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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손빨래의 맛

feat. 매일 할 일을 해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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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손빨래의 맛이라고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세탁기로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결국 손을 쓰게 만든다. 빨래 비누를 치덕치덕 바르고 손으로 박박 비빈다. 그럼에도 새하얗게 되진 않는다. 한숨이 나온다. 푹 숨을 뱉어내고 나서 계속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이 일의 시작은 서린이였다. 오후 4시 쯤 봉구는 서린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간다. 오늘 서린이는 저 멀리서 쿵쾅쿵쾅 뛰어 오더니 3미터 쯤 앞에서부터는 스케이트를 타듯 미끄러지며 다가왔다.      


“짠! 아빠, 나 멋있지?”

“응.”      


아이는 크면서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지고 있다. 가만히 누워만 있던 꼬물이가 뒤집고 기어다니고 앉고 서고 걷는다. 이제는 뛰는 것도 모자라 주르륵 미끄러지며 다가오는 것이다.      


“서린이 어린이, 양말 좀 살펴볼까요?”      


어느 새 다가온 현경이 서린이의 발을 들어 봉구에게 보여준다. 새까맣다.      


“오늘 서린이랑 친구들이 유치원 바닥 청소를 다 해줘서 선생님이 청소 할 게 없겠어요.”  

    

현경이 살짝 엄한 얼굴로 서린이를 본다. 서린이 ‘이크’ 하며 어깨를 움츠린다.    

  

“우리 서린이, 다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해요. 아버님, 내일은 까만 양말을 신겨서 보내주세요.”  

    

하지만 서린이에게는 까만 양말이 없다. 봉구는 다음 날에도 흰 양말을 신겨서 보냈고 그 양말은 또 다시 까만 바닥이 되어 돌아왔다. 봉구는 오늘 벗어 놓은 때가 까맣게 탄 양말과, 어제 세탁기에 빨았지만 때가 지워지지 않은 어둑한 양말을 번갈아 보았다. 


서린이에게 까만 때가 남은 양말을 신겨 보낼 수는 없다. 그건 봉구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두 양말을 한참 들여다보던 봉구는 단톡방을 열어 문자를 보냈다.      


[봉구: 유치원 청소 더 신경 쓰길 바람]    

  

그러자 잠시 후 현경이 대답을 했다.     

 

[현경: ㅋㅋㅋㅋㅋ 흰 양말 빨기 힘들지?] 

[지연: 봉구 씨 양말 대충 빨아. 내가 까만 걸로 몇 개 주문할게. 나 바빠서 답장 더 못해요.]      


아뿔싸. 지연이 봐 버렸다.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봉구는 괜히 현경이 얄미워졌다. 그렇게 단톡방에 뜬 현경의 말을 째려보던 중, 현경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양말 빨래 해?” 

“너 유치원 청소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애들이 얼마나 소란스러운데, 청소를 해도 해도 먼지가 장난이 아니야.” 

“....”      


하긴. 고작 세 사람 사는 봉구네 집도 마찬가지다. 정리하고 돌아서면 그 사이 어지럽혀져 있다. 특히 서린이가 지나간 곳은 초토화다. 인형과 장난감, 작게 자른 종이와 덕지덕지 묻어 있는 풀 자국, 특히 레고는... 재앙이다. 밟으면 잠시 지옥 문지기와 하이파이브 하는 거다.      

 

“오빠, 그거 빨래 비누로 비벼서 빨면 돼. 집에 빨래 비누 있어?” 

“아니.” 

“하나 사. 서린이한테 새하얀 양말 신겨주고 싶으면.”      


그리하여 봉구는 마트에 가서 빨래 비누를 하나 샀다. 그리고는 곧바로 서린이의 양말을 비벼 빨았다. 박박, 북북, 비빗비빗.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냄새였다. 괜히 그리움이 물컹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떠올랐다. 그 때 그 장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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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 시절, 현경은 항상 양말을 손빨래 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휙휙 벗어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었지만, 현경만큼은 양말을 스스로 빨아 신었다. 현경의 방에 가면 옷걸이 하나에 하얀 양말이 한 두 켤레 씩 늘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 방에서 이 빨래 비누 냄새가 났던 것이다. 그 결과 현경의 양말은 늘 새 하얬다. 교복도 반듯하게 다려져 있었고 머리도 단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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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떠올린 봉구는 갑자기 마음이 울렁거렸다. 왜 이러지? 대체 이 마음은 뭘까? 서린이의 양말을 탁탁 털어 햇볕에 넌 봉구는, 그 길로 학규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현경이? 맞아. 늘 양말을 빨아 신었지. 우리는 대충 세탁기 돌려서 니 껀지, 내 껀지 모른 채로 색 바랜 양말을 신었는데 말야.”      


브레이크 타임을 맞은 학규는 주방에 선 채로 볶음밥을 먹고 있다. 봉구는 그 접시를 가져다가 테이블 위에 놓아주었다. 학규가 와서 앉자, 봉구가 주방으로 가 피클과 물을 떠다 준다.      


