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그 조신함에 대하여

좋은 미러링이란 것도 있는 법이죠.

by 공존

“나중에 동백이에게 꼭 그림을 가르치겠어.”

“어어?”

“그래서 엄마 아빠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라고 해야지.”

뭐어?”

나는 평생 아빠가 생선 발라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아빠는, 평생을 인내하신 것이었다. 이렇게.”

“으응 그럼 나는 아빠같은 남자 만나라 이렇게 가르치면 되지.”


마음에 들게 생선이 발렸다. 갈치의 등쪽 가시는 빠짐없이 발라내고, 짭쪼름한 뱃살에 달려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가시는 내가 밥과 함께 잘 씹어삼킨다. 갈치와 고등어가 1인분 치곤 넉넉하다. 값은 비싸지만. 그런데 이 식당, 반찬이 가짓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대단한 반찬도 아닌데 꽤나 맛있군.


갈치 뼈에 이어 고등어 머리뼈까지 대강 씹어 부순 뒤에 모아보니, 흐음. 꽤나 조신하게도 발라놨다. 그리고 나는 바깥양반이 상당히 엉망으로 살점을 털어간 갈치를 집어 나머지 살을 발랐다. 다른 생선이면 어지간히 먹도록 둘 텐데 갈치는 또 그게 안되지. 먼저 내 가까운 쪽 갈치토막부터 발라서 바깥양반 밥공기로 들어가니, 바깥양반이 먼저 손댔던 토막은 맨 마지막에 내 손길에 닿는다.


그러니까…

어지간히 먼저 손질을 하기 마련인 큼지막한 등지느러미뼈들이 붙어있는 살조각이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는 것. 나는 그것을 집어, 왼손으로 가시를 모두 빼낸 뒤 마저 바깥양반 공기에 넣어준다.


갈치는 척추와 위 아래 모두 뼈가 촘촘하니 길어서 손질에 요령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시”만” 빼내버리면 나머지는 모두 비싸디 비싼 그 갈치의 살점이기 때문에 발라낸 뒤에도 정성껏 살을 파먹어야 한다. 뼈를 발라내는 것 만큼 살을 살리는 각도 중요하다는 말씀. 그래서 나는 내 몫의 갈치를 발라먹게 되고부터는 어떻게 이걸 잘 발라먹을지를 고민한 끝에 꽤 요령껏 갈치를 해체하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쇠젓가락 만세다. 등지느러미를 최대한 첨예하게 떼어내고, 뱃살쪽 뼈도 죽 떼어내고, 척추를 위 아래 순서대로 바르는 것. 해물과 생선은 조기교육을 받아온 몸이라 갈치의 가시만 발라내고 살은 최대한 살릴 수 있다. 살을 발라내긴 더 어렵지만 더 가늘기 때문에 삼키는 것도 가능한 뱃살쪽 가시는 이따금, 오늘처럼 먹기도 하고.


그래서 마지막 갈치 뼈와 가시까지 남김없이 정리해 치우고 남은 살점을 나눠 먹으며 나는 조신함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조심스럽고 얌전하게도 발라먹었도다. 손재주라곤 조금도 없어 항상 생선을 먹을 때면 살점을 반 정도는 남겨서 나로 하여금 뒷처리를 하게 만드는 바깥양반관 다르게.

나에게 성장기는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내성적인 예술가 기질의 오타쿠가 꽤 도전적이고 정의감 넘치는 변론가가 되었고, 운동부족에 몸치라는 약점도 군대에서 대강 고쳐서 나온 뒤에는 장점으로 바꿔냈다. 못하는 게 날 괴롭히는 게 싫었다. 요리든 살림이든, 해야 하는 일인데 못하면 나만 귀찮고 구차하다. 이왕이면 잘 하는 게 좋지. 피자만 해도 세번째에 만족스럽게 도우를 부풀리고 소스와 치즈, 토핑을 정착시켰다. 갈치를 바르는 것도, 구태여 가사노동 분담으로 바깥양반이랑 아웅다웅해봐야 나만 귀찮고 성가시다. 수건도 잘 못 개는 사람에게 열을 내 봐야. 그런 삶을 바깥양반은 살아왔을 뿐이고 그런 남편을 만났으니 결혼을 한 것이지.


살림이든 능력이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것 혹은,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일이니 조신하게 남편이나 아내 몫을 하게 만들어주먄 조신하게 살 일이요 그런 집구석 만들이게 조력을 하지 않으면, 조신함이든 뭐든 가정의 덕목이란 사르르 날아가버린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남성의 조신함” 개념을 갖고 노는 여성들의 유희가 꽤나 좋은 미러링이라고 생각한다. 혐오의 복제보단 덕목의 복제가 낫지. 물론 남성의 조신함을 제대로 미러링하기보단 못되먹은 성희롱으로 보통은 사용되는 것 같긴 하다만. 뭐 상관은 없다. 쓰는 내가 똑바로 쓴다면 될 일. 그 또한 남의 일이다.


생선을 조신하게 발라먹는 남녀, 서로의 쓰임새를 보완해줄 남녀는 어떻게 길러지는 걸까. 알뜰하게 접시를 삭삭 긁어 남은 갈치 살점까지 주워먹으며 나는 바깥양반을 쳐다보았다. 대개는 제 손으로 생선 바르는 것도 못하도록 아이를 업어키우는 세태 탓, 일부는 너무 각박하고 바빠진 부모들의 삶의 환경 탓. 돈으로 해결되는 편리한, 그러나 비싼 세상의 탓. 생밤을 삶아 놓으면 그걸 간식으로 먹겠다고 일일이 손으로 까먹던 세상에서 다 같이 자라놓고서도 제멋대로 편의를 탐하며 살도록 소비를 부추기는 개인주의 세상 탓. 그런 저런 올가미들을 피한 것이 다행스럽다고 요즘 부쩍 느끼고 있기도 하다. 나이는 함께 먹어가는 판이고 세상은 갈수록 편리해진다. 바깥양반이나 오래 보아온 친구들이나 제 손으로 하는 일보다 편의를 추구하려는 모습을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보게 된다. 세월에 따라 더 편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걸까 그 반대일까.


불편과 부당함을 감내하는 것, 어찌 보면 그것도 조~신한 태도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생선을 잘 바르기 위해 고민을 하며 연습을 하던 것처럼 삶의 다른 문제들도 불편하고 부당하더라도 어찌어찌 하고는 살아왔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에 정직만하다면 그게 남자다운 것이든 여자다운 것이든 또 어떨 것이며. 아이를 기를 때나 대신 발라주지 않고 살아야겠다. 그러려면, 아이가 보는 앞에서 엄마 밥그릇에 생선 살점을 넣어주는 일부터 멈춰야 할텐에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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