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화 빈대떡의 맛 (1)

feat. 명절 준비

by 바람부는 언덕
20241227_083753.png 마켓컬리 '녹두빈대떡' 검색 결과


인생은 진짜로, 빈대떡의 맛이 아닐까, 하고 지금 봉구는 생각하고 있다. 고소한 녹두 반죽 사이로 진한 육향을 풍기는 돼지고기 조각이 까꿍, 인사를 건넨다. 그 사이로 잘 익은 김치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면 입 안은 눅진함과 고소함, 짭조름하고 시큼한 맛까지, 맛의 총 동창회가 펼쳐진다.


1943년 발표되었다던 노래 ‘빈대떡 신사’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TV 프로그램에서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빈대떡이 찬밥처럼 서글픈 음식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다. 노래 속 값비싼 요릿집 사장은 돈 없는 신사를 어여삐 여겼던 것이 아닐까. 괜히 여기서 돈 쓰지 말고 얼른 집에 가서 맛있는 빈대떡을 먹으라고, 들뜬 마음에 거리를 쏘다니던 신사를 따수운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만큼 빈대떡은 충만하고도 맛있는 음식이다.




일의 시작은 1월 말 설 명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었다. 그날 지연은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점심도 샌드위치로 대강 때운 뒤 오후까지 부지런히 달리다가 잠깐 커피를 한 잔 하고 있었을 때, 봉구에게 전화가 왔다.


“봉구 씨,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지연 씨, 저기 있잖아...”

“응.”

“오늘 서린이 하원 시켜줄 수 있어?”

“응. 6시 퇴근하고 바로 유치원으로 갈게. 그런데 왜? 자기 지금 어딘데?”

“....장모님 집.”

“뭐??????????”


지연의 목소리가 커지자 팀원들이 깜짝 놀라며 지연을 바라봤다. 지연은 미안한 듯 웃으며 팀원들을 안심시키고 다시 전화에 집중했다.


“엄마가 왜? 오늘은 뭘 시키셨는데?”

“이따 집에 가서 얘기할게. 갑자기 부탁해서 미안해.”

“아니야. 그럼 집에서 얘기하자.”


그리하여 지연은 6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서린이를 데리러 갔다.


“우리 서린이가 오늘은 꼴등이야?”

“아니. 1등이야. 선생님이랑 제일 오래 논 사람 1등!”


다행히 서린이는 현경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지 표정이 밝았다. 지연은 현경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날이 갈수록 예뻐지시네요. 사랑의 힘 인가 봐요. 오홍홍.”

“네, 맞아요. 서린 어머님. 사랑의 힘이랍니다. 오홍홍홍. 그나저나 서린이 아버님은 왜....?”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 집에 오면 깊이 있는 대화를 해봐야죠. 오홍홍홍.”


지연이 서린이와 함께 찬밥을 데워서 밑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야 봉구는 집에 돌아왔다. 손에는 웬 아이스박스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것은 봉구가 힘겨운 하루를 보낸 값이라는 것을 지연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봉구 씨, 괜찮아?”


봉구는 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뭐야?”

“한우 갈비랑 양지.”

“쓰읍.”


살짝 벌어진 이 사이로 숨을 들이키는 이 소리는, 지연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대체 엄마 집에서 뭘 한 건데?”


그리하여 봉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얼마 후 설 명절 전날 전주에서 이모님이 올라오신다. 서울에 사는 지연의 사촌들이 전주에 내려오는 것보다는 이모님이 혼자 움직이시는 게 편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사위와 며느리가 사는 집은 영 불편하니 명절 내내 장모님 집에서 지내겠다고 통보를 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장모님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봉구를 불렀고, 봉구는 오늘 아침 서린이를 데려다주자 마자 그 집에 가서 대청소, 아니 대대대청소를 했던 것이다.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 버릴 건 버리고, 새로 담을 건 담고, 칸막이를 꺼내 닦고, 냉동실을 비웠다. 이불과 베갯잇을 벗겨 빨고 먼지가 내려앉은 양주 진열장도 모두 닦았다. 베란다에 있던 바싹 마른 화분들도 모두 가져다 버리고 바닥은 물청소를 했다. 옷들도 모두 꺼내 계절별로 정리하고 버릴 건 따로 모아두었다.


