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 잘 차려먹어 논란

얼마만에 짓는 쌀밥인가

by 공존

"오빠 내일 저녁은 친구랑 먹고 나 데리러 와."

"L 만나고 오게?"

"응 나갔다 오게"

"알았어...술은 못 먹을 테고...밥이라..."


바깥양반이 오랜만에 외출을 하기로 했다. 서울 들어갔다 나올 것이라 금요일에 충분한 시간이 내게 주어지긴 했으나 그러나 아마도 기말 과제로 바쁜 불금이 되겠지. 종강은 했지만 50페이지 가량의 보고서들이 남았다. 지금까지 밤마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느라 바깥양반에게 신경을 못 써 미안한 마음에 또. 수요일 종강을 하고 이틀 정도는 과제를 미루고 같이 시간을 보냈다. 잘 됐네. 금요일엔 불공이다. 그런데 저녁을 누구랑 먹지. 혼자 먹을까 직장 동생이랑 먹을까. 그러나 말끔하게 나의 고민은 해결되어버렸다. 앉은 자리에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가 퇴짜를 맞았다. 야자감독이 있단다. 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집에 가서 먹어야겠다.


학교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칼퇴를 했다. 집을 가는 동안에서 선지국이라도 포장해갈까 아니면 순대국을 포장할까 고민이 좀 되었지만 그냥 집으로 차를 몰았다. 괜히 밖에서 살 게 뭐있나. 찌개도 하나 끓이면 될 일. 바깥양반 입덧 때문에 2월말부터 집에서 쌀밥을 먹지를 않았다. 좋아. 좋은 기회다. 바깥양반은 외출하고. 직장 동생은 날 버렸다. 이왕이면 멋지게 혼밥을 하자. 밥도 제대로 하면 좋겠는데 반찬을 뭘로 할까.

"어디야?"

"집."

"응 잘 챙겨먹어."

"당연하지."

"저녁 메뉴는?"

"제육볶음 할라고."

"오."

"로라민씨."


집에 다 올 때 쯤에 제육볶음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깝게 "오늘의 밥상" 후보에서 탈락한 열무국수에게 위안의 박수 짝짝짝. 지난주에 안동의 지례예술촌에서 먹었던 제육볶음의 기억이 떠올랐다. 둘이서 찬합에 담긴 제육볶음을 나눠먹다보니 그래도 양이 부족하지 않았다고 말을 못한다. 자고로 제육볶음이란 접시가 넘치도록 푸짐하게 그 빨간국물과 함께 먹어야 제맛인데.


이틀전에 비빔면을 만들고 남은 오이와 양파, 그리고 대파를 꺼내 손질을 했다. 역시 이틀전에 고기를 구워 내고 남겨뒀던 돼지기름이 있다. 머릿속으로 여러가지 제육볶음 레시피를 굴려보다가 즉석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번 해보기로 했다. 백종원식 고기 먼저 야채 나중 제육볶음이 아니라...파를 먼저 볶고 고기를 뒤에 볶는 방식!

중간불에 파와 양파를 적당히 썰어넣어 20분 가량 중불에 볶았다. 한참 볶다보니 조금 타는 것이 보여, 불을 더 줄였다. 돼지기름에 양파 볶아지는 냄새는 정말 이보다 좋은 조미료가 없지. 냉동실에서 꺼낸 고기를 전자렌지에 1분 돌린 뒤에 싱크대로 빼내 조금 더 녹이도록 하고, 별다른 조미료가 필요 없으니까 고춧가루 약간, 간장 세스푼, 설탕 한스푼. 그리고 깻잎을 조금 올리기로 한다. 비빔면에 함께 들어간 동지들이다.


그런데 대파양파만 20분 정도 볶고 있다 보니 조금 문제가 있다. 심심하다. 아까 찌개 생각도 났었으니 그냥 김치찌개를 해보기로 했다. 지난주에 바깥양반 구워주고 남은 스팸이 조금 있어서 그것도 찌개에 넣으면 되겠구나. 마침 잘라놓았던 김치가 찬합에 딱 적당량 있다. 한끼 먹을 양이다. 반은 찌개로, 반은 반찬으로 먹으면 딱이겠다.


