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때론, 장비빨이다.
인생은 장비(裝備) 빨이라고, 지금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실력 있는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실력이 없어도 좋겠다고 봉구는 생각한다. 뽀안 쌀알을 품은 채 입을 꾹 닫고 있는 무쇠냄비를 앞에 둔 봉구는 매우 행복하다.
이 일의 시작은 현경의 소개팅이었다. .
[현경: 이번 주 토요일 아울렛으로 쇼핑가실 분? 제 옷 골라주시면 점심 쏘겠습니다.]
[지연: 저요! 근데 저 바빠서 다음 답 못해요. 암튼 토요일 콜!]
[학규: 소개팅 때문에 옷 사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그냥 평소 입던 대로 입고 와]
[현경: 입을 옷이 없어. ㅠㅠ ]
그리하여 토요일이 제일 바쁜 학규를 빼고, 현경과 지연 그리고 서린이, 봉구가 아울렛에 왔다.
“봉구 씨는 쇼핑 별로 안 좋아하잖아. 저기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있을래?”
“그래. 여자들 따라다니면 피곤하기만 하지. 오빤 좀 쉬고 있어. 밥 먹을 때 전화할게.”
여자들이 이렇게 말을 한다는 건, 오늘 쇼핑이 매우 길어질 거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봉구는 지연과 함께 있어야 한다. 짐도 들어줘야 하고 서린이도 봐야 하니까. 봉구는 별 다른 대답 없이 이 세 여자 뒤를 멀찌감치 따라갔다. 세 여자는 일단 아울렛 1층부터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층에서는 아무 것도 사지 않을 것이다. 1층에는 주로 명품 브랜드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연은 연봉이 또래에 비해 꽤 높은 편이지만 명품 가방은 딱 하나 뿐이다. 첫 월급으로 산 그 가방은 지금도 아침 저녁 지연의 한 쪽 어깨에 매달려 있다. 많이 낡아서 몇 번이나 봉구가 새로 사 주려고 했었지만(다들 잊었겠지만 봉구도 돈을 벌 때가 있었다.) 지연은 늘 마다했다. 명품을 사는 이유는 이렇게 오래오래 멋스럽게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따라서 오늘도 지연은 명품을 사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연은 쇼핑을 하러 올 때마다 명품관을 꼭 들른다.
“언니, 저 이런 거 못 사요.”
유리 문 안으로 직원들이 단정하게 서 있다. 현경은 그 문을 차마 열지 못하고 지연을 돌아봤다.
“못 사긴 왜 못 사. 안 사는 거지. 그리고 안 사도 돼. 일단 봐둬. 눈을 높여 두는 거야.”
지연은 그렇게 말하며 현경을 데리고 들어갔다. 봉구는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세 여자가 나오려 하자 문을 열어주었다.
“언니, 생각보다 비싼데, 또 생각보다는 안 비싸네요?”
“그렇지? 명품 별 거 없다니까.”
긴장했던 현경이 풀어지자 지연이 싱긋 웃는다.
“그래도 저는 못 살 것 같아요.”
“그래도 자꾸 봐둬. 몰라서 못 사는 거랑, 알아도 안 사는 거랑은 달라. 게다가 명품은... 어쨌든 예쁘잖아.”
지연은 기분이 좋은지 명랑하게 웃으며 앞서 걷는다. 그 뒤를 약간 혼이 나간 듯한 현경이 ‘그러게요. 예쁘긴 예쁘네요.’하며 따라 걷는다. 그렇게 두 여자의 명품관 산책은 한동안 이어졌다. 봉구는 서린이에게 강아지 풍선을 하나 사주었다. 땅바닥에 내려놓으면 졸졸졸 걸어가는 것처럼 움직이는 풍선이었다. 서린이는 진짜 강아지를 산책 시키듯 팔랑이며 돌아다녔다.
