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분명 돈가스의 맛이라고, 서린이는 지금 말하고 있다. 그 돈가스를 위해 부지런히 돼지고기 등심을 사다가 칼집을 내고, 맛술을 부리고,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계란과 밀가루와 빵가루를 밧드에 부어 준비하고 고기에 밀계빵을 차례로 묻힌 후 달군 기름에 풍덩, 빠뜨린 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다가 건져내고 한 김 식힌 후에 다시 한 번 튀기고 나서 우스터 소스와 케첩, 양파와 양송이버섯으로 만든 소스를 뿌린 아빠 봉구에게는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서린이는 지금 눈앞에 앉아 돈가스를 먹고 있는 한 남자아이를 보며 말하고 있다. 이거 진짜 인생 돈가스다, 그렇지?
일의 시작은 얼마 전 유치원 하원 시간에 있었다. 얼마 전 학규와 연애를 시작한 현경이 발그레한 얼굴로 서린이를 데리고 나왔다.
“서린이 어린이, 오늘도 아빠 엄마 말 잘 듣고, 우리 내일 또 만나요!”
“네! 선생님!”
현경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봉구의 눈에 들어왔다. 그 눈길을 현경도 봤는지 한층 더 수줍게 웃는다.
“선생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봉구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현경도 마주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저는 요새 매 순간 행복할 따름입니다.”
그 말에 봉구도 슬쩍 웃음이 났다. 그렇지, 그게 행복일지도 모르지. 그때였다. 봉구와 현경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서린이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재현아!!”
재현이? 서린이랑 가장 친하다는 그 남자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린이에게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아서 속상하게 만들었다는 그 아이? 봉구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봉구는 얼른 서린이를 따라 나갔다. 거기에는 한 남자아이와 아이의 엄마, 그리고 또 다른 여자아이와 아이의 엄마가 나란히 서 있었다.
“서린이구나. 재현이랑 수빈이는 핫초코 먹으러 갈 건데, 서린이도 같이 갈래?”
“네! 재현아, 나랑 같이 가자!”
서린이가 재현에게 불쑥 다가가더니 손을 잡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수빈이라는 아이도 재현이의 손을 잡았다.
“재현아, 나랑도 손잡고 가자.”
그 상황은 봉구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동네 엄마들과 함께 서 있는 것도 불편했을 뿐 아니라, 서린이에게 수빈이라는 라이벌이 있다는 사실이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감히 우리 서린이를 둘 중 한 명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서린이는 유일하단 말이다. 서린이는 오직 하나 뿐인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교 당해서도, 선택되어서도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세 아이는 저쪽으로 멀어져 버렸다.
“서린이 아버님, 같이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그제야 봉구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이 불편한 자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봉구는 아파트 상가에 있는 작은 카페에 세 아이와 두 엄마와 함께 앉아 있어야 했다.
“서린이 아버님께서는 사업하시나 봐요. 시간이 자유로우신 것 같아요.”
“아닙니다. 몇 달 전 회사에서 짤려서 지금은 가정주부를 맡고 있습니다.”
“아....”
말을 꺼낸 수빈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자 재현 엄마가 얼른 말을 이었다.
“우리 재현이가 그러던데, 서린이 아빠가 맛있는 걸 많이 해줘서 서린이가 매일 자랑한다고.”
그러자 수빈 엄마가 다시 끼어 들었다.
“요새 서린이는 뭐 잘 먹어요? 우리 수빈이는 입이 짧아서 그런지 잘 먹질 않아요.”
그 말에 봉구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서린이는 요새 김치를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이모할머니 댁에서 가서 김장을 했는데 아주 맛있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돼지고기 앞다리를 사서, 이왕이면 녹차 먹인 걸로요, 김치 찜을 하기도 하고 찌개를 끓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두부는 꼭 들어가야 합니다. 서린이가 김치찌개에 들어간 두부로 밥을 비벼 먹는 걸 좋아하거든요. 밑반찬은 아직까지 제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서 이모님께 받아온 것을 아껴서 먹고 있습니다. 대신 싱싱한 채소를 먹이기 위해 양배추 샐러드나 브로콜리를 데쳐주고 있습니다.”
“아....”
다시 수빈 엄마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봉구는 거기에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리고 저는 보통 이 시간에 서린이에게 간식을 주지 않습니다. 식사를 앞두고 간식을 먹으면 밥맛이 없으니까요.”
“아....”