그러니까 오늘 나의 식사는, 차려는 먹는 것이되 온전히 새것들은 아니다. 비빔면을 먹고 남은 손질된 채소들, 상당히 상해서 손질이 많이 필요한 대파. 집에서 밥을 해먹지 못하니 냉동실에서 오래 대기중인 고기. 바깥양반이 못먹겠다며 멀리하고 있는 김치. 이것들을 모두 내가 처리하는 것이라니 주부의 마법치고는 조금 그래.


그러나 오늘같은 날이 아니면 이렇게 식사를 차릴 일이 또 언제 있을라구. 태동이 심해서 바깥양반이 입덧이 도졌다. 한달 가량 끊었던 입덧약을 어제부턴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차차. 밥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현미가 섞여 있는 쌀을 얼른 밥솥에 부어 씻어서 넣었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입덧이 심할 때 바깥양반은 채소든 곡식이든 풋내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린 알밤을 두봉지 샀던 것이 있는데 밥에 넣어서 한번 해줬다가, 그만 바깥양반이 질색하는 바람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꽝꽝 얼려만 뒀다. 아주 천천히 밤밥은 내가 소진해야 했다. 6개월차가 되어서야 겨우 쌀밥을 드시고 계시다. 조금 과한거 아닌가 할 사람도 있겠지만 입덧이란 그런것.


보글보글 찌개는 팔팔 끓여지고, 껍데기가 붙은 삼겹살은 충분히 볶아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깻잎을 투하했다. 배가 고픈데. 밥이 빨리 빨리 되지 않는다. 뜸을 들인다는 메세지가 나오길래 한 10분 남은 상태에서 팍 압력취사를 꺼버렸다. 현미가 조금 씹히겠군. 뭐 어때. 밥도 밥이지만 제육볶음 막 했을 때 뜨끈하게, 기분좋게 먹어야지. 오이도 먹기 좋게 썰고, 접시에 저마다 답았다. 잔반 대잔치이기 때문에 비우고 남은 통들이 착착 싱크대에 쌓인다. 설거지거리는 많아지지만 설거지 귀찮으면 집밥은 파이다.

탁탁 식탁에 올리고…제육은 깨소금과 참기름에 후추. 차례대로 솔솔. 오이는 초고추장을 뿌렸다. 됐다. 잘도 차렸네. 물을 꺼내려 일어나니 이번엔 김이 또 눈에 띈다. 김치찌개엔 당연히 김이겠다. 꺼내서 상태를 보니 이것도 집밥을 그간 못먹다보니 습해져서 원래 그 맛이 아니다. 아깝다. 참 맛있는 곱창김이었는데. 2월달에 아버지가 주신 걸 야곰야곰 끼니마다 맛있게 먹었는데 그걸, 겨우 3조각 남은 거긴 하지만 이렇게 묵혀뒀다니. 입맛을 다시며 접시에 올린다. 그래도 먹어야지.


맛있다. 김치찌개 시원하고. 제육은 목포한 바와 같이 대파와 양파의 향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오랜만에 먹는 아삭한 오이의 식감. 비빔면에 채썰어넣은 걸로는 느낄 후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밥. 뜸을 덜 들여 현미가 조금 토실토실하긴 하지만 맛나다. 딱 괜찮은 정도로 살짝 설익은 밥이다. 갓 지은 뜨순밥이니 김치찌개와 제육볶음과는 말할 것도 없는 궁합.


사실 나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소득이 있어서 3주만에 살이 퍽 빠졌다. 그러나 운동은 적게, 식단조절은 심하게 하는 1일 1식 다이어트이다보니 바깥양반은 자꾸 내게 뭘 챙겨먹으라 말을 한다. 그래서 오늘의 저녁 밥상을 일부러 최대한 호화롭게 차린 것이기도 하다. 저녁 한끼 겨우 먹는중인데 그것도 대충 대충 차려먹으면 바깥양반은 얼마나 또 걱정을 하겠냔말야. 덕분에 원래대로라면 가볍게 제육볶음이나 했을 걸, 그리고 열무국수도 맛있게 비벼졌을 것을, 공연히 이것저것 차리느라 시간도 잡아먹고 손도 많이 간다. 과제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사진을 찍어보내니, 바깥양반이 잘 차려먹었다며 마음을 놓는다. 걱정을 해줄 거면 굳이 자기 없을 때 잘 차려먹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집에서 자기가 뭐라도 차려주면 될 것을. 얘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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