다음은 2층.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된다. 봉구는 허리를 크게 돌리고 어깨를 풀었다. 손목과 발목도 틈틈이 스트레칭을 해주었다. 유리 문 안으로 검은 원피스를 입은 현경이 보인다. 지연이 고개를 젓는다. 현경이 다시 탈의실로 들어간다. 지연이 옷을 골라 탈의실로 향한다. 잠시 후 현경이 핑크색 투피스를 입고 나왔다. 지연의 고개가 갸웃. 결국 두 사람은 빈손으로 나온다.
다음, 그 다음 옷가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 그때마다 현경이 입어보는 옷은 하늘색에서 베이지 색으로, 슬랙스에서 롱스커트로 달라졌지만 아직 봉구의 손은 텅 비어 있다. 아무래도 오늘의 쇼핑은 점심을 먹고 나서까지 이어질 것 같다.
“여기 3층에 괜찮은 초밥집 있어요.”
현경의 말에 모두 3층으로 올라갔다. 마침 배가 슬슬 고파오던 참이었다. 초밥이라. 현경이 사준다고 하니 조금 비싼 걸 먹어야겠다고 봉구는 생각했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 부장님이 사주셨던 참치 초밥이 참 맛있었는데. 회사를 관두고 나니 딱히 초밥 먹을 일이 없었네...라고 생각하던 순간....
봉구의 발걸음이 멈췄다.
“봉구 씨, 왜 그래? 뭐 잃어버렸어?”
우두커니 서 버린 봉구를 보며 지연이 놀라 다가온다. 하지만 봉구는 꿈쩍도 하질 않는다. 뭐야, 20년 만에 첫 사랑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봉구의 못 박힌 시선에 지연은 잠시 질투가 났다. 이어 그 시선을 따라가 본 지연은...
“봉구 씨, 냄비 구경하고 싶어?”
끄덕끄덕.
“배 고프다며?”
도리도리.
지연은 이 사태의 중요성을 단숨에 깨달았다. 봉구에게서 처음으로 본 눈빛이었다. 심지어 지연을 볼 때에도 이런 눈빛을 한 적이 없었는데. 저 색색의 냄비들이 이 남자의 내면에 숨어 있던 본성을 깨운 모양이다. 어이없음과 질투, 그 사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지연은 봉구의 손을 잡고 끌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끌려오긴 끌려 왔다. 눈은 창 밖 너머 휘슬러와 르쿠르제와 WMF 매장을 향해 있었지만 말이다.
“자, 오늘은 내가 쏘는 날이니까 참치 초밥으로 갑시다! 여기 참치 초밥 세트 3개랑 어린이 세트 하나요.”
하지만 봉구는 젓가락을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지금 봉구의 머릿속에는 저 냄비로 하고 싶은 요리와 저 칼로 썰고 싶은 재료와 저 프라이팬으로 볶고 싶은 것들이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끼리 충돌하고 뒤섞여 새로운 요리가 탄생할 지경이었다.
“구봉구 씨.”
초밥이 나오고도 봉구가 정신을 못 차리자 지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제야 봉구는 정신이 번쩍 들어 지연을 바라봤다. 착 깔린 지연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봉구의 눈에 닿았다.
“밥 먹어. 성실하게. 우리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응?”
지연을 팀장으로 둔 팀원들은, 이런 말을 자주 들을까? 봉구는 잠시나마 그들을 동정했다. 그들도 종종 나처럼 등줄기에 소름이 돋곤 하겠지. 뒷덜미 머리카락이 쭈뼛 설 때 즈음, 봉구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젓가락을 집었다. 그리고 초밥을 하나 들어 지연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어 서린이도 한 입 먹이고는,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자꾸만 떠오르는 냄비와 프라이팬을 휙휙 치워가면서.
“어머, 이 집 맛있다!”
그제야 지연의 얼굴도 풀렸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라고는 하지만 봉구가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봐야한다.)을 지켜보던 현경이 재미있다는 듯 ‘풋!’ 웃었다.
“오빠, 언니 질투하잖아. 냄비들한테.”
현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봉구가 험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현경이 주눅들 리가 없다.
“맞죠? 지금 내가 냄비한테 진 거죠? 이거 기분 나쁜 거 맞죠?”
지연이 삐진 표정으로 말한다.
