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축축하게 젖어 들러붙은 마음

사랑받고 싶었지만

by Hsun


소나기는 갑자기 짙어진 하늘 아래, 굵고 빠르게 쏟아졌다가 금세 그치는 비다.
대개 한여름 오후, 맑고 무더운 날이면
적란운이 부풀듯 올라와 하늘을 덮고,
그 아래로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1~2시간 남짓, 짧고 강하게,
마치 오래 참았던 말이 갑자기 터져 나오는 것처럼.
소나기는 그렇게 내린다. 하늘보다 먼저, 마음에서부터.



그날은 아무 예고도 없었다. 하늘도, 너도.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다시는 연애하고 싶지 않을 만큼 어이없이 이별했다.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처럼 너의 감정도 이미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몰랐다. 아니, 모른 척했을지도 모른다.

이별은 그렇게 어느 여름 오후의 소나기처럼 왔다.
기압이 무너진다. 구름이 내려앉는다. 가볍던 공기가 무거워지고, 마음은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른다.
마침내 툭,
말 한마디가 떨어진다.
그 말을 시작으로 다음 말들이 쏟아졌다. 몇 번은 꾹꾹 눌러 참아왔을 말들, 끝내 삼키지 못한 마음들, 터뜨릴 수 없어 쏟아져버린 감정들.

너와 내가 속삭였던 말들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잘 자.” “괜찮아.” “힘들 때도 함께 할게.”
말들은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 말들엔 아무런 힘도 없었고, 한없이 가벼워 부유하다 사라졌다.
하지만 내 마음은 달랐다.

말이 부서진 자리마다 감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너진 마음은 흙탕물처럼 바닥에 고였다.

그때의 우리는 정말 흩어진 말만큼 가벼운 마음이었을까?

사람들은 말했다. 금세 지나갈 거라고. 소나기니까 곧 그칠 거라고. 그런데 내 마음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비는 멈췄지만, 그동안 쌓여온 감정은 젖어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으려 애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시작한 사랑도 결국에는 끝이 난다.

헤어짐은 하나의 이유로 오지 않는다. 수많은 고민과 사소하지만 반복된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고, 결국 그 무게가 사이를 무너뜨린다.

나는 늘 나를 더 좋아해 주는 사람을 택했다.
사랑을 더 많이 주고, 더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
그래야 마음이 다치지 않을 것 같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 있다.
“너를 더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
나도 그 말을 믿었고, 그래서 안심하고 사랑했다.
하지만 안심한다고 해서 끝이 없던 건 아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엔 늘 아주 달콤한 말들로 녹여 끈적함에 빠져나올 수 없게 해 놓고,

시간이 흐르면 그 끈적함이 싫어 도망치고 싶어지는 걸까?
방금 전까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어느 한 지점부터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치명적인 약점까지도 나눈 사이였는데도.

사랑한다고 몇 년을 이야기했어도, 그 오랜 구애와 썸 끝에 이어진 마음이어도.

그날도 그랬다.
밥을 먹기 전까지는 사랑하는 사이였다. 아마도 나에게만 그랬나 보다. 너는 어디서부터, 어느 날부터, 어느 시간부터인지 모르게 남이 되길 바랐겠지만 말이다.
너를 기다리는 시간까지는 평온한 하루였는데
같이 밥을 먹는 중엔 울고 있었고,
식당을 나올 땐 이미 남이 된 너와 있었다.

지금까지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나에 대한 마음은 왜 그렇게 쉽게 사라졌을까?
너에 대한 마음은 왜 이렇게까지 자라났을까?

먼저 다가온 사람들은 다가올 때도 먼저 더니 갈 때도 먼저였다. 그 들의 이유는 들을 수 없었기에, 헤어짐의 원인은 늘 내 안에서 찾아야 했다.
사람 사이에 누군가의 일방적인 잘못만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일방적인 통보는 마음의 문을 오래 닫아두게 했다.

믿을 사람, 그리고 믿을 마음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 사소한 이유부터 어쩔 수 없는 이유까지. 물론 이유는 저마다 다양했겠지만 나의 가장 어이없던 이별 사유는 백수였던 것이라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해 2월 졸업하고 6월에 취업했지만, 그전에 힘든 시간을 지나오느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나는 그 잠깐의 공백 때문에 이별을 통보받았다.

어떤 사랑은 가벼워서 흩어지는 게 아니라,
너무 무거워서 조용히 가라앉는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말은 스쳐갔지만, 다친 마음은 오래 들러붙어 남았다.

왜일까?
아직 털어내지 못한 질문들이 남아서?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쌓여서?
설명되지 못한 이별이 마음 안에 머물러서?

이별은 눅눅했다.
마음 한구석이 늘 촉촉했고, 곰팡이처럼 피어나 나를 잠식했다.
어떤 기억은 그렇게 남는다.
시간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 얼룩처럼 감정의 구석을 계속 적신다.

이제 나는 말이 무섭다.
다정한 말 한마디에도 젖을까 봐,
또 축축하게 남아 오래도록 마르지 않을까 봐.
그래서 조심하게 된다. 감정을 덜어내는 게 아니라, 더 조용히 감추게 된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쏟아진다. 속으로, 조용히, 천천히.


소나기는 그렇게 지나간다. 멀쩡해 보이는 하늘 아래, 아무 일 없었던 얼굴로.
하지만 알고 있다. 지나간 자리엔 여전히 물웅덩이가 고여 있고, 그 위를 지나며 나는 자꾸 미끄러진다.
마음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말은 날아가지만, 감정은 스며든다.

말은 흩어지지만, 마음은 가라앉는다.

그날의 너는 잊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주고받은 말들도, 비가 쏟아졌던 그 순간도.
하지만 나는 아주 가끔 그 말들 사이를 다시 걷게 된다.
빗물이 고인 마음의 골목을 젖은 발로 지나며.


그저, 사랑받고 싶었다.
단단한 사람이었지만, 가끔 발생하는 사랑의 단절은 나를 불안형이 되도록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천장에 붙여놓은 야광스티커처럼,
떼다 남은 세월의 흔적은 깊고 깊은 밤이 되면 은은하게 빛난다.

소나기는 여러 번 지나갔고, 그 말들도 이젠 희미한데 감정은 남아 다음에 올 비를 걱정하게 만든다.
그 여러 번의 경험에도

또 다정한 말에 기대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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