난감해하던 수빈 엄마는 더 이상 봉구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대신 재현 엄마에게 요새 어느 영어학원이 유명하다더라, 거기 레벨테스트를 받으려면 올 겨울에 빡쎄게 해야 한다더라, 겨울 방학에는 영어 캠프를 보내야겠다,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
잠시 후 수다가 끝이 나고 방향이 다른 수빈이네는 저쪽으로, 방향이 같은 재현이네와 서린이네는 이쪽으로 향했다. 이제야 재현이를 독차지할 수 있게 된 서린이는 행복한 듯, 재현이의 손을 꼭 쥐고 앞서 걷고 있었다.
“제가 서린이한테 참 고마워요.”
그때 재현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재현이가 9월에 여기로 이사 오면서 유치원을 옮겼거든요. 중간에 들어간 거라서 적응을 못할 까봐 걱정 많이 했는데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서린이라는 친구가 잘 챙겨준다고. 그리고 재현이도 집에서 매일 서린이 얘기 많이 했어요. 오늘은 서린이랑 양치 같이 했어, 오늘은 서린이랑 블록 놀이 했어, 하면서.”
역시, 내 새끼다. 봉구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연을 닮아서 그렇다고, 지연의 밝음이 서린이에게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라고 봉구는 생각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엄마, 서린이 오늘 우리 집에서 저녁 먹으면 안 돼?”
그때, 재현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봉구는 그때 본 서린이의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빛이 한 줄기 쏟아져 자신을 비춘 것처럼 서린이는 기쁨과 감격에 겨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난겨울 크리스마스 때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하트핑 유리성 선물을 받았을 때에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엄마는 괜찮은데, 서린이 아빠도 괜찮다고 하실까?”
지금 안 괜찮다고 하면 저는 딸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봉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저희 집에서 저녁먹이고 7시 쯤 데려다 줄게요.”
봉구는 그날 저녁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하필 지연도 야근을 하는 날이었다. 베란다 창이 까맣게 어두워지도록 이 집에 혼자 있는 건 처음이었다. 집이 텅 빈 것 같고 혼자 사는 홀아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작고 작은 서린이의 존재감이 이렇게나 컸다니.
생각해보니까 봉구는 혼자서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에는 보육원에서 학규와 현경 그리고 여러 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서울에 와서도 학규와 방을 얻어서 함께 지내다가 지연과 결혼을 하면서 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수없이 많은 밥을 혼자 먹었고 때로 학규가 바쁘거나 지연이 출장을 가면 혼자 자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기분이 달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혼자였다. 봉구는... 쓸쓸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얼른 TV를 켰다. 순식간에 집안을 장악한 고요함을 내쫓고 싶었다. 그리고 방마다 다니며 불을 켰다. 어둠이 물러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불빛에 숨겨 놓았던 마음 속 텅 빈 공간이 훤하게 드러난 것만 같았다. 결국 봉구는 다시 TV와 불을 끄고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재현이네가 산다던 107동 앞에서 서성였다. 조금 있으면 서린이가 나올 것이다. 그럼 서린이랑 같이 집에 들어가야지.
[안녕하세요 서린 아버님. 지금 서린이랑 재현이는 밥 잘 먹고 블록 놀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현이도 서린이도 너무 아쉬워해서요. 혹시 한 시간 쯤 더 놀다 가도 될까요?]
안 된다. 봉구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결국 답장을 보냈다.
[서린이는 이제 씻고 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현이와 서린이가 아쉽다면 내일은 저희 집에서 저녁을 먹이고 놀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봉구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초대한 것이다. 그간 집들이 좀 하라는 회사 사람들의 닦달에도 꿈쩍하지 않던 봉구였다. 심지어 학규나 현경이 조차 봉구가 초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봉구가 지금 재현이를 초대한 것이다. 서린이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아빠!!!!”
잠시 후 7시가 조금 지나자 약속대로 서린이가 나왔다. 재현이와 엄마도 함께 배웅을 나왔다.
“아빠, 나 오늘 함박 스테이크 먹었다!”
“우와 맛있었겠다!”
서린이를 보자 봉구의 어깨가 살짝 내려가면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봉구는 자신이 저녁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요리를 잘 못해서 마트에서 사다가 데워줬어요. 그래도 채소는 먹여야겠다 싶어서 버섯 조금 볶아 줬고요.”
“감사합니다.”
“아빠, 내일 재현이 우리 집 와?”
“어.”
“재현아, 너 뭐 좋아해? 우리 아빠가 다 만들어 줄 수 있어!”
“나? 나 돈가스!!!!”
재현이 망설임 없이 돈가스를 외치자 도리어 재현 엄마가 놀라며 손 사레를 쳤다.
“재현아. 돈가스는 나중에 엄마랑 사 먹자. 그거 집에서 하려면 엄청 힘들어.”
