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ng Blues Feb 26. 2019

11. 아빠와 딸 여행기_1일차 #1출국

풀타임 아빠 육아기 <아내가 이사갔다> 11화

새벽 4시 30분에 울린 알람은 나와 아이를 너무나 쉽게 깨웠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아이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여행의 첫 고비가 될 줄 알았던 ‘새벽에 아이 깨워 나가기’의 시작이 좋았다. 이제 저 현관을 나서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 5시 10분에 올 공항리무진버스에 올라타면 여행의 1차 관문은 클리어하게 된다.     


아이와 단둘이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것은 약 한 달 전이었다. 외동인 아이는 방학이 되면 심심함에 주리를 틀게 될 것이고, 아내는 방학이 되어도 자주 집에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고맙게도) 미리 알려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빠 육아휴직 선구자들이 입을 모아 아이와 단둘이 여행가는 것을 추천해준 터라 결심은 수월했다.

     

문제는 장소. 아이는 여름옷을 사랑했고 아직 어렸으며, 나는 가사에 지쳤고 게을렀다. 약간의 고민 끝에 3년 전 한번 가 본 적 있는 괌의 한 리조트가 낙점되었다.(리조트 안에서 모든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바로 그곳!) 예약을 끝내자 아이는 여름옷을 입을 생각에, 나는 아이와 단둘이 경험을 공유하고 추억을 만들 생각에 설레어 왔다. (삼시세끼 안차리고 안치울 생각에 설렌 것이 아니다.)


애매한 거리라서 버스정류장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밖은 영하 7도. 적막에 쌓인 한겨울 한새벽 길을 단둘이 걸으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3년 전에는 유모차에 타고 이 길을 갔었는데. 이젠 엄마도 없이 아빠랑 둘이 이렇게 씩씩하게 같이 걸어가네. 많이 컸네 우리 딸.      


이 차가운 공기, 하나도 안 춥다며 웃는 니 얼굴, 흰 목도리,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은 적막, 조용히 시끄러운 캐리어 바퀴 소리.. 나중에 커서도 너는 이 순간을 기억할까. 아빠는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 너 기억 못 하면 아빠는 섭섭할 것 같은데..


아이의 흥분 에너지는 추위 속 10분여의 걷기 후 소실되어버렸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일찍 출발한 탓에 정류장에서는 공항버스를 제법 오래 기다려야 했다. 이번 여행을 관통할 ‘기다림 대잔치’의 서막이었다. 아이가 추위와 졸림에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엄마가 같이 있었다면 분명 칭얼댔을 상황인데 혼자 꿋꿋하게 참아내고 있는 모습이 한편으로 대견하고 한편으로 미안했다. 곧 버스가 왔고 우리는 앉자마자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빠와 아이 단둘 여행의 장점이라면 짐이 적다는 것이다. 일단 아내의 짐이 없고, 아내라면 챙겨 왔을 아이의 짐들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짐을 실체를 봤다면 아내는 등짝 스매싱급 잔소리를 쏟아냈겠지만 아내는 저 멀리 있기에 나와 아이는 (옳고 그름을 떠나) 역대급으로 라이트한 짐가방을 꾸릴 수 있었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에 공항에 도착했다. 아이 동반 가족 여행객이 많은 괌인지라 티켓팅 줄 대부분이 부모와 아이였지만 아빠와 아이만 떠나는 집은 우리뿐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둘만 있으니 대화가 많아졌다.      

  이제 환전하러 가야 돼. 환전이 뭐야? 환전이란 건 블라블라

  왜 또 줄을 서? 여긴 출국심사라고 하는데 그건 블라블라     

좋은 아빠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둘이 여행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면세점에 들어서자 목이 마르다고 성화다. 물도 물이지만 나는 어서 밥을 먹여야 했다. 배는 하나도 안 고프니 물만 어서 사달라는 아이를 끌고 식당으로 와서 갈비탕을 주문했다. 밥 한 공기를 지 혼자 다 먹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요녀석.     


식당에는 사람이 많아 자리부터 맡아놓고 저 멀리서 주문을 해야 했었다. 아이가 주문을 할 수는 없으니 테이블에 냉큼 아이를 앉혀놓고는 아빠 저~기서 주문하고 올 테니 잠시 혼자 기다리라고 했다. 굽이굽이 찾아간 주문하는 곳은 이미 줄이 길었다. 외국인이 있는지 생각보다 줄이 빨리 줄지가 않는다. 족히 5분 이상은 걸렸을 터. 시간이 지체될수록 내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테이블이 보이지 않으니 아이 혼자 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아이라면. 얼마나 무서울까. 나 찾으러 혼자 어딜 다니고 있는 건 아닌지.. 주문을 완료하고 테이블로 부리나케 뛰어가 보니 - 아이는 의젓하게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짜식, 아빠 믿어주었구나. 우리 딸 많이 컸네.. 너는 자랐는데 아빠가 덜 자랐네. 아이가 고맙고 대견했다.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는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부모 형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셀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인스타나 틱톡용 이리라. 여행 중에도 가족보다는 친구들과 connected 되어 있는 소녀를 보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우리 딸도 순식간에 저리 되겠지. 이미 저 맘에 안 드는 사진은 찍지도 못하게 하고 내 폰으로 친구들과 카톡을 버젓이 해대고 있는 요즘이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금방 저리 되기 전에 이 귀여운 쪼꼬미 모습을 많이 기록해둬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자마자.. 역시나 찍지 말라고 농성이다. 요즘 사진을 못 찍게 해서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다. 초상권을 존중해주기에는 너의 이 시절이 너무 아까운 걸 어떡하니. 사진 문제는 괌의 3박 4일 내내 나를 괴롭혔다. 매우매우.     


초등 1학년의 4시간의 비행은 책 2권, 쪽잠, 간식, 여분의 칭얼거림으로 지나갔다. 비행기가 괌에 무사히 착륙했다는 방송을 듣고 아이와 나는 다시 한번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에게는 아이와 멋진 추억을 만들어줄 그곳. 아이에게는 여름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는 그곳! 아이는 어서 내려서 긴 옷을 벗고 여름 소녀로 변신하고 싶은 생각에 잔뜩 흥분했다. 하지만 그 사랑하던 여름옷이 아이에게 괌에서의 첫 울음을 선사했고 나에게는 첫 울컥을 선사했다.


3박 4일 마음수련의 신호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10. 저녁이 있는 삶 or 저녁이 없는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