“근데 저도 봉구 오빠 저런 얼굴 처음 봐요.”
“난 본 적 있는데?”
그때 서린이가 끼어들었다.
“본 적 있어? 언제?”
“지난 번 저녁 때 김치찜인가? 그거 할 때, 아빠가 냄비 앞에 서서 이렇게 노려 봤었어.”
서린이가 미간을 좁혀 인상을 팍 썼다. 그러자 지연과 현경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맞아. 그 얼굴이었어.”
“이거 구봉구 씨 요리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구만?”
멋쩍어진 봉구는 젓가락질만 계속 했다. 참치 초밥은 여전히 맛있었다. 하지만.
“얼른 먹고 가자. 우리 봉구 씨 애 닳기 전에.”
지연이 항복했다는 듯, 백기를 펴 보이듯, 한 손바닥을 들고는 말했다. 그 말에 봉구의 턱 근육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식당을 나선 지연이 봉구에게 카드를 건넸다.
“딱 백 만 원 어치만 긁고 와.”
“히익!”
백 만 원이라는 말에 옆에 있던 현경이 놀랐다.
“언니, 무슨 냄비가 백 만 원이에요!!”
“그, 그래. 냄비 하나 만 살게.”
봉구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 만 원 이라니. 한 달 치 식비보다도 많은 돈이다.
“봉구 씨는 옷도 안 사고 게임 같은 것도 안 하잖아. 술을 마시길 하나, 담배를 피기를 하나. 그런데 요리는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럼 백 만 원 쯤 은 투자 해 봐야지.”
“언니 대박! 오빠, 빨리 받아!!”
현경이 재촉하자 봉구는 얼떨결에 카드를 받아들었다.
“쇼핑 다 하면 전화해. 우리도 쇼핑할 테니까.”
지연은 서린이의 손을 잡고서 휙 돌아 2층으로 내려갔다. 봉구도 얼른 몸을 돌려 아까 봤던 매장으로 향했다. 저기 저 천국의 문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별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스테인리스 냄비들과 조리 도구들,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주물 냄비들, 오븐에 넣어도 끄떡없는 그릇도 있었고 TV 요리 프로그램에서 보던 스테인리스 접시(밧드라고 하던가?)들도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매장을 훑어보던 봉구는 말 그대로 손을 들어 입을 틀어 막았다. 너무 좋아서 비명을 지르면 안 되니까.
스테인리스 팬으로 두부를 구우면 더 바삭하게 되던데. 봉구는 유튜브 영상을 떠올리며할 수 있는 요리들을 세어 보았다. 한 번 사면 거의 평생을 쓸 수 있다고도 하니, 하나 쯤 사두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 옆에 있는 무쇠 솥 냄비는 어떤가. 무거운 뚜껑 덕분에 압력솥에 한 것만큼이나 밥이 맛있다고 한다. 게다가 냄새 밸 걱정이 없어서 가지, 소고기, 연어 등을 넣고 갖가지 솥밥을 해 먹을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누룽지까지 생기니 1석 2조다.
그리고 저 밧드들. 크고 작은 저 스테인리스 접시들만 있으면 아무리 복잡한 요리를 하더라도 주방을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두근두근. 봉구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쇼핑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백 만 원이라는 예산이 넉넉하기도 했거니와 지금 와서 보니 봉구는 일찍부터 가지고 싶었던 것이 정해져있었기 때문이다. 스테인리스 프라이팬과 무쇠 솥냄비, 몇 개의 밧드 그리고 오븐용 그릇들과 칼 세트. 직원은 어디선가 카트를 가지고 와서 물건을 차까지 실어다 주었다. 그렇게 쇼핑을 마친 봉구는 얼른 지연에게로 돌아가 카드를 건넸다.
“백 만 원 조금 안 되게 썼더라? 다음에는 더 분발하세요, 구봉구 씨.”
끄덕끄덕.
커다란 강아지가 공을 물어오듯, 봉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연의 손에 든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이건 언니가 사줄게요.”
지연이 카드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아니에요, 언니! 나 비싼 거 샀는데!!”