“내일도 가야 돼.”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그만큼 했으면 됐지.”

“분리수거도 못하고 왔어. 옷 수거 업체에도 연락했는데 내일 올 수 있다고 해서.”

“엄마보고 하라고 해.”

“장모님은... 안 돼.”


하긴. 지연도 알고 있었다. 엄마는 살림에는 정말이지 소질이 없었다. 엄마는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서랍을 사는 방식으로 집을 치우곤 했는데 그러다보니 집에는 점점 더 물건이 쌓였고 자꾸 좁아지고 산만해졌다.


“내가 사람 부르라고 할게.”


지연이 휴대폰을 꺼내자 봉구가 얼른 손을 내밀어 말렸다.


“아냐. 내가 다녀올게. 내가 하고 싶어, 지연 씨.”


그 말에 지연은 휴대폰을 내려 놨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한우 갈비만 받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이에 다음 날 지연은 회사가 끝나자마자 서린이를 데리고 엄마 집으로 향했다.


20241227_084002.png https://namu.wiki/w/%EA%B1%B0%EC%8B%A4


“완전 새 집이 됐네.”


그야말로 환골탈태였다. 마사지기와 족욕기, 러닝머신에 실내자전거로 꽉 차 있었던 거실은 서린이가 굴러다닐 만큼 넓어졌고 늘 옷이 걸려 있었던 식탁 의자는 이제야 우아한 제 모습을 되찾았다. 주방 역시 정신없이 나와 있던 각종 조리도구들과 냄비, 프라이팬이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 것 같았다. 아빠의 양주 진열장도, 엄마의 명품백 수납장도 웬만한 쇼윈도 부럽지 않았다.


"대체 우리 봉구 씨를 얼마나 부려 먹은 거야? 나 이대로 못 가.”

“그래. 여기 있는 거 아무거나 집어 가.”


엄마도 어제 오늘만큼은 손을 보탰는지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지연이 마음 약해질 딸은 아니었지만.


“카드 줘.”


지연은 어깨를 쫙 편 채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드? 내 카드를 왜 널 줘?”

“그 한우 쪼가리로 안 되지. 우리 봉구 씨가 장장 이틀을 꼬박 갖다 바쳤는데!”

“그래. 너 그 낡은 것 좀 갖다 버리고 새로 빽이나 하나 사.”


엄마도 봉구를 부려 먹은 것이 미안했는지 별 말 없이 카드를 건넸다.


20241227_084049.png https://namu.wiki/w/%EC%8B%A0%EC%9A%A9%EC%B9%B4%EB%93%9C


“빽이 대수야? 내가 아주 시원하게 긁어 줄 거야!”

“적당히 해. 선은 넘지 말자.”

“내가 알아서 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연은 그 카드를 봉구에게 건넸다. 하지만 봉구는 받으려고 하질 않았다.


“이걸 내가 어떻게 써.”


하긴, 아무리 그래도 장모는 조금 어려운 존재니까.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봉구 씨, 요새 뭘 제일 하고 싶어? 내가 그거 같이 해줄게.”

“난 괜찮아. 별로 안 힘들었어. 보람도 있고.”

“자꾸 그러면 엄마 집 못 가게 한다.”


봉구는 그제야 곰곰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음... 그럼 지연 씨, 나 있잖아. 명절에 다 같이 모여서 밥 먹고 싶어.

“다 같이? 누구? 학규 씨랑 현경 씨?”

“응... 명절이잖아.”


그리하여 설 명절을 앞둔 주말에 지연은 봉구와 함께 백화점 지하 식품관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큰 카드를 끌며 웬만한 건 다 담기 시작했다.


