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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빈대떡의 맛(2)

feat. 명절 당일 이야기

by 바람부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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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깨끗이 한 봉구는 거울을 보며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잠시 후 거실에 큰 상을 펼치고 무려 7명의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밥을 안치고 육수를 끓이고 떡을 불려 넣고 전과 갈비찜을 데우고 계란 지단을 부치고 생선을 구워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순서에 맞게 해야 한다. 떡국을 너무 일찍 끓이면 떡이 퉁퉁 불 것이고, 전을 너무 일찍 데우면 식사 전에 식어버릴 것이다.




봉구는 제일 먼저 쌀을 안쳤다. 그리고 전은 종류별로 덜어 에어프라이 안에 넣어두었다. 식사 시작 10분 전에 데울 것이다. 차가운 양지 육수를 꺼내 끓이기 시작했고, 떡은 찬물에 담가 두었다. 육수가 끓는 동안 지단을 부쳐 단정하게 잘라 두었고 버너를 꺼내 갈비찜을 데웠다. 그 사이 지연이 나와 상을 펴고 나물 반찬을 담기 시작했다. 어느 새 예쁜 한복을 입은 서린이가 나와서 수저를 놓아주었다.


이제 봉구는 옥돔을 구웠다. 너무 세지 않은 불에 오래오래. 옥돔은 다른 생선과는 다른 냄새가 난다. 구수하면서도 콤콤한 짠내. 장인 장모님에게 결혼 소식을 드리러 갔던 날, 한정식 집에서 이 옥돔구이를 처음 먹어보았다. 여태 그 맛을 잊지 못하다가 장모님 카드로 시원하게 긁었던 것이다.


20241227_090414.png 당근마켓 옥돔구이 검색 결과 중


“그냥 밖에서 한 그릇 사먹자니까 아침부터 왜 이렇게 요란스러워.”


장모님이 들어오며 한 마디 하신다.


“엄마 카드로 뭘 했는지는 봐야 할 거 아냐. 앉으세요. 거의 준비 다 됐어.”

“흐음.”


장인어른은 오늘도 말씀이 없으시다. 그래도 상 위에 하나 둘씩 놓이는 음식을 유심히 지켜보신다. 봉구는 얼른 끓는 육수에 떡을 넣고 잘 저었다. 그때 현경과 학규도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아가씨도 왔어? 학규 총각도 왔네.”

“네. 와야죠. 명절이잖아요. 저 이따가 세배도 할 건데요? 세뱃돈 두둑이 주세요!”

“할아버지, 저도요! 저도 세배 할 거예요!”


서린이의 천진한 말에 장인어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봉구는 부지런히 그릇에 밥을 담고 떡국을 뜨고 고명을 올렸다. 학규와 현경, 지연이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자 커다란 상이 가득 찼다.

beef-rib-soup-golden-recipe-step-0.jpg https://www.kurly.com/recipe/671764624701d5e8aa02ef02


“뭘 많이 했네. 자네가 한 건가?”

“아니요. 저희 다 같이 했습니다.”


장인어른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가 다시 가느다랗게 길어졌다.


명절이네, 명절이야. 이게 바로 명절이지. 자, 다들 앉게. 식기 전에 먹어야지.”


장인어른의 말에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른 여섯에 아이 하나가 둘러앉으니 큰 상이 꽉 차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좁은 것 같기도 했지만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장인어른의 말대로 이런 게 명절이니까.


“와, 국물이 끝내주는데요? 오빠, 이거 오빠가 한 거야?”


떡국을 먹은 현경이 놀라며 묻는다.


“응. 한우 양지야. 장모님이 주셨어.”

“이거 옥돔 아냐? 이 귀한 걸 어디서 났어?”

“그거 백화점에서 샀어. 장모님이 카드를 주셔서.”


학규의 물음에 봉구가 답했다.


“아빠, 이 녹두빈대떡 드셔 보세요. 아주 고소하고 맛있어.”


지연이 빈대떡을 하나 덜어주자 장인어른이 얼른 입에 넣었다.


“아주 고소하네. 저기 동대문 가면 유명한 빈대떡 집이 있거든. 거기 보다 낫다!”

“당연하지, 봉구 씨가 직접 녹구 사서 밤새 불려서 갈아서 만든 거야.”

장모님이 주신 믹서로 갈았습니다. 아버님, 갈비찜도 드셔보십시오. 이것도 장모님이 주신 갈비입니다.”


그렇다. 비록 녹두를 불리고 갈아 전을 부친 것은 봉구였고, 어른 세 명이 더 달라붙어 만들어 낸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 돈은 모두 장모님의 카드에서 나온 것이었다.


“엄마, 고마워.”

“어머님, 감사해요.”

“할머니, 최고!”


이어지는 인사에 장모님의 새초롬한 표정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원래 나이 들면 입 닫고 지갑 여는 거라고 했어. 당신도 지갑 좀 열어 보시구랴.”

“기다려 봐. 나도 다 계획이 있어.”


