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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남이 해준 밥'의 맛

봉구의 김장 스토리 1

by 바람부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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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경함할 수 있는 최고의 맛은 아무래도 ‘남이 해주는 밥’이라고 지금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이 쌀은 아주 비밀스러운 소문처럼 입에서 입을 통해 추수 소식이 전해지고 그 반대 방향으로 돈 봉투가 전해지고 다시 원래의 방향으로 가마니가 전해지는, 그런 종류의 것일 것이다. 그 쌀을 딱 식구 수만큼만 덜어 정성스레 씻고, 낡았지만 꼼꼼히 닦아 놓은 오래된 압력밥솥에 넣어 가스 불에 올린 뒤 좀처럼 그 앞을 떠나지 않는 누군가가 불을 줄이고, 끄고 압력 추를 젖혀 김을 뺀 뒤에, 주걱으로 홀홀 저어 그릇에 소복이 담은, 그런 밥이 지금 봉구의 눈앞에 있다.




시작은 한 주 전 장모님의 전화였다.


“구 서방, 할 일도 없는데 나랑 김장이나 하러 가세나. 우리 언니가 김장을 하는데 아주 일이 많아.”


그 말을 들은 지연은 며칠 동안 몰아서 야근을 하더니 아예 연차를 내 버렸다.


“봉구 씨가 가면 나도 가야지. 오랜만에 이모도 뵙고.”

“엄마, 나는?”

“서린이도 가야지! 엄마가 벌써 현경 이모, 아니다, 햇살 반 선생님께 말씀 드렸어.”

“신난다!!! 나 이모할머니 만나는 거야? 내가 선물 만들어 드려야지!”


서린이는 거실에 색연필과 도화지를 늘어놓고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창 그림을 그려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라고 현경이 말했었다.


“나만 다녀와도 되는데. 지연 씨 쉬지도 못하고...”

“엄마랑 봉구 씨 둘만 보낼 수는 없어. 봉구 씨는 너무....”


지연이 적당한 말을 고르느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여려.”


현경이 여기 있었다면 풉, 하고 비웃었을 테지만, 학규는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한숨을 쉬겠지만, 봉구는 자신을 과잉보호하는 지연이 싫지 않았다. 살짝 부끄럽게 웃으며 봉구는 서린이와 지연의 옷을 꼼꼼하게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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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릴 때 옆집 살던 혜수 있잖니. 걔가 유학 가더니 구글에 취직했잖아. 연봉이 얼마라더라? 암튼 아주 잘 나간대.”


“너 같이 학원 다니던 준섭이, 걔는 저기 남양주에 공장 크게 하는 집으로 장가가서 그 나이에 벌써 사장이래나? 그 집 엄마가 며느리 자랑이 끝이 없어. 이번에는 안마 의자를 사주더래.”


“재수해서 너보다 늦게 대학 간 우리 옆 동 선주 있지? 걔는 결국 교수 됐다더라? 집안에 교수 하나 있다고 그 집 엄마 고개가 아주 빳빳해.”


고속도로에 올라서기 전부터 장모님은 쉴 새 없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아무래도 남의 집 자식 얘기로 이 집 자식들 기를 눌러 볼 요량이었던 것 같은데 지연과 봉구에게는 딱히 타격이 없었다. 오랜만에 교외로 나온 지연은 창 밖 단풍에 푹 빠져 서린이와 함께 ‘가을은 가을은 빨간 색~ 단풍잎을 보세요!’ 노래 부르기 바빴고 봉구는... 원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장모님도 지쳤는지 한 동안 말이 없다가, 건물이 점차 사라지고 차도 줄어드는 어디쯤에서부터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구글에 취직을 하면 뭐하니. 집엘 안 오는데. 그 집 엄마가 그렇게 결혼 좀 해라, 미국인도 좋으니까 혼자 살지 말아라, 말을 해도 결혼 생각 없다고, 계속 결혼 얘기 하면 한국에 아예 안 들어오겠다고 하더래.”


“장가를 잘 가면 또 뭐해. 이제는 아예 그 집 사람 다 됐다는데. 며느리는 얼굴 한 번을 안 비추고 명절이나 생일에는 용돈만 부쳐주고 만대. 얼마 전 태어난 손주 얼굴을 여태 한 번 봤대나 뭐래나.”


“그 집도 애 교수 만드느라 수 억 썼어. 노후 자금 탈탈 털어서 뒷바라지 한 거 아냐. 그런데 교수가 어디 쉬워? 요새는 논문도 꼬박꼬박 써야 한 대고. 애 얼굴이 말이 아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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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극과 극을 오가는 남 이야기를 듣다보니(봉구는 사실 이 얘기가 재미있었다.) 어느 새 전주에 도착해 있었다. 이모님 댁은 논밭이 펼쳐진 어느 동네에 있는 2층 집이었다. 이미 추수를 끝낸 논은 말라 있었고, 그 위로 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엄마, 아빠, 저거 뭐야?”