48424_30693_4056.jpg https://www.thefirstmedia.net/news/articleView.html?idxno=48424


“지연 씨, 이건 좀 많지 않을까?”

“안 많아. 나 많이 먹을 거야.”

“저기 그러면 지연 씨,.. 우리 장인 장모님도 오시라고 할까?

“엄마, 아빠도?”

“응. 명절이잖아.”


언제였을까. 명절이라는 이유로 지연이 엄마 아빠와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명절음식을 먹은 게 말이다. 어릴 적 명절이 되면 엄마는 여기저기에서 음식들을 사왔다. 보기에는 그럴 듯 했지만 꼬치 속 햄에서는 밀가루 냄새가 났고 고구마 전 역시 밀가루 옷이 너무 두꺼웠다. 비싼 갈비찜은 고기보단 무나 당근이 더 많이 들어 있었고 떡국 속 떡은 너무 딱딱하거나 너무 불어 있었다.


얼마 후 지연이 중학교에 올라가던 해,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명절은 그저 3일 내내 쉬는 연휴가 되었다. 시장에서 음식을 사오는 대신,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갔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명절이 되면 다 같이 좋은 식당에서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는 물론이고 아빠도 그런 명절을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에도 괜찮다는 소갈비집을 예약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 명절을 우리 집에서 직접 치르자고?


“봉구 씨 힘들 텐데.”

“아냐. 현경이랑 학규도 와서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그럼... 더 담자.”


그렇게 지연은 카트를 산처럼 채워서 장을 봤고, 아마도 지연의 엄마는 카드 내역을 보고 뒷목을 잡았겠지만, 봉구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유튜브나 요리 잡지에서 본 재료들을 실컷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절이 되려면 아직 이틀 남았지만 봉구는 그날 오후부터 부지런히 준비를 시작했다. 귀한 옥돔(장모님 감사합니다)은 내장을 손질해서 잘 편 후에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베란다에서 선풍기를 틀고 건조 시켰다. 6시간을 꼬박 말린 후 다시 뒤집어서 두 시간을 더 말려야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장모님에게 받아온 한우 갈비는 핏물을 빼고 간장과 배(백화점 최상급 상품, 장모님 감사합니다.), 마늘을 곱게 갈아 만든 양념에 재워두었다. 그 다음 날에는 도라지를 까 소금에 바락바락 씻어 떫은맛을 없애두었고, 말린 고사리를 물에 끓여 하룻밤 묵혀두었다. 한우 양지도 푹 고아 육수를 끓여 두었다. 그리고 녹두를 불려 곱게 갈아두었다.




그리고 드디어 설 연휴의 첫 날이 밝았다. 봉구가 결연한 표정으로 앞치마를 매고 있을 때 현경과 학규가 도착했다.


“이게 다 뭐야? 무슨 종갓집 차례지내냐?”


학규가 봉구가 꺼내 놓은 갖가지 재료를 말했다.


“어른이 몇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오빠, 뭐부터 할까?”


그 사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현경이 팔을 걷어 부치며 묻는다.


“쪽파 다듬어. 학규 너는 이거 같은 길이로 썰고. 지연 씨는 꼬치를 끼워 줄래요?”


그렇게 봉구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연과 현경, 학규가 꼬치를 산더미처럼 제작하는 동안 봉구는 부지런히 나물을 볶고 무쳤다. 도라지와 고사리, 시금치(아픔의 시금치, 상처의 시금치)가 완성되었다. 인덕션 제일 큰 자리에는 갈비찜이 끓고 있었다.


“냄새 너무 좋다. 우리 점심은 뭐 먹어?”


현경의 물음에 봉구는 잠시 버퍼링이 걸렸다. 점심? 아 맞다, 점심 먹어야 하지. 봉구의 멍한 표정을 본 학규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너 점심 생각 안하고 있었지? 내일 아침 먹을 생각만 했지?”

