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책을 읽어보라고 하지도 않는 건 좀,
"내가 읽을만한 책이야?"
"아-니 오빠가 읽기엔 너무 가벼운데, 채 오빠나 홍 언니에게 딱이야."
"...예상과는 다른 답변인데..."
인천에서 조촐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봉을 사기 위해 하나로마트에 들른 뒤, 올해 첫 제대로 된 가을 하늘 날씨를 이대로 보내긴 어렵다며 한군데 카페만 더 가자고 바깥양반이 말했다. 근처 카페로 가서 각자 책을 펴고 시간을 보냈다. 바깥양반은 책을 마치고 테이블 옆,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 실내 화단에 놓더니 사진을 찍는다.
<평범한 결혼생활>. 찍은 사진을 모임을 친한 언니들에게 추천의 말과 함께 보낸다. 반응이 어떤가 해서 봤더니, 평범한 게 가장 어렵다며 읽어봐야겠다는 응답이 올라왔다. 평범한 게 가장 어렵다라. 그래 그렇게,
평범한 결혼생활의 마지막 달이다.
집에 와서 한참 바쁘게 커피를 볶고 있는데 저녁에 겨우 겨우 갓난아이를 겨우 재운 친구의 카톡이 날아든다. 진짜 육아 개빡세다, 돌아버리겠다, 라며. 이틀 전이 결혼 4주년이었으니 우리는- 평범한 결혼생활을 48개월 꽉 채운 뒤에 이제 부부에서, 부모로서의 삶으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한달을 보내는 방법은 그래서,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놀러다니자는 것에 양자가 합의 타결하였다.
아이가 10월에 나오니, 더 없이 아름다운 가을의 하늘을 등지고 아기침대만 바라보아야 할 것이고, 단풍이 붉게 타오를 무렵엔, 서로의 눈에 터진 붉은 핏발을 바라보며 한숨을 나누고 있지 않을까. 아이가 이제 겨우 외출이라도 하게 될 시기에 공기는 한 없이 차가워질 것이고, 날이 풀려도 여전히 코로나는 우리 곁에 있게 될 것이니, 그 뒤에, 또 그 다음에 평온한, 평범한, 그런 결혼생활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4년이나 된 결혼생활에 뭐 새삼 그런 책이냐는 묻지 않았다. 바깥양반이 내게 책을 구매해달라고 했는데, 몇가지 다른 책이랑 장바구니에 담아두고서 뭘 살까 고민을 하는 사이에 바깥양반이 혼자서 책을 사버렸다. 보통 그러면, 이런 책은 부부 중에 한쪽이 다 읽었으면 자신이 읽고 느낀 것을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보라고 할 법하지 않은가. 그러나 바깥양반은, 그런 말도 없이 그냥 오빠 읽기엔 가벼워, 이 말과 함께 내 가방에 밀어넣는다. 물론, 나도 딱히 읽을 일은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
결혼생활은, 평범함이란 무엇일까. 나는 집에 와 한시간 동안 콩만 볶았다. 1년 6개월 간 볶은 콩 중에 가장 맛있는 콩을 발견했다. 그 김에 친한 형에게 콩도 보내고 더치커피도 다른 사람에게도 보내려고 조금 많이 볶으려던 참이다. 바깥양반은 혼자 거실에 누워있다가 한시간을 더 넘겨서,
"오빠- 밥먹어야죠."
라며 나를 일깨운다. 아하. 여덟시가 넘은 시간. 늦었다. 나는 냉동실에서 저녁거리를 꺼내 전자렌지에 돌리기 시작한다. 저녁거리는 뭐냐면...아구찜 양념이다.
"아니 오빠가 글쎄, 내가 소개팅 이주만에 피자집에서 피자 남은 걸 싸가는 걸 보고 알뜰한 건 알았거든? 근데 아구찜 먹고 볶음밥 해달라고 하잖아. 근데 그걸 먹더니 따로 남은 양념을 또 싸달라는 거야."
"아하하 맛있었나보지."
"아니...봐봐. 아구찜을 먹고 볶음밥을 해달라고 하면, 그 남은 걸 다 쓰지 않고 조금만 퍼가서 볶음밥을 하잖아. 그러니까 그거 남은 건 어차피 버려지는 거니까 집에 가져온 거지."
"아 근데 그 피자는 소개팅 2주만에, 그것도 제대로 된 피자도 아니고 씬 피자! 얇은 거!"
라는 대화가 오늘 낮 모임에서 오간 참이다. 40통이나 전화를 해서 예약에 성공한 골목식당 출연, 일산에 있는 아구찜 집에서 맛있게 먹고 남은 아구찜양념이다. 나는 오징어와 낙지를 소분냉동한 것을 함께 볶았다. 덕분에 상당히 볼품있는 저녁 식사가 완성.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고기를 양념에 재워둔 것도 함께 볶았다.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일요일의 저녁 밥상이 완성되었다. 역시 평범한 게 가장 어렵다. 냉장고에 파주 장단콩으로 만든 두부도 있는데. 두부를 넣고 김치찌개를 한다는 평범한 선택지는 그저 뇌리를 스쳐지나갔을 따름이다.
나는 콩을 마저 볶았다. 다시 바깥양반은 거실에서 오빠 없는 하늘 아래 고독을 씹으며 날 기다린다. 그리고 난 콩을 마저 볶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씻고, 거실에 앉으니 10시다. 집에 와서 세시간을 주방에 박혀서 일만 했다. 에어컨을 켜야 하기 때문에 통풍을 잘 하지 않고, 그러다보니 집에서 커피를 볶기 어려웠던 탓에 올 여름을 지나 처음으로 에어컨을 켜지 않은 날, 무리를 해서 오래 꽤 많이 콩을 볶은 결과다. 그것도 이번달이 고작이겠지. 아이가 태어나면 집에서 연기를 피워가며 커피를 볶는 일은 어려울 테다. 겨울엔 더더욱.
4년간 싸울 땐 지독하게 싸우고, 위로할 땐 지극하게 서로를 위로도 했다. 시작부터 지금 이 날까지 평범함이란 게 희박한 결혼생활에, 남편이고 아내였던 사람들이 이제 아이를 낳아 기른다니 세상 기가 막힌 일이지. 오죽하면 교수님께서도 "당신들이 아이를 대체 어떻게 기를지 정말 궁금해."라며 흥미진진한 눈망을로 말씀을 하셨으니 말이다.
물론 나도 바깥양반도, 그리 호락호락, 이 삶의 굴곡들을 평탄화라는 결말로 내몰 생각은 없다. 출산까지 빼곡한 일정이 채워졌고, 그래서 주말마다 멀리 멀리 이곳 저곳을 다니기로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없을지 모르는 시간들이니까.
그리고 덕분에, 뱃속의 동백이는 유난히 태동이 심하고 부지런하다고 한다.
그래 그래.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여야, 아빠처럼 부지런히 일하고 엄마처럼 바쁘게 살지. 평범하게 살 팔자는 아니어도 좋으니 마지막 한달, 잘 보내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