“어머, 역시 우리 이모!”

“아유! 이 언니 진짜!!!!”


봉구를 제외한 세 여자가 각자 나름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 옮기려던 봉구도 잠시나마 걸음을 멈출 정도로 눈앞에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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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의 산(山).

방금 밭에서 뽑혀 나온 배추들이 아직 흙도 털지 못한 채 마당에 쌓여 있었다.


“아빠! 나 보여?”

“아니! 어디 있어?”

“나 찾아봐~라!”


배추 산 뒤에 서 있는 서린이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우리 서린이 와쪄?”


배추 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전주 이모님이다.


“아이구, 언제 이렇게 컸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해주나보네!”

“아니요! 아빠가 해주세요! 아빠가 맛있는 거 진~짜 많이 해주세요!”

“그래~! 서린이는 정말 좋겠다. 그나저나 구 서방 어딨는가?”


그 소리에 봉구는 얼른 배추 산을 돌아갔다. 전주 이모님은 지난 번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늙으셨지만, 여전히 눈빛에 힘이 있고 허리가 꼿꼿하셨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는가?”

“네.”

“바쁜 사람 이렇게 불러서 미안하게 됐네.”

“바쁘긴 뭐가 바빠. 백수라니까? 그나저나 언니, 이거 대체 몇 포기야? 이걸 누가 다 먹어?”


장모님이 배추 산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툴툴 거렸다.


“오백 포기 밖에 안 돼. 우리랑 너네랑, 예쁜 서린이네랑, 저기 현주, 현아, 현수 네도 보내주고, 여기 노인정에도 좀 갖다 주면 없어.”


현주, 현아, 현수는 전주 이모님의 딸과 아들들이다. 지금은 서울에 있는데 너무 바빠서 못 내려왔다며 미안하다고 지연에게 미리 연락을 주었었다.


“아니, 온 세상 김장을 언니 혼자 해?”

“왜 내가 혼자 해? 너 왔잖아.”

“내가 이걸 어떻게 해!”

“그럼 뭐 하러 왔어? 겉절이에 수육 얻어먹으러 왔어? 넌 한 통도 가져가지 마.”

“안 먹어, 안 먹어! 요새 사 먹는 김치가 얼마나 잘 나오는데.”


세월이 흘러도 자매는 자매다. 환갑이 넘은 두 자매의 티키타카를 보며, 지연은 피식 웃었다.


“사 먹는 김치랑은 차원이 다르던데요. 얼마 전에 이모 김치로 김치찜을 해먹었는데, 와... 진짜 너무 맛있더라고요.”


지연이 여행 가방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집 김치가 푹 익으면 정말 맛있거든. 젓갈도 제일 좋은 걸로 쓴다, 너?”

“그래서 이번에는 많이 얻어가려고요. 저 일 열심히 할 테니까 많이 주세요!”

“지연이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말을 예쁘게 하더니. 엄마 안 닮아서 아주 좋다!”


씩씩 거리는 장모님을 두고 지연은 집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봉구와 서린이도 고춧가루가 튀어도 전혀 상관없을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반면 작업복을 가지고 오지 않은 장모님은 하는 수 없이 이모님의 몸빼 바지를 빌려 입어야 했다.


“자, 자네하고 내가 배추를 다듬고, 지연이가 소금을 뿌리면 되겠다. 그리고 너! 너는 거기 쪽파 다듬어.”


그 말에 모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린이는 마당에 있는 누룽지(견종을 알 수 없는, 이모님의 반려견이다.)와 노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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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구는 배추를 하나 씩 내려서 겉잎을 떼어내고 반으로 잘라 이모님께 넘겨 주었다. 이모님은 수돗가에서 배추를 깨끗이 씻어 지연에게 넘겨준다. 지연은 배추에 소금을 켜켜이 뿌려 착착 쌓아 놓는다.


어느 새 봉구의 입 속에서 자꾸 노래가 맴돈다. 단순 노동의 미학은 리듬감에 있었다. 논일이나 밭일을 하던 사람들이 ‘아하라 먼데~ 먼데먼데 먼데 소리~!’(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민요, '먼데소리'입니다.)하며 노동요를 부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다들 나름대로 리듬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지 마당에는 찰방찰방 배추 씻는 소리만 들려왔다.


“아우, 눈 매워! 무슨 쪽파가 이렇게 매워? 나 이거 못해.”


고요를 깬 건 역시나 장모님의 투정이었다.


“여태 고작 그거 깠어? 아주 열 일 했네. 됐다, 됐어. 애초에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지. 들어가서 커피나 타서 한 잔씩 돌려.”

“내가 무슨 다방이야.”

“그럼 집에 가!”