잠시 후 상이 치워지고 거실에 장인과 장모님이 나란히 앉으셨다. 지연과 봉구가 먼저 세배를 하고 서린이도 뒤뚱거리며 세배를 했다. 이어 현경과 학규까지 세배를 하자 장인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 다섯 개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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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뱃돈이다.”

“어머, 이런 걸 언제 준비했대? 치사하게 나한테 말도 안 해주고?”

“당신도 나 모르게 구 서방한테 이것저것 줬다며?”


장인 장모의 귀여운 티격거림을 지척에 두고서 봉구와 지연, 현경과 학규는 봉투를 슬쩍 열어보고는 그 액수에 깜짝 놀랐다.


“아빠, 이건 좀 과한데...”

“그럼 너 조금만 갖고 나머지는 구 서방 주든가.”


그 말에 모두가 봉구를 바라보았다.


“그... 이번에도 그렇고 지난번에도 그렇고 우리 집 다녀갔다며. 우리 집 치우느라 고생 깨나 했을 텐데. 그리고 다들 전주 처형 집에서 김장도 했다고 하고, 내가 무심해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오늘 이....”


장인어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흠흠. 명절음식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다들 바쁘니까 한 그릇 대충 사먹고 말자, 하면서도 막상 명절에 집이 텅 비어 있으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거거든. 명절이면 이렇게 집에 기름 냄새도 좀 나고 사람도 북적이고 배부르게 먹고 덕담을 주고받고... 이걸 얼마 만에 해보는지 모르겠네. 고맙네, 다들.

“지금 당신, 나 명절음식 안 한다고 돌려서 타박하는 거예요?”


장모님이 까칠하게 나오자 장인어른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당신만 안했는가, 나도 안 했지. 구 서방 보게, 남자라고 못할 게 뭐 있는가. 내가 요새 구 서방 보고 생각이 많아. 자, 우리는 얼른 일어서자구. 여기 애들도 쉬어야 할 거 아냐.”


장인어른이 일어나자 봉구가 얼른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지퍼백과 통을 꺼내 전과 생선, 갈비찜과 나물을 고루 담았다.


“어째 친정에 온 기분이네. 사위한테 이런 거 받아가는 사람 대한민국에 나 밖에 없을 거야.”


봉구가 싸준 음식들을 받아들며 장모님이 말했다. 장인어른은 봉구의 손을 오래 잡고 흔들며 고맙다고 또 한 번 말했다. 그렇게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가시자, 봉구는 긴장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 앉았다.


“우리 오빠 몸살 나겠네.”

“그러게. 봉구 씨, 들어가서 좀 누워요.”


봉구는 말없이 그 자리에 드러누워 팔로 눈을 가렸다.


‘하얗게 불태웠다.’


20241227_091041.png 나무위키 검색결과


어느 만화책에선가 보았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도라지가 조금 싱거운 것 같았고 갈비찜 무가 너무 무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했다는 데에는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2차는 우리 집으로 가시죠.”


학규의 그 말에 봉구의 눈이 떠졌다. 모름지기 가정주부란 아무리 배가 불러도, 아무리 기운이 없어도 남이 해준 음식을 먹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난 칼칼한 거.”


봉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어른이야 집에서 기름 냄새가 나서 좋다고 하셨지만, 그 기름냄새를 이틀 내내 맡으며 음식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제 좀 그만 맡고 싶기도 했다. 봉구가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주방으로 간다. 이번에는 학규와 현경에게 줄 음식을 담는 것이다.


“한 봉지씩만 줘. 어차피 우리 같이 먹을 거니까.”

“이러다 두 사람, 살림부터 합치는 거 아니에요?”


지연이 웃으며 말하자 현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벌써 합쳤는데요? 저희 지금 같이 살아요.”


그 순간, 지연은 서린이의 귀를 막아야 할까 고민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문화라는 게 있으니까, 이건 서린이 입장에서 너무 급진적인 것이 아닐까 고민했던 것이다. 짧고도 강렬한 고민 끝에 지연은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서린이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결혼식은 언제 하려고요?”

“안 하려고요. 혼인신고만 할 거예요. 이따 가서 증인 란에 싸인 부탁드립니다.”

“쓰읍...”


결혼식을 안 한다는 말에 지연이 이 사이로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좀 더 고민이 필요한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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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학규는 시장에서 광어회를 떠왔다. 남은 서더리로는 칼칼한 매운탕을 끓였고 낙지도 사와 맛깔스럽게 볶았다. 서린이를 위해서는 진라면을 끓여주었다. 그러는 사이 지연은 매처럼 날선 눈으로 학규의 집에 놓인 현경의 짐을 차근차근 바라보았다. 학규의 허술한 옷장에 현경의 고운 원피스가 끼어 있었고, 거실 TV장 위에 현경의 화장품이 나란히 놓여 있었으며, 침실 바닥에 현경의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이 쌓여 있었다.


“동생아, 이건 아니야. 아무리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죽고 못 살아도, 이건 아니야. 나는 내 동생을 이렇게 시집보낼 수는 없어요.


