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마음
해무는 바다 위에 생기는 안개다.
차가운 해수면 위로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지나갈 때,
공기 중 수증기가 응결되어 생성된다.
해무는 바다에서 시작되지만, 어느새 도시 위로 스며든다.
육지로 스며든 안개는 도시를 가리지만, 정작 가려진 건 내 마음일지도 모른다.
안개가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라면,
해무는 오래 머무는 마음에 더 가깝다.
그런 시간을 통과한 적이 있다.
앞이 보이지 않았고, 어디쯤 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방향보다 버티는 것이 먼저였다.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회의 테이블,
교수님 앞에 앉아 나는 또다시 말을 잃었다.
좋아하는 분야는 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는 없었다.
논문을 쓴다고 했지만, 실은 논문에 눌려 있었다.
자료는 쌓여가는데, 그 자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일정은 다가왔지만, 그 모든 걸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나는 논문 속에서 길을 잃고,
멋지지 않은 하루를 수백 일째 보내는 중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마음만 남은 채,
기계처럼 반복된 하루를 시작했다.
수치를 돌리고, 코드를 수정하고, 에러를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숫자들과 해석되지 않는 변수들.
그 모든 것이 내 앞을 뿌옇게 가렸다.
성과로 이어지지 못한 데이터는 점점 ‘파일명’만 가진 채 하드디스크에 쌓였고, 나의 하루도 의미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 무게가 머리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눌렀다.
계속되는 데이터와의 싸움 속에서 어느 순간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정해진 결과를 만들기 위해 분석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분석이라는 과정을 통해 뭔가 실마리를 찾으려 했던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시간은 또 흘렀다.
늦은 새벽,
어제였던 하루가 언제 끝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복도를 지나 계단실에 앉았다.
눈앞에 희미하게 호수가 보였다.
가로등조차 켜지지 않은 어둠 속, 그 위로 얇은 안개가 흘렀다.
그 순간, 오래 전의 풍경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마주한 풍경.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지고,
사람과 파도가 흐릿해지던 그 순간.
끝이 어딘지도, 언제 걷힐지도 알 수 없던 안개가 가득한 바다가 있었다. 흔하게 봐왔던 안개였다면 잊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해무는 처음 보아서 그랬는지 굉장히 신비로운 분위기로 나를 붙들었다.
안개가 스쳐 가는 감정이었다면, 해무는 오래 머무는 마음 같았다.
그 시절, 내 마음에도 좀처럼 걷히지 않는 기억들이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일까?
그 뒤로 마음이 흐릴 때면 유독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해무가 걷히고 다시 드러난 바다를 마주하면 괜히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어딘가도 함께 환해지는 것 같았다.
불안은 해무와 닮아 있다.
가까이 있을 땐 모든 것을 가리지만, 언젠가는 흐르듯 지나간다.
흐린 마음을 억지로 밀어내기보다,
“지금은 흐리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일.
그것만으로도 마음 한 자락이 천천히 걷히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아 더 두려웠던 순간들이 마주한 후에야 비로소 힘을 잃는다.
불안을 밀어내기보다 바라보는 용기.
그 마음이 나를 앞으로 데려다준다.
시간이 흘러 어찌어찌 끝낸 논문도 있고 열심히 써 내려갔지만 아직도 세상에 나오지 못한 논문도 있었다.
누군가는 “라면받침으로 쓰기 딱 좋다”라고 말하는 학위논문도 생겼다.
결과물은 종이 몇 장일지라도, 그 종이를 인쇄하기까지 묵묵히 버텨온 나날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수없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났다.
대신 써줄 사람도, 대신 버텨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함께 밤을 지켜준 이들이 있었다.
힘든 시간에 따뜻한 저녁을 챙겨준 사람,
옆에 앉아 함께 논문을 붙들고 있던 사람.
엉망이었을 논문의 길을 잡아준 선배님, 교수님.
그렇게 긴긴밤을 건너며,
나는 내 안의 해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찾으려 애써왔다.
물론, 그 시절의 고통은 여전히 또렷하다.
하지만 그 안엔 벅참과 뿌듯함도 함께 남아 있다.
흐릿했던 시야는 답답했지만,
방향까지 잃게 하진 않았다.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은
언젠가 걷힌 하늘도 함께 기억할 것이다.
누구도 대신 지나갈 수 없는 그 여정의 흔적 안에는
지금의 내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