭐."

"너무 양궁만 메달을 따서, 다른 종목도 따길 바랐단말야."


 내가 한참 훌훌 나 자신을 벗어던지고 있는 동안, 바깥양반은 펜싱 단체전을 보며 탄식과 함성을 번갈아 발하고 있었다. 올림픽만 되면 도무지 중계로부터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그녀. 


 미스트가 효과가 있어서 해가 산 너머로 잠기고 한참 뒤까지 우린 산속 공기를 맞은 뒤에 다시 방에 들어왔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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