재현 엄마는 중간에서 난처해하는 것 같았지만 봉구는 이미 머릿속으로 돈가스 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니면 엄마가 저기 가서 사올까? 그걸로 저녁에 서린이랑 먹을래?”
“재현 어머님,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봉구는 돈가스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날 오전 서린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준 봉구는 곧바로 마트에 가서 두툼하게 썬 돼지고기 등심과 빵가루, 튀김용 식용유를 샀다. (놀랍게도 이외의 재료는 이미 집에 다 있었다.) 서린이가 오기 전 해둘 것이라고는 고기를 두드려 펴고 밑간을 해두는 것 밖에 없었다.
시간이 되자 봉구는 서린이를 데리러 갔다. 그곳에는 벌써 재현 엄마와 어제 만났던 수빈 엄마가 와 있었다. 그때 어제처럼 재현이를 사이에 두고서 서린이와 수빈이가 양쪽에서 재현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
“엄마, 오늘 재현이 서린이네 집에 가서 논대. 나도 가면 안 돼?”
“안 돼. 너 오늘 영어 캠프 레벨 테스트 보러 간다고 했지? 그거 늦으면 큰일 나.”
“나도 가고 싶단 말이야. 서린이 아빠가 돈가스 해주신대.”
“돈가스 엄마가 사줄게. 저기 맛있는데 있지? 오늘 거기 가자.”
“싫어. 나도 재현이랑 놀고 싶단 말이야.”
결국 수빈이는 엉엉 울면서 엄마에게 끌려갔다. 재현 엄마가 재현이를 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재현이 놀라서 말했다.
“나 아냐. 나는 엄마 말대로 서린이네 간다는 말 안했어. 그런데 서린이가...”
고자질은 나쁘다는 교육을 받았는지 재현이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서린이와 엄마만 번갈아 보았다.
“제가 말했어요. 수빈이한테. 그러면 안돼요?”
“서린이 어린이, 때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친구를 위하는 일일 수 있어요.”
따라 나온 현경이 서린이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자랑하고 싶었어요.”
“그랬구나. 서린이가 수빈이한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구나.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수빈이가 속상해 하는 걸 보니까 마음이 어때요?”
“저도 속상하고 미안해요.”
“맞아요. 친구가 속상해 하면 우리도 속상해요. 그래서 때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거예요.”
“네. 다음에는 그렇게 하겠지만...”
서린이가 재현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는 다 말해줬으면 좋겠어. 나는 조금 속상하더라도 다 알고 싶어. 너에 대해”
그러자 재현이가 엄마를 바라봤다. 봉구가 보니 재현 엄마는 서린이의 그 말에 감동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어쩜 서린이는 말을 그렇게 예쁘게 하니. 정말 나도 딸 하나 낳아야 할까봐. 서린 아버님 좋으시겠어요.”
하나도 안 좋다. 과연 저 재현이라는 아이가 내 딸 서린이에게서 저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오늘 저녁 내내 지켜보리라는 생각 뿐이었다.
재현이는 정말이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이였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는 만져도 되는지 먼저 물었고 다 놀고 나서는 제 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서린이가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할 때도 같이 블록 놀이를 하자고 할 때도 자신이 하던 것을 제자리에 두고는 서린이 곁으로 와서 함께 놀았다. 서린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같이 웃어주었다. 서린이가 좋아할 만하다고, 봉구는 생각했다.
그 사이 봉구는 밑간을 해 둔 고기에 부지런히 밀가루와 계란과 빵가루를 묻혔고 기름을 불에 올렸다. 온도가 되자 돈가스를 넣고 가만히 기다렸다. 돈가스 주변으로 거품처럼 기름이 끓었다. 서서히 빵가루가 갈색으로 빛났다. 잠시 한 김 식히는 동안 오늘도 양배추를 얇게 썰었다. 서린이는 참깨 소스를 좋아하는데, 재현이는 입에 맞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커다란 접시를 꺼내 밥을 봉긋하게 담고, 그 위로 검은 깨를 몇 개 뿌리고, 돈가스를 단정하게 썰어 담았다. 양배추도 소복히 담고 소스를 뿌린 후 그 위에는 방울 토마토를 반으로 갈라 얹었다.
“우와, 식당에 온 것 같다!”
접시를 본 재현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재현이가 돈가스를 한 입 베어 물자 바사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물오물 두어번 씹더니 재현이가 깜짝 놀란다.
“진짜 맛있다. 서린아, 이거 내 인생 돈가스야!”
“인생 돈가스?”
“응! 내 인생에서 제일 맛있는 돈가스!”
“그럼 나도 아빠 돈가스가 내 인생 돈가스야!”