“현경이 걔가 자존심이 세잖아. 보육원 살아서 꼬질하다는 말 듣고 싶지 않다고 그랬었어.”      


하긴. 그래서인지 현경은 어디서나 늘 환해보였다. 등과 어깨를 곧게 펴고 눈을 똑바로 뜨고 크게 웃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 태도와 힘은 새하얀 양말에서 나온 것일까.      


“그런데도 매번 결혼에는 미끄러지는 걸 보면, 걔 마음도 마음이 아닐 거야.”      


학규의 말에 봉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애써 양말을 빨아 신고 어깨를 곧게 펴고 환하게 웃던 현경은 벌써 몇 번, 사귀던 남자와 결혼 얘기가 오가던 즈음에 헤어졌다. 부모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상대에 따라서는 다른 핑계를 대기도 했지만 사실은 다 똑같은 이유였다. 차라리 돌아가신 거면 모르겠는데 아예 부모를 모르고 산다는 건 좀...      


봉구도 그랬었다. 지연과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을 때 장인 어른과 장모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었다.      


“나중에라도 내가 니 부모다, 하고 찾아오면 어쩌니?”      


그 말 안에는 봉구의 부모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있었다. 좋은 사람이라면 아이를 보육원에 맡길 리 없다고, 그러니 다시 찾아오면 정말로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지연이 받을 상처만 걱정하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지만, 지금 생각 보니 봉구도 그 때 상처를 받았던 것도 같았다. 이렇게 가슴 한 쪽이 욱신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난 그래서 결혼이 싫어. 내가 부모 없고 싶어서 없는 것도 아니잖아? 결혼은 내가 하는 건데 왜 내 부모 얘기가 나와야 해?”      


학규가 일어나 주방으로 가면서 말했다.      


“너 인사드리러 간다고 했을 때도 내가 주먹이 꽉 쥐어지더라니까. 그땐 지연씨도 잘 몰랐을 때니까, 여차하면 쫓아가려고 했어. 너희 처갓집에.”     


학규는 주방 구석구석 알코올을 뿌려가며 기름때를 닦기 시작했다. 학규는 매일 저 일을 하고 있겠지. 닦아도 닦아도 또 다시 내려앉는 기름때들을 매일 오후 박박 닦는다.      


“그런데 학규야.”      


봉구가 입을 열었다.      


“서린이 양말이 까매.” 

“그렇다며? 단톡방에서 봤어. 유치원이 더러워?” 

“아니. 그건 아니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학규를 보며 봉구는 생각했다. 현경이도 서린이도 양말이 까맣다. 현경이는 까맣게 변한 양말을 스스로 빨아 신었고 서린이는 봉구가 대신 빨아주고 있다. 이것이 부모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봉구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경이가 다시 연애를 하면...” 

“내가 꼭 만나 볼 거야. 아주 압박 면접을 할 거야, 내가. 그 집 부모 뒷조사도 싹 할라고.”      


학규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압박 면접이라. 지금은 봉구도 그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현경이 더 이상은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봉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린이를 데리러 갔다. 오늘도 서린이는 양말로 바닥을 미끄러지며 다가왔다. 봉구는 말없이 서린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빨래 비누 샀어?”      


현경이 주변 눈치를 보며 나지막이 묻는다.      


“주현경 선생님.”      


봉구가 현경을 불렀다.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봉구가 모처럼 자신을 부르자 현경이 놀란 눈을 하고 바라본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해요.”     


봉구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현경도 놀라 허리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아버님....”      


당황한 현경을 둔 채 봉구는 서린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의 메뉴는 오랜만에 볶음밥이었다. 햄 대신 간 돼지고기가 들어간다. 먼저 파기름을 살살 내고 당근과 양배추, 고기를 볶다가 소금 후추로 간을 한다. 고슬한 밥을 넣어 볶다가 한 쪽으로 밀어두고 빈 곳에 계란을 풀어 볶는다. 그리고 섞으면.      


“구서린 어린이!”      


봉구의 부름에 서린이가 고개를 든다. 그 사이 서린이는 거실을 어지르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이제 저녁 먹을 거야. 그 전에 거실 장난감 정리하자. 서린이 스스로 할 수 있지?” 

“아빠가 안 치워 줄 거야?”

“응. 오늘부터 서린이가 스스로 해. 이제 곧 서린이도 유치원에서 언니가 되니까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혼자서 해야 해.”      


그 말에 잠깐 생각을 하던 서린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장난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3분이면 될 일을 서린이는 30분이나 걸렸다. 그 사이 봉구는 주방을 정리하고 그릇을 꺼내 놓았다. 서린이가 정리를 마칠 때 즈음 지연이 돌아왔다.      


“엄마! 오늘 내가 장난감 정리했어! 아빠가 하나도 안 도와주고 내가 다 했어!”

“진짜? 우리 서린이 다 컸네!!!”      