“...”


그렇다. 봉구의 머릿속에는 사실 내일 아침 상차림만 가득했다.


“그럼 비빔밥 어때요? 저기 나물도 많으니까.”


지연은 천재라고 봉구는 생각했다. 봉구는 서둘러 밥을 안치고 계란을 부치고 어묵 국을 끓였다. 그렇게 점심을 먹은 후에는 곧바로 전 부치기가 시작됐다. 역시나 백화점에서 장카(장모님 카드)로 사온 넓은 팬을 주방 바닥에 두고 기름을 넉넉히 둘렀다. 그리고 색색의 재료를 꽂은 꼬치부터 부쳤다. 학규가 옆에서 부지런히 계란 물을 묻혀 팬에 놓아주면, 봉구가 적당한 때에 뒤집었고, 꺼내어 식혔다. 그러면 지연이 한 개, 현경이 한 개, 서린이가 한 개 집어 먹었고, 현경이가 학규 입에 한 개, 지연이 봉구 입에 한 개 넣어주었다. 그러다 보니 부지런히 부치는 만큼 부지런히 쌓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채반은 성실히 채워지고 있었다.


20241227_084558.png 당근마켓 검색 이미지


그 다음으로 봉구는 고구마전을 부쳤다. 적당한 두께로 썬 고구마를 학규가 부침가루 반죽을 얇게 묻혀 팬에 올려주면 역시나 봉구가 딱 좋은 때에 뒤집고 꺼내는 것이다. 그러면 또 지연이 한 개, 현경이 한 개, 서린이가 한 개, 지연이 봉구에게 한 개, 현경이 학규에게 한 개,..


그 다음이 바로 녹두빈대떡이었다. 곱게 갈아 둔 녹두에 녹차먹인 돼지 삼겹살 갈은 것을 넣는다. 그리고 전주 이모님이 주신 묵은지를 잘게 썰어 넣고 전분 가루도 조금 섞는다. 그 반죽을 기름 넉넉한 팬에 동그랗게 부치는 것이다. 자글자글 기름이 끓고 시간이 지나면 바닥이 노릇하게 익고, 뒤집어 또 기다리면 맛있는 녹두빈대떡이 완성이다.


7fcb6706-a987-4123-bacd-ea00c782a305.jpg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78386 (마음만큼은 광장시장)


분명 지연은 배가 불렀지만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이 녹두빈대떡은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가. 밀가루의 헛헛함과는 달리 녹두빈대떡은 꽉 차 있었다. 그 맛과 식감과 칼로리가 아주 튼실하다. 게다가 봉구가 미리 만들어 놓은 초간장양파절임이랑 곁들여 먹으면, 정말이지 영원히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밥은 그렇게 건너뛰었다. 모두 배가 불렀고 조금 지치기도 했던 것이다. 주방 한쪽에 그득히 쌓인 전들을 보며, 또 한 쪽에 있는 삼색 나물과 보기만해도 흐뭇해지는 갈비찜 냄비를 보며 네 사람은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또 밤이 깊고 수다가 무르익자(대부분 현경과 학규의 알콩달콩한 얘기였다.) 조금 출출해지는 것도 같았다. 이에 봉구는 전을 몇 개 데웠고 지연은 냉장고에서 맥주와 소주를 꺼냈다.


어른들만의 진짜 명절 밤이 무르익고 있었지만 봉구는 대화에 온전히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다. 내일 아침 명절 상 차릴 일이 아득했기 때문이다. 커다란 상 하나를 제대로 채워야 한다. 따뜻하게 먹는 음식은 따뜻해야 하고 차갑게 먹는 음식은 차가워야 한다. 봉구는 자기 전까지 내내 머릿속으로 상에 올라갈 음식들을 언제 어느 타이밍에 데우고 끓여야 할지 고민하며 잠들었다.


(봉구의 명절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됩니다.)

keyword
이전 21화19화 돈가스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