얼핏보면 칭찬 같지만 이건 엄연히 봐서 칭찬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봉구는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재현이의 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남의 집 아이를 데려다가 밥을 먹이겠다고 했으니 충실히 먹이는 것이 당연할 뿐이다. 그게 돈가스였든, 탕수육이었든, 봉구에게는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린이의 평가는 중요하다. 맨 처음 가정주부가 되었을 때 봉구는 서린이의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음식을 시작했다. 그렇다. 봉구의 요리 시작점은 바로 서린이에게 있었다. 그 후로도 서린이의 표정과 말은 그 무엇보다도 봉구에게 민감하게 다가왔다. 지연은 뭐든 잘 먹는 편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서린이의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럭저럭 편식 없이 잘 먹어주었지만.
지금 서린이는 ‘재현이가 인생 돈가스라고 했으므로, 나 역시 이것이 인생 돈가스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건. 봉구가 만든 돈가스의 맛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저기 김밥해븐에서 파는 돈가스라 하더라도 재현이 엄지를 세워들면, 서린이도 엄지를 들겠다는 뜻이었다. 이건 과연 칭찬일까.
“우리 집에도 딸 바보가 살고 있었네.”
그날 밤 봉구의 이야기를 들은 지연이 말했다.
“이제 서린이가 친구를 좋아할 때가 됐지. 나중에 사춘기 오면 엄마 아빠보다 친구를 더 좋아한다잖아. 그래도 재현이가 괜찮은 아이라고 하니까 나는 마음이 좀 놓인다. 게다가 봉구 씨가 그 아이 인생 돈가스를 만들어 준거잖아. 그런데 그거 좀 남았어? 내일 아침에 나 먹을 수 있나?”
그리하여 다음 날 새벽 남은 돈가스를 튀기면서 봉구는 생각했다. 이 돈가스가 재현이에게는 인생 돈가스구나. 어쩌면 엄마가 ‘서린이 아빠가 해주는 돈가스를 먹고 꼭 인생 돈가스라고 말해야 돼’라고 시켰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현이는 접시에 담긴 돈가스를 다 먹고도 한 판을 더 먹었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참 예쁘다는 생각을, 봉구도 했던 것 같다.
“이거 진짜 맛있다. 나 오늘 도시락 가능?”
지연의 말에 봉구는 얼른 일어나 도시락 통을 꺼냈다.
“나도 싸가고 싶어, 아빠. 나도 도시락 싸줘.”
“서린아 그건 안돼지. 너는 유치원에서 점심 주잖아.”
지연이 서린이를 말렸다.
“재현이가 좋아한단 말이야. 갖다 주고 싶어.”
그 말에 지연이 봉구를 바라봤다. 당신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지, 나도 이제 조금 알겠어, 싶은 표정이었다.
서린이를 간신히 달래어 유치원에 데려다 준 봉구는 아침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 오래 생각했다. 나는 서린이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반항하고 떼 쓸 부모가 없던 나는, 서린이의 반항과 떼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그런 생각을 하다가 봉구는 서린이를 데리러 갔다. 서린이는 오늘도 재현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 수빈이는 영어 학원을 등록해서 하원 시간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때 봉구가 재현 엄마에게 종이 가방을 하나 건넸다.
“돈가스입니다. 좀 아까 튀긴 거라서 살짝만 데우시면 될 겁니다.”
“어머! 감사해요...!! 안 그래도 재현이가 어제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자 서린이가 봉구를 보며 엄지를 척, 세웠다. 그 옆에서 현경도 엄지를 세워주었다.
“아빠 멋있다, 그렇지?”
“네.”
그 순간 하루 종일 끌어안고 있던 걱정들이 한 순간 사라졌고 봉구의 머리와 가슴이 뻥 뚫렸다. 봉구는 서린이의 손을 꼭 잡고서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다.
앞으로도 봉구의 인생은 서린이의 말 한 마디에, 표정 하나에 많이 휘청 일지도 모르겠다. 서린이는 봉구에게 있어 전에 없던 새로운 세상이고 낯선 우주다. 어찌 서린이만 그럴까. 이번에 알게 된 재현이도, 재현 엄마나 수빈이네도 모두 하나의 우주다.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우주들이 만나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봉구는 인생은 정말이지 돈가스처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먹는 사람이 맛있다고 말하면 나도 맛있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봉구는 자신이 지연을 만나 인생이 맛있어진 것처럼, 서린이의 인생 역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다채롭게 맛있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린이 역시 누군가에게 인생의 멋진 맛을 선물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다면 돈가스 정도야 얼마든지 튀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