서린이를 안아주던 지연이 봉구를 바라본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얼굴이다. 봉구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사진: Unsplash의Raychan

그날 밤 서린이를 재우고 나오자 지연이 봉구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무슨 일 있었어, 봉구 씨?" 

"응."     


봉구는 지연에게 서린이의 때가 탄 양말에 대해서, 현경의 흰 양말에 대해서, 희미하게 나던 빨래 비누 냄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현경의 연애와 아직 닿지 못한 결혼에 대해서도.      


“그런데 지연 씨. 나는 학규랑 생각이 조금 달라.”      


지연은 마음이 두근거렸다. 얼마 전부터 봉구는 생각이 많아졌고 말도 많아졌다. 많아져봤자 지연의 10분의 1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서 지연은 봉구의 말이 더 소중했고 귀 기울여 듣고 싶엇다.       


“현경이는... 그냥 멋있는 아이였던 거야.”

“멋있는 아이?” 

“응. 보육원에서 살면서도 흰 양말을 신어서 멋진 게 아니라, 그냥 멋진 아이.”      


봉구에게도 서린이의 양말을 하얗게 빠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세탁기를 돌리고 섬유유연제를 넣고 헹굼 코스로 한 번 더 돌리고 햇볕에 널어 다 마르면 반듯하게 개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빨래 역시 먼지처럼 돌아서면 쌓여 있었고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널고, 개고 나면 또 빨래가 쌓여 있다. 그런데 여기에 양말의 때를 말끔히 빼는 일까지 더해진다니. 


양말의 때를 외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거뭇한 양말을 신어도 신발을 신으면 딱히 티가 나지 않는다. 아니면 지연의 말처럼 검은 양말을 신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현경은 그걸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빨래 바구니에 양말을 던져 넣고 거뭇한 양말을 신는 대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을 감당한 것이다. 그건 부모가 있든 없는 쉽지 않은 결정이고, 멋진 결정이라고 봉구는 생각했다.      


“그러네. 현경 씨는 참 멋진 사람이네.”      


봉구의 말을 들은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린이한테 장난감 정리를 시킨 거야?” 

“응. 서린이도 해야 할 일을 스스로 감당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서린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다. 마음 같아서는 평생 따라다니면서 빨래도 해주고 밥도 해주고 집 정리도 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건 서린이를 진짜로 위하는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이든, 어떤 환경이든, 어깨와 등을 곧게 펴고 눈을 똑바로 뜨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 할 일은 스스로 해 내야 한다. 현경이 양말을 빨아 신었듯이, 학규가 매일 오후와 저녁에 기름때를 닦아 내 듯이, 지연이 아침마다 출근을 하고 봉구가 아침 저녁 주방에 서는 것처럼.      


다음 날 아침 봉구는 일찍 일어나 과일을 깎았다. 사과와 감, 오렌지를 깎아 아침 식탁에 올렸다. 그리고 도시락 통 세 개를 꺼내 지연에게 하나, 서린이에게 두 개를 싸 주었다.      


“나는 왜 두 개야?” 

“큰 거는 서린이 간식으로 친구들이랑 나눠 먹고, 작은 거는 선생님 드려.”      


서린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봉구는 어제 서린이가 신은 양말을 비벼 빨았다. 파란 빨래 비누에 박박 문질러서 한참을 비벼야 했다. 그때 현경에게 문자가 왔다.      


[현경: 서린 아버님. 잘 먹을게요. 그나저나 어제부터 오빠 조금 이상한데. 언니, 오빠 괜찮아요?] 

[지연: 응. 괜찮아요. 나 바빠서 답 못해요.] 

[학규: 주현경. 소개팅 할래? 우리 가게 단골인데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 신원 보장 확실! 33살 약사고, 우리 사정 다 알고 있고.] 

[현경: 콜!]      


그 대화를 눈으로 좇으며 봉구는 생각했다. 삶은 아무리 생각해도 손빨래 같은 것이라고. 매일 귀찮은 일이 늘어서 있고 그것들을 해치우며 살아간다. 끝없는 미션이 등장하는 게임처럼 우리는 매일 잠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씻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다. 그런 매일의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한다. 이 매일의 것들을 괜찮게 해 낼수록 우리는 더 괜찮은 사람이 된다. 하얀 양말을 신은 열다섯 살의 현경처럼. 멋진 레스토랑 쉐프가 된 서른셋의 학규처럼. 초고속 승진 도로를 달리고 있는 지연처럼.     


사진: Unsplash의BBiDDac


봉구는 문득 자기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연은 봉구가 해주는 밥을 먹고 힘을 내고 있고 서린이는 봉구가 빨아준 새하얀 양말을 신고 유치원에 간다. 이 두 사람이 마음껏 멋질 수 있는 이유는 분명 봉구에게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두 사람이, 멋질 수 있도록 돕는 일. 이것은 희생이 아니다. 도리어 기쁜 일이고 고마운 일이다. 손빨래를 하는 지금 봉구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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