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우리 다운 날을 보내기를.
결혼을 했다.
무사히, 씩씩하게 결혼식을 마쳤다. 결혼식은 꿈처럼 빠르게 지나가더라. 축하해주기 위해 어렵게 온 이들의 눈을 맞추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꼭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쉬웠다. 10년 뒤, 2030년에 우리끼리 리마인드 웨딩을 하기로 했는데 그때는 짝꿍이 설계한 건축물에서 우리답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소중한 이들을 초대해서 함께 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소개하면서 맞이하면서 진한 시간을 보내야지. 그리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포르투로 여행을 가고 싶다.
신혼여행은 제주로.
스페인, 포르투갈 신혼여행을 취소하고 나서는 여행을 따로 계획하지 않았다. 그래도 바로 일상으로 복귀하는 건 아쉬울 것 같아 제주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앞으로 살고 싶은 방향, 우리의 여행 방식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고 직접 결혼반지도 만들었다. 많은 곳을 다녀왔지만, 가장 기억하고 싶은 생각과 순간들을 적어본다.
1. 다정하고 단단하게 살자.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생각했을 때, ‘다정하고 단단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짝꿍에게도 그렇게 살겠다고 새로운 가훈으로 당당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다음날의 나는 전혀 다정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속이 상했다가, 다정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체력과 여유다. 몸과 마음이 튼튼해야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를 먼저 잘 살피고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2. 서점 <풀무질> 사장님의 작은 선물
여행을 하면 동네 서점을 꼭 들리는 편이다. 이 날은 ‘풀무질’이라는 서점에서 평소에 사고싶었던 재수 작가님의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책을 샀다. 풀무질 사장님과 대화를 하던 중 신혼여행으로 왔다는 말에, 커플인 줄 알았다고 놀라시면서 잠시 기다려보라고 했다. 골똘히 고민하시다가 우리에게 <나의 두 사람> 이란 책을 선물해주셨고 오래오래 행복하라는 메시지도 적어주셨다. 모르는 이에게 베푸는 다정한 마음이 정말 감사하고 따뜻했다.
3. 좋았던 순간은 폴라로이드로 찍자.
구좌 쪽 바다 앞에 있는 무인서점인 ‘혜원책방’에 갔다. 주인 대신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로 채워진 이곳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바다를 보면서 멍때리기도 좋고, 차분히 앉아서 뭔가를 기록 하기에도 좋았다. 우리는 정말 좋았던 순간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남은 필름이 딱 10장이었기 때문에 아껴써야 했다.) 폴라로이드를 찍은 첫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이름도 참 예쁜 혜원책방.
4. 삐꼴라쿠치나, 1년 뒤의 약속
우리에게 인생 식당을 묻는다면 공통으로 ‘삐꼴라쿠치나’라고 말한다. 꽤 오래전에 방문했지만 동화 같은 분위기에서 정성이 담긴 요리를 먹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레스토랑은 현재 임시휴무지만, 인스타에서 사장님이 손수 만든 안주 꾸러미를 살 수 있다는 글을 보고 냉큼 달려갔다. 오랜만의 방문이었지만 그곳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예전에 왔던 손님이었다는 말에 사장님은 무척 반겨주셨고, 잠깐 기다리라며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수박을 컵에 담아 풀밭에 심으셨던 애플민트까지 살포시 얹어서 건네주셨다. 신혼여행을 기념해서 레스토랑에 오고 싶었다는 나의 말에 1년 뒤 결혼기념일에는 꼭 오면 좋겠다며 다정하게 웃어주신 사장님. 저희 내년에 꼭 다시 올게요!
5. 우연함을 찾는 여행.
길을 가다가 멋진 풍경을 발견할 때면 그 장면을 담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지나가다가 멋진 건물을 발견하면 유턴을 해서 보러 가는 우리. 이런 우리의 여행의 방식이 좋다. 우연한 발견의 여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서 참 고맙다.