이모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장모님도 깜짝 놀랐는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알았어. 타오면 되잖아.”

“장모님!”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장모님을 봉구가 불러 세웠다.


“저는 믹스 커피 2 봉지 넣어주세요.”

“엄마, 나도!”

“여긴 기본이 2봉지야. 물 많이 넣지 말고 찐하게 타 와.”


모두 한 마디 씩 거들자 장모님은 입을 삐죽이며 들어갔다.


“구 서방 일 참 잘하네. 어디 가든 예쁨 받겠어. 일머리가 있다고들 안 해?”

“저 짤렸는데요.”


봉구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이구 그 회사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망하겠네. 됐어, 그런 회사 다닐 필요 없어.”


이모님 말에 봉구가 지연을 바라보자 지연도 싱긋 웃었다.


“우리 현주가 첫 직장 들어가고 나서부터 목소리가 영 안 좋은 거야. 지연이 너도 알겠지만 우리 현주, 어릴 때부터 꿈이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잖니.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 가, 더 어렵게 공부해서 임용고시 합격해, 그런데 막상 선생님이 되어 보니까 이게 아니구나 싶더래.”


부지런히 손을 놀려 배추를 씻고 다듬으면서 이모님이 말을 이었다.


“아깝지. 그동안 공부한 게 너무 아깝지. 그래서 그런가 얘가 그만 두지도 못하고 매일 매일 울면서 출근을 했다고 하더라고. 그것도 목소리가 하도 이상해서, 여기 불러다 앉혀 놓고 다그쳐 물으니까 얘길 한 거야. 그래서 내가 그만 두라고 했어. 사람이 살고 봐야지.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게 어디 가겠어? 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거니까.”


“언니 요새는 어때요?”


“요새 아주 바빠. 곧 있으면 애들 논술 고사잖아. 그래서 오늘도 못 내려 온 거야.”


이모님의 큰 딸인 현주 씨는 지금 강남 어딘가에서 논술 학원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때려 치운 뒤 돈이나 많이 벌어볼까 해서 들어간 학원이었는데, 거기에서 적성을 찾은 것이었다. 인 서울 대학 논술 1타 강사로 이름을 날리다가 지금은 독립해서 작지만 알찬 학원을 꾸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다 자기 자리가 있는 것 같애. 자네 장모는 저 깍쟁이가 자기 자리야.”


이모님이 눈을 찡긋하며 봉구에게 말했다. 봉구도 씨익 웃었다.


“우리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잖아. 나는 열다섯에 함바집에서 일하면서 돈 벌었고 그 돈으로 자네 장모 공부를 시켰지. 늘 쪼들렸어. 쌀도 툭하면 떨어지고. 그런데도 자네 장모는 기어이 대학을 가더라고. 삐쩍 마르다 못해 까칠까칠한 손으로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던지. 대단한 애야.”


이모님의 말을 듣던 지연의 손놀림이 조금씩 느려졌다. 처음 듣는 엄마의 이야기에 놀란 것 같았다.


“대학을 가더니, 아니 얘가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오더라고? 과외를 했다나 뭐라나. 공부하는 시간 빼고는 쉴 틈 없이 과외를 다닌 거야. 그러다 쓰러지기도 여러 번 했지. 그만 두라고 해도 악착같이 하더니... 그 덕에 우리 두 자매, 셋방살이 벗어나 전셋집도 얻고 그랬어.”


그때 장모님이 쟁반에 컵을 받쳐 들고 나왔다.


“커피 찾느라 한참 걸렸네. 무슨 커피를 그리 꽁꽁 숨겨 놨어?”

“코앞에 있는 걸 왜 못 찾아?”


동생을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나오는 이모님을 보며 봉구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지연은 여전히 생각이 많은 듯 허공을 보며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지연아! 짜다, 짜!”

“아,,, 네. 죄송해요.”


그러자 장모님이 지연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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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너는 블랙만 먹지? 지금쯤 당 떨어졌을 것 같아서 설탕만 조금 넣었어.”

“블랙커피 찾느라 늦었구만? 그건 찬장 저 구석에 있었을 텐데 용케 찾았네? 자, 다들 커피 마시면서 허리 좀 펴.”


봉구도 장모님이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온도에 아주 진한 커피였다.


“그럼 다들 마시고 수고해. 나는 허리가 아파서 구들장에 지져야겠다.”


그 말만 남기고 장모님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그렇지...”


그 뒷모습을 얄밉다는 듯 바라보던 이모님은 허리를 몇 번 뒤로 젖히시더니 다시 자리에 앉아 배추를 씻기 시작했다.


“삶에 여유가 없었어. 먹고 사느라 바빠서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았어. 나야 고향에 남았으니까 친구도 있고 언니 동생도 있는데, 자네 장모는 뼈 빠지게 공부하고 일하다가 서울로 시집간 거잖아. 그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추웠을지.”