그리하여 학규와 현경은 매운탕과 낙지 볶음을 한 숟갈도 먹지 못한 채 나란히 앉아서 지연에게 금융 상담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착실히 돈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출을 받으면 임대아파트 정도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 가구는 이케아에서 저렴하게 맞추기로 했다.


“어차피 아이 태어나면 가구는 금방 망가지니까.”


지연이 결혼 선배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결혼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는가 했는데.


“싫어요. 결혼식은.”


현경은 결혼식 문제에서만큼은 완강했다.


“우리 둘이 결혼하는데 굳이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다가 세워놓고 싶지 않아요.”


지연은 혹시 부모님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런 거라면, 요새는 주례도 없이 가벼운 분위기로도 식을 많이 진행하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을 했지만 현경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런 게 싫어요.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남편 손잡고 들어가는 그런 거. 웨딩드레스에 로망도 없고.”

“하긴. 보여주기 식 행사인 건 맞죠.”


지연은 금방 이해했다. 지연 역시 부모님 성화만 아니었으면 혼인신고만 하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봉구를 제대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남들 하는 거 다 해주고 싶은 마음. 하지만 현경은 또 다른가보다.


이렇게 세 사람이 결혼에 대해, 신혼집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는 동안 봉구는 부지런히 매운탕을 떠먹고 밥에 낙지볶음을 비벼먹었다. 지난 이틀, 아니 나흘 간 내내 머릿속에 머물러 있던 명절 음식이 서서히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선에서 합의를 이룬 나머지 세 사람도 곧 식사에 참여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크하~’하는 소리를 내며 얼큰한 음식을 먹고 나니 속이 뻥, 하고 뚫린 것 같았다.


“딱 한 잔씩만 할까요?”


현경의 그 한 마디에 모두가 다시 분주해졌다. 놀랍게도 학규는 봉구가 싸준 전을 데우기 시작했다. 봉구는 더는 못 먹겠다고 생각했지만, 현경이 꺼내온 막걸리를 보자 생각이 또 달라졌다. 막걸리에 녹두빈대떡이라니. 이건 좀... 좋다.


20241227_091405.png http://tnnews.co.kr/archives/43646


그렇게 녹두빈대떡은 냉동실에 들어갈 틈도 없이 사라졌다. 막걸리와 빈대떡이 네 사람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학규와 현경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지연과 봉구의 연애 시절 이야기도 소복이 쌓여갔다. 그러다 문득 지연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너무 행복하다. 그렇지 않아요?”


지연의 눈가가 붉어지자 현경이 놀라며 티슈를 건넸다. 티슈로 눈가를 찍어내며 지연이 말했다.


“오늘 나는, 내가 참 오만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나는 여기 세 사람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참 편하게 컸는데도 엄마 아빠 챙길 생각을 한 번 못했네. 현경 씨처럼 살갑게 굴지도 못하고 봉구 씨처럼 밥 차려 드릴 생각도 못하고.”

“지연 씨는 봉구 건사해주신 것만 해도 나라를 구하신 겁니다.”


학규의 말에 지연이 싱긋 웃었다.


“지난 번 김장하러 갔을 때 엄마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엄마가 그렇게 힘들게 살았구나, 싶어서. 그런데 오늘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걸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아빠도 참 외로웠구나. 가족이라고는 나랑 엄마 뿐이었을 텐데.”

“이젠 아니요, 언니. 봉구 오빠랑 서린이도 있고, 우리도 있잖아요.”


현경이 지연의 손을 잡아주었다.


“맞아요. 이렇게나 식구가 많아졌네. 너무 좋다.”

“추석 때도, 내년 명절에도 우리 다 같이 보내요. 내가 아기 낳으면 언니가 이모 해줘야지.”

“그럼요.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우리 봉구 씨 힘들어서 어떻게 해. 매번 명절 때마다.”


그 말에 봉구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난 행복합니다. 지연 씨.”


봉구의 그 단호하고도 단단한 말에 지연은 결국 와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흐이웅... 이렇게... 좋은 남자랑... 으헝허어... 결혼을 해가지구.... 으흑.... 우리 엄마 아빠까지.... 킁.... 게다가 이렇게 이쁜 동생이랑.... 흐응... 학규 씨도 너무 감사하고... 으허헉.....”


그러자 현경도 눈물을 글썽이다가 울어 버렸고 학규도 자꾸 천장을 올려보았다. 서린이가 자고 있어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눈물바다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봉구는 생각했다. 인생은 아무래도 녹두빈대떡 맛이라고. 돈이 있든 없든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전을 부쳐 먹고 밥을 지어 먹어야 한다. 매일 먹는 밥과 이틀 내내 먹는 녹두전이 조금 지겨워질지라도, 그걸 먹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봉구는 행복하다. 다 함께 둘러 앉아 전을 부치는 순간도, 그 시간을 위해 먼저 손을 걷고 재료를 준비했던 순간도, 거하게 차려진 상에 둘러 앉아 다 같이 밥을 먹었던 그 순간도 정말 행복했다. 벌써부터 다음 추석 명절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그런데 추석에는 장모님 카드도, 세뱃돈도 없겠지...? 오늘 받은 세뱃돈을 잘 아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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