6. 우리가 직접 만든 결혼반지
이번 여행에서 무엇보다 직접 반지를 만든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오하효’는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겸 금속 공방인데, 아내 분이 반지와 팔찌를 제작하는 주얼리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한다. 금속을 톱질하는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웠다. 천천히, 힘을 빼고, 옳은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건 톱질이나 인생이나 중요하구나. 반지에 새길 문구는 ‘17171771’로 정했다. ‘I love you’의 의미이자, 결혼식날 친구가 불러준 축가의 노래 제목이라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숫자가 되었다. 일부러 반지 겉면에 새겼는데 마치 어떤 문양 같기도하고, 암호 같기도 했다. 은반지는 공기 중에 두면 색상이 변하지만, 신기하게도 사람이 계속 끼고 있으면 색상이 변치 않는다고 한다. 평생 동안 간직할 우리만의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 괜히 뭉클했다.
7. 정원이 보이는 그림 같은 작업실
‘그림상회’에 가면, 공간 안쪽에 숨겨진 작업실을 구경할 수 있다. 높고 긴 창 너머로 아름답게 가꾼 정원이 보이는데 이 곳은 화가이신 사장님 부부가 직접 만드신 공간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면 건강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어, 어른을 위한 동화책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는데, 딱 이런 곳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 건축가 짝궁이 옆에 있으니 꿈은 이루어지리라고 믿어본다. 참고로 그림상회에서는 건강한 화덕피자와 들깨 파스타도 맛볼 수 있는데, 월, 화, 수 에만 이곳을 운영하니 시간을 맞춰서 가야한다.
8. 소심한 책방의 기획력
‘소심한 책방’은 가볼만한 이유가 있는 곳이다. 책방을 둘러보다보면 이곳에 온 이들이 궁금해할만한 질문들을 고민하고, 자신만의 답을 만들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만 살 수 있는 책이라던가, 선물하기 좋은 책이라던가. 샘플 책을 싸게 팔기도 하고, 손수 만든 그 달의 뉴스 등, 곳곳에 소심한 책방만의 이유와 스토리들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고사리를 캐는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 옆에 파는 고사리였는데 책 속의 그림도, 글도 너무 예뻐서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샀다. (마침 딱 하나 남았던 책! 고사리도 살 걸 그랬나..!)
9. 제주다운, 디앤디파트먼트 다운 공간
여행의 첫날, 그리고 마지막 날에 방문한 ‘디앤디파트먼트 제주’. 공항 근처 시내에 있어서 접근성이 편하다. 곳곳에서 디테일을 배울 수 있었는데 평범한 공업용 재료로 옥상 정원과 쇼룸을 멋지게 구성한 센스에 놀랐다. 정말 제주다운, 디앤디파트먼트 다운 공간이다보니 구석구석 감상하면서 보고 배울게 많았다. 심지어 바깥 건물 풍경까지 신경쓰면서 가구 색상 배치를 한걸까 싶을 정도로 공간이 잘 어우러졌다. 이곳에서 삼나무로 만든 제주 장인의 나무 접시와, 오픈 기념 한정판 돌하르방 티셔츠, 그리고 제주도 표고버섯을 샀다.
10. 신혼여행이라는 말
신혼여행으로 왔다는 말에 마치 마법이 있는것처럼, 낯선 우리에게 다정함을 베푼 분들이 많았다. 일주일동안 머물 우리를 위해 예쁜 꽃을 놔주신 시옫미음집 사장님 부터, ‘나의 두사람’ 책을 선물해주신 풀무질 책방사장님, 그리고 삐꼴라쿠치나 사장님의 ‘수박’, 곁 사장님이 주신 ‘엽서’. 그 분들 덕분에 더욱 온기가 있었던 여행이었다.
이번에 노트를 두고오는 바람에, 급하게 <여름문구사>에서 노트를 샀다. 미키와 미니가 그려진 가벼운 노트였다. 여행을 하며 나눈 대화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니 여행이 더욱 풍성해진다. 앞으로의 일상 생활도 이렇게 부지런히 나의 방식대로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