“대신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말씀만 하세요!!!”
“소개팅 할 때 나 데려가기!”
“네???”
현경이 놀라자 지연이 크크 거리며 웃는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을게요. 모르는 척 하고. 내가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
“아... 사실 저도 그러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도 제가 못 미더워서요.”
“정말? 그럼 나도 가는 거다?”
그 사이 결제가 완료됐다.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 현경이.”
“이모, 결혼해?”
서린이가 묻는다.
“응. 이모도 결혼하고 싶어. 결혼해서 서린이처럼 예쁜 아가도 낳고 싶어.”
“학규 삼촌이랑?”
“어???”
서린이의 천진한 말에 모두가 놀랐다.
“엄마랑 아빠랑 결혼했으니까 이모랑 삼촌이랑 결혼 하는 거잖아.”
“아니야. 이모랑 삼촌은 친구 같은 사이야. 서린이랑... 음... 재현이처럼?”
재현이? 재현이가 누구지? 봉구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재현이가 서린이랑 친한 남자애란 말이지? 그나저나 학규랑 현경이라... 어째 초성도 똑같고... 꼭 안 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왔던 것 같다. 봉구는 곧바로 전리품을 꺼내보았다. 냄비와 프라이팬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던 봉구에게 지연이 다가왔다.
“스텐 팬이야? 이거 어렵다던데?”
봉구는 자신만만하게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은품으로 받아온 연마제로 팬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더 이상 거뭇한 게 묻어나오지 않자 깨끗이 씻어 인덕션 위에 올렸다. 스텐 팬은 예열을 해야 한다. 유튜브 영상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말이다. 충분히 예열이 되자 기름을 살짝 두르고 계란을 탁, 깨뜨렸다. 그리고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계란 세 개를 깨뜨려 넣었는데.
“에게게... 이게 계란 세 개야?”
그렇다. 계란은 세 개를 깨뜨려 넣었으나 나온 건 다 합쳐도 하나가 될까 말까 한 양이었다. 나머지는 스탠 팬이 먹어버렸다.
“우리 셋이 먹으려면 아홉 개를 해야 하나?”
그 말에 봉구는 주방에 있는 스탠 팬을 째려보았다. 내 반드시 너를 정복하리라.
“와, 밥 맛있다. 나 이런 밥 처음 먹어 봐!”
그래도 무쇠 솥 냄비에 한 밥은 성공적이었다. 쌀을 씻어 앉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수한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더니 윤기가 흐르는 밥이 완성된 것이다.
“아빠, 김 주세요.”
서린이도 밥이 맛있는지 김을 찾는다. 그날 저녁 봉구네 가족은 흰 쌀밥에 김을 싸서 맛있게 먹었다.
그 후로도 몇 날 며칠 동안 스탠 팬은 봉구 가족의 계란을, 두부를, 부침개를 뺏어 먹었다. 그래도 곧 그 양은 줄어들었고 어느 날 아침, 지연과 서린이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계란 프라이를 먹을 수 있었다.
“와, 이거 맛이 완전 다른 차원인데? 스탠 팬이 좋긴 좋다. ”
지연의 칭찬에 봉구는 씨익 웃기만 했다. 다만 그 속에서는 ‘당신이 준 백 만 원의 가치를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다’는 결심이 있다는 걸 지연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날 저녁 무쇠 솥 안에 잠깐 불린 쌀을 넣어 버터에 볶으면서, 물을 붓고 쯔유를 넣어 연하게 간을 하면서, 봉구는 생각했다. 새로 산 칼로 표고 버섯을 자르고 쪽파를 다지면서도 생각했다.
인생은,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장비 빨이라고. 다만 아울렛 1층에 있는 명품 가방을 모두가 살 필요는 없는 것처럼 이 냄비와 프라이팬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값어치가 필요하다면, 정말로 원한다면 하나쯤은 가져도 되지 않을까? 지연의 어깨에 오늘도 달려 있을 그 가방처럼, 봉구도 그날 산 냄비와 프라이팬을 오래오래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