“흠... 흠흠...!”


지연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지연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 진 것을 봉구는 본 것도 같았다. 지금 봉구가 지연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모른 척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 높던 배추 산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어느 새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당을 폴짝이며 뛰어다니던 서린이는 집 안으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 너머로 해가 넘어가면서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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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네. 그럼 나는 저녁을 준비해볼까.”


끄응차, 하며 이모님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봉구는 남은 배추를 모두 자르고 손질한 뒤 부지런히 씻고 얼른 지연의 옆에 와 앉았다. 그러자 지연이 봉구의 어깨에 기대왔다.


“나는 몰랐어.”

“응. 나도.”

“나는 딸이잖아.”

“나는 사위잖아.”

“우리가 모르길 바라셨을까?”

“어쩌면. 일단 모른 척 하자.”

“응.”


두 사람은 그렇게 가까이 붙어 배추에 소금을 뿌렸다. 그리고 또 함께 배추를 날라 차곡차곡 쌓았다. 아까 이모님이 하던 대로 떼어낸 배추 잎을 따로 모았다. 긴 줄에 엮어 시래기를 말리실 것이다. 이어 마당과 수돗가를 다 치울 때 즈음 이모님이 두 사람을 불렀다.


“얼른 들어와. 밥 먹어.”


그렇게 마주하게 된 밥상이었다. 봉구는, 단연컨대, 인생에서 세 번째로 큰 기쁨과 감동을 느꼈다. (첫 번째는 지연과 결혼하던 날이었고 두 번째는 서린이가 태어나던 날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과 고추기름으로 윤기가 흐르는 제육볶음, 이름도 다 알 수 없는 갖가지 나물들과 단정하게 썰어 놓은 포기김치, 무와 고추와 깻잎과 고춧잎장아찌, 그리고...


“많이 먹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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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님이 커다란 대접 다섯 개를 차례로 놓아주웠다. 그 안에는 푹 익힌 닭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사위가 오면 닭을 잡아야지.”

“언니 사위야? 내 사위지.”

“그럼 니가 잡든가.”

“이모, 엄마, 얼른 한 술 뜨세요. 우리 봉구 씨 숨 넘어 가기 전에.”

“아이구, 그래, 배고프겠다. 얼른 먹자. 우리 서린이도 맛있게 먹어.”


봉구는 얼른 닭다리를 하나 뜯어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밥도 한 술 떴다. 맛있었다. 김치도, 장아찌도, 제육볶음도 미치도록 맛있었다. 비슷한 듯 다르게 생긴 나물들은 한 입 먹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몸 쓰는 일을 해서 그런가. 아니다. 이 밥이 맛있는 건 전적으로 이모님 덕분이다. 인생 최후의 날에 한 가지 음식만을 먹을 수 있다면 봉구는 이모님의 이 흰쌀밥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날부터 함바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온 이모님. 이모님도 때로는 외롭고 추웠을 것이다. 그런 날들이 쌓이고 쌓여 이 집이 되고, 마당이 되고, 마당에 놓인 장독대가 된다. 그런 집에서 만든 삼계탕과 나물은 파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설령 최고급 한정식집이라고 하더라도 이 맛은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이 맛을 흉내 내려면 아주 오랜 시간을 잘 살아 내야한다는 걸 봉구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좋은 음식이란 그런 것이다. 만든 사람의 삶과 먹는 사람의 삶이 이어지는 음식. 당신의 그 성실한 삶을 나도 이어받겠노라고 결심하게 되는 음식.


“봉구 씨. 내가 집에서 밥 먹는 기분을 알겠지?”


정신없이 먹는 봉구를 보며 지연이 말했다.


“요새 봉구 씨가 집에서 밥 해주거든요.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제가 그거 먹으려고 낮에 미친 듯이 일해요. 야근 안 하려고.”

“구 서방이 밥을 해? 기특해라. 그래, 집에 밥하는 사람은 하나 있어야지. 애들도 엄마 아빠가 하는 밥 먹고 커야 튼튼한 거야.”


그 말을 하는 이모님은 지금 닭다리 하나를 떼어 장모님 삼계탕 그릇에 얹어 주고 있었다. 그러자 장모님은 닭 가슴살을 떼어 이모님 그릇에 담아준다.


“두 자매님 닭고기 궁합이 좋으시네.”

“우리가 다른 건 다 상극인데, 딱 이거 하나 잘 맞잖니.”

“닭 가슴살 퍽퍽해서, 무슨 맛으로 먹나 몰라.”

“이거 먹고 살 빼서 비키니 입으려고 먹는다, 왜?”


여전히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봉구는 쉴 새 없이 밥을 먹었다. 잘 먹어두고 싶었다. 이 든든한 느낌, 이 정성의 느낌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이런 밥을 지연에게, 그리고 서린이에게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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